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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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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윤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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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65회 작성일 17-03-1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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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부처님같이

1. 불교의 윤리관
 

1) 불교 윤리의 근간  


윤리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나 규범을 말한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구분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여, 궁극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윤리의 목적이다.


불교의 윤리사상은 업설, 계율사상에 잘 나타나 있다. 업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으로, 불교 윤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많은 분야에서 생산성이 높아져 물질이 풍성해지고, 생활이 편리해졌다. 그러나 자연환경 파괴, 물질만능주의, 도덕과 규범의 상실, 가치관의 충돌 등 그 역기능 또한 적지 않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윤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불교는 세속을 떠난 종교이기 때문에 인간의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적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펴고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 업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불교에서 업은 인간의 의지작용과 행위를 말하며, 거기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고 설하고 있다. 선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른다는 것이 경전의 말씀이다.

 

또한 선과 악의 판단 기준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시되지만, 그 판단에는 사회 윤리적 책임이 함께 따른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1) 삼세업보설  


세상에는 나쁜 일을 저지르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한 일만 하는데도 불우하게 사는 이가 있는 등 인과의 법칙 어긋나는 듯한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유신론자들은 신의 뜻이라고 하고, 운명론자들은 그 원인을 운명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만일 신의 뜻이나 운명 때문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설 자리를 잃고, 인간의 존재성마저 의미를 잃고 만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현상은 삼세업보설로 설명할 수 있다. 삼세란 전생과 현생, 내생을 뜻한다. 그래서 전생의 업에 대한 과보를 현생에서 받는 경우와, 현생의 업에 짓는다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되, 현세에 받을 수도 있고 내세에 받을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윤회설이 등장한다. 윤회설은 인간 윤리의 대상을 현세에서 무한한 시간으로까지 펼쳐 놓는다. 즉 금생만 살고 말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순간적인 환락, 자포자기 등을 억제하고, 좋은 과보를 받기 위해 선을 행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생겨난다. 여기에서 미래 지향적인 불교의 인생관, 가치관 사회 윤리관을 엿볼 수 있다.
 

(2) 십악업과 십선업


인간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불행을 불러올 악업을 일삼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악업열 가지 설명하고 있다.


으로 세가지 억업 때문에 괴로운 보를 받는다. 살생도덕질사음이 그것이다.

으로 짓는 네가지 악업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다.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욕설, 아첨하는 말이다.

으로 짓는 세가지 악업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다. 곧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다.


이상의 열 가지 악업에 반대되는 것이 십선업이다. 즉 살생하지 않는 것. 훔치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거짓말 하지 않는 것. 두말하지 않는 것. 악한 말을 하지 않는 것. 간사한 말을 하지 않는 것.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 바른 견해 그것이다.


이 열 가지 업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인간의 사회생활과 무관한 것은 없다.


작은 구멍 하나 때문에 거대한 댐이 무너지듯이, 사회라는 큰 틀도 개인의 변화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특히 문명의 이기와 개인주의가 범람하는 이 세대에 개인의 가치관과 삶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의 변화는 시대정신을 이끄는 출발점이자 완성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불자 개개인 들이 지켜야 할 생활규범의 원칙으로 제시하신 것이 바로 이 열 가지다. 이열 가지 원칙들은 몸과 입과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몸과 관련된 것이 세 가지, 입과 관련된 것은 네 가지 , 생각과 관련되 것이 세 가지다.
 

첫째, 과 관련된 규칙으로는, 산 목숨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는 것, 남의 것을 훔치지 말고 남에게 베풀 것, 다른 사람과 삿된 관계를 갖지 말고 정숙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셨다. 이 세 가지를 지키지 않을 경우 자신에게도 해로울 뿐 아니라 다른 이를 고통에 빠뜨리는 원인이 된다.

 

둘째, 과 관련된 규칙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경우가 있다. 언어 생활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남에게 정직한 말을 해야 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이나 숨길 것 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스스로 당당한 사람이 되어 거짓말에 쏟는 노력을 긍정적인 분야로 돌려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안온한 상태에서서로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을 속이는 것은 나를 속이는 일이다. 이런 행동이 계속되면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남을 속이게 된다. 인간의 자의식은 언제나 잠재하고 있으므로 속이다 보면 나중에는 누가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닌지 남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깊어지면 좋지 않은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바른 말로 신뢰를 쌓아야 하며, 이상한 말로 남을 현혹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봐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마음 상태가 지속될 경우, 믿음보다는 불신이 깊어져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 이간질은 비윤리적임을 알아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으로 이끄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셋째, 생각과 관련된 규칙들이다. 우리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계율, 선정, 지혜의 삼학을 닦아 나아가는 것뿐이다. 잘못된 행동의 뒷면에는 탐욕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탐욕을 버리는 정신 수양이 필요하다. 부처님께서는 늘 무욕의 경지를 설하셨다. 재가불자들은 탐욕을 억제하고 지족하는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

 

한편, 남을 배려하지 않고 화를 낼 경우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돌이킬 수 없는 분열과 대립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자신의 조급한 마음과 남을 배려하지 않고 화내는 마음을 다루는 일이 중요하며, 그것은 수행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성냄이 없는 경지를 무진에라고 한다. 


2) 일곱 부처님의 공통 계율 - 칠불통계(七佛通戒) 


이러한 불교의 바탕에는 지헤와 자비가 있다. 지헤와 자비로 이러한 잘못된 행동의 원인을 없애고 진리의 입장에 서서 바로 보는 것(正見)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서로 위해주러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선을 추구하는 정도(正道)인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거칠불(過去七佛)]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제악막작(諸惡莫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중선봉행(衆善奉行) 모든 선을 힘써 행하여

자정기의(自凈其意)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시제불교(是諸佛敎)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칠불통계란 일곱 부처님(석가모니 부처님과 그전 여섯 분의 부처님)의 공통 계율이란 뜻으로 이 가르침에 따라 청정하고 맑은 마음으로 모든 더러운 생각을 떨쳐버린 사람은 절대 평화와 대자유의 경지인 해탈과 열반에 도달할 것이다.


중국 당나라때 나무 가지 위에 앉아서 선에 든다 하여 '새둥지'라는 뜻의 조과(鳥菓)로 잘 알려진 지도림(支道林)선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 백거이(白居易)가 선사를 찾아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조과 선사는 '칠불통계'의 가르침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백거이가 웃으며

"그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오" 하자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선사가 백거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 모르나 여든 된 노인도 그것을 실천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다 생각만으로는 쉽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진리도 그대로 실천해 옮기기는 어렵다. 불자들은 이를 위해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 한다.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야 한다.

 
2. 깨달음을 향한 실천 덕목 - 육바라밀 수행 


올바른 불자의 삶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실천하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하는 사람을 대승불교에서는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보살은 부처가 되고자 원을 세운 사람이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을 이롭게 하는 수행을 해야한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보살 수행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이다.


지혜로운 이가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남을 위한 일이 결국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자리이타행을 실천해야 하고 그 수행이 육바라밀(六波羅密) 수행 즉 여섯가지 실천 행동의 완성이다. 바라밀파라미타(Paramita)의 음역으로 '완성' 또는 '피안에 이르다'라는 뜻이다. 

 

1)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


인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을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것을 좋아하나니

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 더 높은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게 한다. <법구경><세속품>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람들은 남에게 많이 베풀면 그 공덕으로 자신에게 좋은 과보가 들어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수행자 등을 만나면 복을 짓는 일이라고 믿고 기쁜 마음으로 베풀었다. 그 까닭에 도움을 받는 사람을 복전 또는 복밭이라고 했다.


보시는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주저없이 베푸는 것이다. 보시에는 재물을 베푸는 재시(財施),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법시(法施)가 있다.


자기 것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이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시는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다. 그래서 보시는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과 그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를 없애주는 길이기도 하다.


탐욕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첫째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요, 둘째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라 하였다.


보시를 행할 때에는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보시할 때 어떠한 보답을 원해서는 안되며, 자신이 남에게 보시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준다는 생각조차 없이 주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강조한 것이다. 


2)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 즉 올바른 생활 규범을 갖는 것이다. 오계, 십선계, 보살계 등 부처님과 한 약속을 일상생활 속에서 어기지 않는 것으로 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다.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은 일절 보지 말라.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그대 자신의 잘못을 반드시 되돌아보라. <숫타니파타>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직전 전생의 과보로 등창이 생겨 고생하셨다는 내용이 <전생담>에 실려 있다. 이것은 부처님조차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알게 모르게 하는 행동이 결국 다시 본인에게로 되돌아온다. 과보를 받지 않으려면 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살면서 업을 전혀 짓지 않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좋은 일을 행하는 계를 지킴으로써 선업을 쌓고 악업을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늘의 행동이 내일의 모습을 결정한다. 부처님은 모든 행동이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하셨다. 한방울의 물이 모여 큰 항아리를 채우는 것처럼 우리가 '별거 아니겠지'하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저지른 악행이 결국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계를 스승으로 삼아 열심히 정진하라'고 당부하셨다.


3) 인욕바라밀(持戒波羅密)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행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는 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한다. 참기 어련운 것에는 탐냄과 성냄, 또는 본능 등이 있다. 수행자가 화를 낸다면 이는 수행이 덜된 징조이다.


불교는 흔히 수행의 종교라고 한다 .수행은 모든 것을 참아가며 참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참는다는 것은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하며, 이를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켜보아야 한다.성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물이나 조건 또는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


내게 분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하거나, 혹은 그가 잘못된 판단으로 그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고 저절로 참을성이 생겨나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억지로 참는것이 아니어야 한다. 억지로 참으면 당장에는 좋을지 몰라도 내마음속에는 화가 쌓여 병이 나고 언제가는 그 화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참을 일마저 없는 것이다. 분별이 끊어진 수행자는 남을 용서하고 참을 일마저 없기 때문에 인욕한다는 생각조차 없다.


4)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

 

정진바라밀은 끊임없는 노력, 정법을 믿어 수행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완성을 위하여 번뇌를 끊고 끊임없이 노력하되, 시작이 없는 과거에서부터 끝이 없는 미래에까지 영원히 계속해 나가는 것을 정진바라밀이라 한다.


과거의 버릇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는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에도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실천하며 살려고 해도 탐욕에 길든 버릇을 하루 아침에 털어버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몸과 말과 마음의 수행이 어느 정도 되는가 싶다가도 금방 그것을 허물어버리는 삼독심이 솟아나곤 한다. 그러므로 더 굳건한 마음으로 수행하면서 습관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투철하게 깨달음을 이루어 다시는 어제의 생활로 돌아기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용감하게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전혀 동요가 없는 상태를 선정이라 한다. 깊이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이 선정바라밀이다.


선정은"마음으로 고요히 집중해 들어간다"는 뜻인데, 분별로 인한 소란과 수면과 같은 멍한 상태에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 정신을 맑게 해준다. 이 선정을 삼매라고도 하는데, 나와 대상이 하나가 되어 맑고 고요하며 흔들림 없는 경지를 일컫는다.


육바라밀의 근거가 되는 반야바라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선정바라밀을 닦아야만 한다.

 

6)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반야바라밀은 지혜의 완성이다. 지혜는 선정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서, 배워서 얻는 지식과는 다르다. 앞에서 소개한 다섯 바라밀, 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의 다섯 가지 수행은 이 반야바라밀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공의 지혜로써,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실천적 지혜를 가리킨다.


지혜의 향기는 아주 멀리까지 전해진다. 마치 만리향의 그윽한 향내가 바람을 타고 먼 곳까지 전해지듯, 지혜로운 사람의 향기는 나와 이웃 그리고 온 세계를 맑게 정화한다.

 

반야바라밀이 없이는 다섯 가지 바라밀은

바라밀이라고 불리지 못한다.

마치 전륜성왕이 윤보가 없을 때에는

전륜성왕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는 것과 같다. <대지도론>  

 

3. 더불어 사는 삶

 

우리는 매순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런데 다른 환경에서 사회란 상호작용을 영위하는 개인들의 집합체이다. 그 개인들의 관계는 각자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여러 원칙과 실천에 의해 지배되고, 그 원칙과 실천은 개인들의 행동에 따라 각기 특징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일반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상호관계에서 개인이 먼저 있고 그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이룬다고 생각하기 쉽다. 개인주의의 입장에서는 자아를 가진 개인이 기본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므로 당연히 개인이 모여 사회가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이 우선하다고 하더라도 무(無)로부터 개인이 생겨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모에 의해 태어나고, 각자 형제와 자매가 있다. 또 친구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즉 누구나 사회 속에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식량이나 의복, 문화 등 모든 것들은 사회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없이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태어나며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이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끊임없이 변한다고 보고 있다. 개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며, 개인과 개인이 모여서 만들어진 이 사회도 변하고 있다. 개인도 변하고 사회도 변하기 때문에 상호 의존적인 인간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한 개인은 사회의 일부이자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 요소로 개인과 사회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화합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단순히 교화를 위한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큰 진리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부처님은 이를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로 설명하셨다.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나와 하나로 느껴져 모든 대상에 큰 자비심이 일어나는 동체대비의 깨달음은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경쟁사회를 살아가며 생기는 수많은 갈등과 대립의 인간관계를 협력과 우호의 관계로 바꾸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게 하는 지혜를 준다. 또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곳을 이상적인 사회로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나무의 뿌리가 상하면 줄기도 상하고, 그러면 잎이 시들고 꽃이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가 건강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다면 자식이 결코 행복할 수 없고, 또 손자 손녀가 병들거나 불행할 것이 뻔하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을 가질 때 다른 사람들과 가깝고 따뜻한 사이가 될 것이다.

 

불자로서 살기 좋은 부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대사회에 팽배해 있는 경쟁과 대립의 인간관계를 협력과 우호의 관계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경전에 나타난 인간관계의 근본은 '자비'이다. 즉 자비는 너와 나를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생명과 체온을 함께 나누는 한 몸이라는 동체대비의 깨달음에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끝없는 사랑과 관심을 말한다.

 

1) 부모와 자녀

 

부모의 사랑을 넓은 바다와 끝없는 하늘에 비유한다. 한 생명을 잉태하여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 길러주고 보살펴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물질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식에게 중요한 존재이고 자식 또한 부모에게 분신과 같은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예부터 부모와 자식 사이는 인륜이 아니라 즉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부모로서 옳은 자세가 아니다. 자기가 낳아서 길렀을지 몰라도 자식은 하나의 인격체이다. 자기 뜻대로 자식의 장래를 결정하고 무소건 따르게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며 자식을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할 일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 자식이 악행을 멀리하고 착한 일을 하게 해야 한다.

셋째, 적절한 교육과 생계 수단인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주어야 한다.

넷째, 결혼할 때가 되어 배우자가 정해지면 가정을 이루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부모는 어느새 나이가 들어 자식에게 의지해야 한다. 자식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의지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효도라고 하셨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어준 은혜는 아루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말씀하셧다.

 

첫째, 늙어신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보살펴 드려야 한다.

둘째, 부모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집안 일을 이어받아 바르게 처리해야한다.

셋째, 조상님께 제사를 올리며 그 뜻을 따라야 한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기 떄문에 부모와 자식간의 세대 차이가 예전보다 더 커졌다. 그러나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해야 한다. 어느 세대나 장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자기 것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다정다감한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 부모를 인생 선배로 존경할 줄 아는 자식이 되면 이른바 세대간의 벽도 허물어질 것이다.

 

2) 스승과 제자

 

아이가 스승 앞에 종아리를 걷고 서 있는 옛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에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매를 맞으면서 익살맞은 표정을 짓는 아이와 엄한 얼굴이지만 사랑이 느껴지는 스승의 모습에서 사제지간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이런 풍경은 우리 시대와는 먼 옛날 이야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스승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제자에게 가르치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스스로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제자는 또한 열심히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스승을 존경하고 받들면서 살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스승의 도리

스승은 제자를 가르칠 때 다음의 다섯가지에 힘써야 한다.

법으로 훈육해야한다.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질문하는 것을 잘 이해시켜야 한다.

착한 벗을 알려주어야 한다.

아는 것을 다 가르치는데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잡아함경 - 선생경>

 

제자의 도리

제자는 스승을 공경할 때 다섯가지 일에 힘써야 한다.

공경하고 높이 칭찬해야 한다.

스승의 은혜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가르침대로 따라야 한다.

늘 사모하고 생각해야 한다.

스승의 뒤를 따르고 명예를 드날려야 한다.

 

3) 아내와 남편

 

불교에서는 부부로 만난 것은 전생부터 지금까지 5백 생의 인연이라고 한다. 그만큼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남녀의 만남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가 부부이다.

부부는 물이나 공기처럼 늘 가까이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서로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잃으면 그 빈자리가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다. 가족을 이룬 두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의지하면서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자식들은 의지할 곳을 잃고 헤멜 것이다. 문제있는 부모에게서 문제아가 생긴다는 말이 있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청소년들을 상담해보면 대부분 부모에게 문제가 있어서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불화는 자식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순간의 기분으로 남편으로서 또는 아내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남편의 도리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다섯가지에 힘써야 한다.

출입할 때 예절로써 대해야 한다.

위엄을 지켜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의식주 걱정이 없게 해야 한다.

때를 맞추어 장신구를 사주어야 한다.

집안 살림을 믿고 맡겨야 한다.

 

아내의 도리

아내는 남편을 섬길 때 다섯가지 일에 힘써야 한다.

남편이 밖에서 돌아오면 일어나서 맞이해야 한다.

집안을 잘 정리하고 음식을 잘 만들어야 한다.

다른 남자를 생각하지 말고 얼굴을 붉혀 다투지 말아야 한다.

남편의 의사를 존중하고 재산을 잘 관리해야 한다.

남편이 휴식할 때 편안하게 해야한다.

 

4) 친구

 

친구는 제2의 자신이라고 한다.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도 친구를 잘못 만나면 나쁜 길로 빠지기 쉽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 때는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좋은 벗을 만나는 것은 도의 전체를 이룬다고 했다. 자신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다.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느냐 보다 진정한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에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있다. 둘은 한 스승 밑에서 같이 수행하던 친구였다. 그들은 좋은 스승을 만나면 서로 연락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만나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께서는 가까이 하면 좋은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째. 친구가 취했을 때 재산을 지켜주고, 두려워할 때 보호자가 되어주며, 필요할 때는 내게 필요한 두 배 이상의 재산이라도 줄 수 있는 친구이다.

둘째. 즐거우나 괴로우나 항상 변하지 않는 벗이란 자신의 결점을 일러주고 또한 나의 비밀을 지켜준다. 재산을 잃어 가난해졌을 때도 버리지 않고,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린다면 이는 진정한 친구이다.

셋째. 착한 말만하는 친구는 악한 일을 멀리하게 하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한다. 새로운 정보와 성인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인도해주는 친구이다.

넷째. 동정심이 있는 벗은 친구가 약해질 때 기뻐하지 않고,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뻐한다. 비난하고 험담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찬양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친구이다. 
 

나의 결점을 일러주는 친구.

나의 결점을 꾸짖어주는 친구.

이런 사람 만나거든 그를 따르라.

그는 내게 보물이 감춰진 곳을 일러주는 사람과 같다.

그를 따르면 많은 이익이 있다.《법구경》 


또 멀리해야할 친구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 무엇이나 눈에 띄는 것은 가져가고,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으려 한다. 자발적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일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한다.

둘째. 교묘한 말로 우정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며, 필요없는 애교를 부린다. 해야할 일이 눈앞에 닥치면 태도가 달라진다.

셋째. 감언이설로 상대방의 나쁜 일에만 보조를 맞추고, 좋은 일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당사자 앞에서는 칭찬하고 돌아서면 비웃고 험담한다.

넷째. 생활이 문란하고 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같이 즐길 때는 좋지만, 결국 무기력하고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친구마저 파멸시키므로 멀리해야 한다.  


의롭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그릇된 일에 사로잡힌나쁜 벗을 멀리하라

탐욕에 빠져있거나 게으른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5) 직장동료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절반 이상이 직장에서 받는 것이라고 한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보통 하루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가장 긴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는 것이다. 그런 만큼 직장에서의 인간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과중한 업무와 직장 동료와의 갈등으로 인해 받는 심리적 압박감은 다른 무엇보다 크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조금씩 내면 서서히 해결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달라지면 사회 전체가 달라질 것이다. 서로에 대한 작은 관심과 배려, 그리고 이해와 격려를 통해 직장을 편안하고 따뜻한 곳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상사는 부하 직원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일에 대한 흥미와 삶의 보람을 느낄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또 적당히 여가를 주어 생활의 활기를 찾도록 해주고,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남이 보는 앞이 아닌 따로 불러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잘 타일러 준다.

 

반대로 부하 직원은 직장과 인생의 선배인 상사를 존중해야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상사가 없는 곳에서 험담을 해서는 안된다.

 

직장은 가정 다음으로 중요한 삶의 터전이다. 직장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고 그에 따라 보수를 받고 생활한다. 서로 존중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자아 성취를 높여가야 한다.

 

4. 인류의 미래와 불교

 

오늘날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달로 물질은 풍요롭고 생활은 편리해졌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발전이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준 것일까?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우선 논리를 앞세워 절제와 검소의 미덕이 사라지고 한탕주의나 과소비가 만연되었다. 그 결과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균형을 잃어 생태계가 위험에 처했다. 또 정보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이 파괴되고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하여 낙태.안락사.자살.인간복제 등의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앞으로도 게속 발생할 새로운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불교적인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1) 환경에 대한 인식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환경문제와 사회 양극화 현상이다. 산 좋고 물 좋기로 이름난 우리나라 금수강산이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다. 수돗물은 물론 이제는 약수조차 믿을 수 없어 집집마다 생수를 사서 마시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동차와 각종 공장의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공기가 탁해져 도심 길을 걷는 것마저 힘들어졌다. 비가 오면 산성비 때문에 농작물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환경문제는 물과 공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쓰레기, 중금속, 방사능, 새집증후군, 아토피성 피부 등 환경과 관련된 수많은 문제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인간 스스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아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나마 자연의 재생력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연의 재생력이 둔화되었고, 이제는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인간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물론 과학문명과 경제개발 정책만으로 이러한 상태가 된 것은 아니다. 과학문명과 결합된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들은 태양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으며, 이들은 서로 다양한 먹이 사슬을 유지하며 균형있는 생태계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연환경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베고 물을 끌어다가 전기를 만들어서 물질적 풍요을 누렸다. 좀 더 편한 생활을 원하는 욕구는 끝이 없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생산활동은 어느새 자연 생태계의 원활한 흐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비해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걱정한 서양의 학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인구의 증가보다 사람의 욕심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을 미쳐 생각지 못한 것이다. 간디는 "자연 자원의 양은 인류가 생존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 라고 말했다. 인류의 탐욕으로 마침내 자연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앞으로 이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 질 것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문제에 대해 불자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연기의 가르침이 이에 대한 답이다, 자연과 우리는 본디 둘이 아니며 서로 의지하면서 조화롭게 살아야 한는 존재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동체대비(同體大비)를 이야기한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큰 자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자심의 몸을 망치지 않듯이 자연을 훼손하는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인간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 의식주 생활에서부터 만족을 아는 생활, 무소유와 근검절약이 환경을 살리는 길이며, 결국 불성을 소유한 자신을 살리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가장 좋은 불교적 실천의 예가 발우공양이다. 발우공양은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수질 오염을 막는 차원을 넘어서서 지옥의 아귀 중생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적극적 생명관을 기반으로 한다. 나 하나의 실천이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소극성에서 벗어나, 나부터 바뀌어야 세계가 바뀐다는 적극적 사명감으로 실천해야 하다. 요즘 한 불교 단체에서 펼치는 '빈그릇운동'이 바로 발우공양의 정신을 잘 살린 현대화된 발우공양법으로서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환경운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반드시 분리수거를 하고, 합성세제나 일회용품 등 환경오염 우려가 있는 제품은 사용을 자제하며, 절제된 소비로 지나친 자원 낭비를 줄여나가는 것부터 실천에 옮겨야 한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나마 청정한 지역으로 남아 있는 사찰 주변의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절에 갈 때는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사찰 주변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호흡하며 걸어 올라가도록 하자. 기도하러 간다고 산 속 암자까지 자가용을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남 보기에도 민망하다.

 

불교계에서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해 푸른사찰운동과 환경보살운동 등을 펼치고 있다. 개인적으로 번거롭겠지만 생활에서 구현하는 작은 실천들이 자연환경 보호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명심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환경보전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각종 노력도 필요하지만, 이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바로 의식의 전환이다.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여 자연을 개발대상으로만 보고 자연파괴를 일삼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기에도 해당되는 진리이다.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 또한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자연의 아픔이 곧 우리의 아픔이다.

 

2) 사회 양극화의 본질

 

사회 양극화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살면서 한쪽이 불행하고 아프면 다른 쪽도 당연히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좁은 대한민국에서 강남과 강북을 가르고, 호남이니 영남이니 충청이니 하며, 지역이기주의로 갈등하는 웃지 못할 일은 부처님 법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주변에 방황하며 엇나가는 청소년이 있는 한 내 자식의 행복도 보장될 수 없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심에서 어찌 나만이 안전할 수 있겠는가. 여의도처럼 넓은 광장에 작은 칸막이 하나 쳐놓고, 그곳만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꾼다고 해서 광장 전체가 아름다워질 수는 없다. 이 뻔한 이치를 모르는 척 눈감는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내 이웃에게 눈을 돌려야 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불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인간성 회복 등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와 지역, 계층간 갈등 구조, 상대적 박탈감에 따른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삿된 욕망을 제거하고, 불교의 화합정신을 바탕으로 절대 자유, 절대 평등의 세계를 추구해야 할 때이다. 또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인간중심의 자연관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전일적(全一的) 우주관, 유기체적 세계관을 확립해야 할 때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의 사상을 통해 생명의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을 강조한 바 있다. 아무리 하찮은 생명체도 그 나름대로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바르게 알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5. 한국불교의 사명

 

1) 새로운 세기의 대안

 

21세기에 접어든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다. 정치.경제.사회 분야는 물론 문화와 인간의 행동양식, 의식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고 있고 가치관과 의식의 다양화, 국제질서의 급격한 이동과 재편 등 변화의 물결을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회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첨단 기술과 정보가 지배하는 사회와 달리 아직도 문맹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곳도 있다. 복지를 통해 높은 삶의 질을 축구하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질병과 굶주림, 기아 등으로 고통 받는 사회도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사회 내부에서도 양극화나 빈부 격차 등의 문제가 발생되기도 한다. 물론 인류의 역사나 문명을 하나의 논리만 가지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관심의 방향과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를 조심스럽게 예측하자면 미래사회는 지식화 사회, 대중화 사회, 다원화 사회, 지구촌 사회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진행되고 있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이것이 더욱 가속화되고 심화될 전망이다.

 

이처럼 사회가 점차 미래사회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불교가 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보기 힘든 다종교 사회이다.

 

수많은 사찰과 교회, 성당은 물론이고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그 밖에 다른 종교들도 존재하고 있다. 많은 종교 단체들이 한결같이 인간 교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사회에는 여전히 갈등, 불평등, 부조리와 모순이 횡행하고 있다. 때로는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우월한 것으로 여겨 종교 단체들 간의 반목과 대립이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을 오히려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심할 경우에는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분열을 조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대립과 분열의 시대에 연기 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조화와 관용의 원리는 불교인들만의 사상을 넘어서서 민족 전체의 사상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후기 산업사회의 정신적 갈등과 인간성 상실은 불성의 계발에 의해서 치유될 수 있다.

 

전쟁과 인구증가, 공해 등으로 인한 여러 문제는 결코 법과 제도의 외형적 요인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정견을 바탕으로 한 정신혁명, 의식혁명이 이러한 사회적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다.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말처럼 병들어 있는 사회를 불자들이 앞장서서 치유해 나간다면 이 땅의 불국토화도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가 수행자와 재가신자가 합심하여 불교를 좀 더 활성화하고 내실화하여야 한다. 또 사회적 문제에 대해 시민사회운동도 펼쳐야 할 것이며, ‘중생 제도’라는 보살의 대원력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2)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

 

불교는 이 땅에 전래된 이래 민족정신과 융합하여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을 이끌어왔다. 특히 불교는 1700여년의 시간을 거치는 과정에서 민족의 생활 이념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우리들의 전통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자신의 종교와 관계없이 불교 전통문화가 형성한 생활양식과 관습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요즈음은 달라졌다. 무분별한 서구적 가치관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정신문화가 빛을 잃은 데다가 동족상전의 6.25전쟁으로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분실되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불교의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일이 한국불교의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다행히 최근 우리 전통문화, 특히 불교문화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불교문화의 창조적 계승은 21세기의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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