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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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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10회 작성일 17-03-1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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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

염불수행.jpg

 

1. 염불수행의 의미

1) 염불의

염불에서 말하는 념이란 지킴(守)을 뜻합니다. 참 성품을 늘 드러나게 하고 끝없이 기르려면 그것을 지키어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염불에서 말하는 불이란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이란 참 마음을 밝게 비춰서, 늘 깨어 있어 어둡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은 무념으로 밝고 뚜렷하게 깨닫고 이렇듯 밝고 뚜렷하게 깨달으면 온갖 생각이 끊어지니 이것을 일러 참 염불이라 합니다.(보조스님의 <염불요문>중에서)

염불이란 부처님의 명호를 소리내어 부르거나 상호를 관상하거나 공덕을 의념함으로써 부처를 보고 부처를 이루며 불국토에 왕생하는 수행법이다. 염불은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는 수행법으로 가장 더욱 대중적으로 행해지는 수행법 중의 하나이다. 특히 정토불교에서는 염불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수행체계와 방법를 세워 발전시켰으므로 요즘은 염불하면 극락왕생을 떼 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정토신앙은 한마디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극락정토는 아미타불이 교주(주불)이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보처 보살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주로 하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보조적인 염불로 한다. 이러한 정토신앙에 근거한 염불외에도 독자적인 관음신앙과 지장신앙에 기반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염불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
이와같이 염불이 불보살의 본원력에 의지하므로 타력신앙이라고 생각되지만 자력이 없는 타력은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 자력과 타력이 동시에 갖추어지는 수행이다. 더구나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토에 나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정토에 날 수 없으며 보리심을 발하고 일심으로 염불행을 닦아야 한다. 정토가 서쪽으로 십만팔천만리 밖에 있다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부처와는 그만큼 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실제로는 십선과 팔정도를 닦으면 그 거리는 바로 사라지고 곧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방극락정토에 계신다는 아미타부처님도 바로 우리 마음의 바탕으로서 우리 마음이 청정해지면 무량한 광명이 이 마음으로부터 밝게 빛날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믿음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양한 염불법 중에서 칭명염불이 주가 되었는데, 염불의 염이 억념, 작의 등의 의식작용을 의미하듯이 생각이 소리와 결합되어 일념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염불이란 입으론 부처를 부르며 마음으론 본성을 찾는 일,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찾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무슨 이익 있으랴.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 법문은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되 분명하고 어지럽지 않도록 해야 하는바, 이처럼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게 염불이다.<선가귀감>

 

2) 염불수행의 역사

염불의 역사는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함경에 보면 삼념, 오념, 육념, 10념 등의 염법이 있다. 즉, 염불, 염법, 염승, 염계, 염시, 염천, 염휴식, 염안반, 염신, 염사의 수행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여래 10호), 나무불을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승단을 생각하는 삼염법, 부처님의 계율과 가장 깨끗하며 선한 공덕이 있는 하늘을 생각하는 오념법, 여기에 보시를 생각하는 것이 더해진 육수념이 있다. 그리고 육수념에 마음의 조용함을 염하는 념휴식, 출입하는 숨을 세고 장단 등을 아는 념안반, 이 몸은 항상하지 않음을 생각하는 념신, 이 몸은 결국 죽는다는 염사 등을 더하여 십념이 되었다.
염불이 지금처럼 중요한 수행법의 하나로 지리잡게 된 것은 역시 정토신앙과 관련이 깊다. 정토신앙은 부처님의 본원에 의지하여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신앙으로, 정토왕생의 방법으로 염불이 권장되기 때문이다. 정토신앙은 기원 후 1~2세기에 걸쳐 대승불교 운동과 함께 출가교단은 물론 재가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정토신앙은 인도에서 서역·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일본으로 전해졌다.
마명보살의 기신론,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과 지도론 또한 세친보살의 정토론 등에서도 염불은 부처님의 무량 공덕과 근본서원을 확신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불·보살과 감응하고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마치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수행하기 쉽고 성불하기 쉬운 이른바, 이왕이수의 행법임을 찬양하였다. 중국에서는 혜원, 담란, 지의, 도작, 선도, 자민, 지례, 주굉 등으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논의와 주장들이 있었으며 다른 종파와 결합하여 쌍수하는 모습으로 정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정토신앙이 대중 속에 뿌리내렸다. 원효, 자장, 의상스님 등 신라 대표적인 스님들은 물론이고 많은 학승들에 의해 정토삼부경에 대한 번역과 각종 주석서가 집필되어 정토교학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대각, 보조, 태고, 나옹스님들에 의해 선종을 위시하여 화엄 법상 천태 밀교 등의 각 종파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독자적인 종파로는 성립하지 못하였고, 조선시대에 함허, 서산, 사명대사 등이 선과 염불을 융합한 선정일치의 견지에서 염불을 역설하여 지금도 염불은 승속을 막론하고 가장 대중적인 수행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인 예로보면 발징화상(發徵和尙)의 만일염불회가 있다. 만일염불회의 동참대중은 승려 31인, 신도 1,828인이었다.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일만일 염불정진을 시작, 29년 만인 병인년(786)에 만일이 되었다. 그 날 금빛찬란한 아미타불이 현신하여 염불대중을 차례로 극락으로 인도하였음을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염불만일회가 처음 개설된 도량이 바로 금강산 건봉사이며 발징화상에 의하여 창도되었다. 건봉사의 염불만일회를 기점으로하여 한국의 대소사찰에는 염불당이 들어서고 만일회의 염불결사운동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현풍 도성암에서는 1624년 성범(成梵)화상의 주도로 일만 팔천일 염불회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근래들어 염불에 대한 불교인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만일염불결사가 새롭게 계승되고 있다.
일본은 헤이안시대 말에서 가마쿠라시대로 들어오면서 법연이 정토종을 개창하고 그의 제자인 친란은 정토진종을 개창하였다. 또한 일편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춤추며 염불하는 법을 가르쳐 종교적인 절정을 맛보게 했으며, 신기(神祇)신앙과 아미타신앙을 융합하여 모든 것이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밖에 없다고 설하는 시종을 열었다. 이들 정토교의 교파는 그 후 각각 발달하여 일본불교의 큰 흐름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현재 대표적인 정토교는 정토진종과 서산정토종, 시종이 있다.

3) 염불 수행의 의의

염이란 마음 속으로 하는 것으로, 마음으로 생각하고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는 것을 염이라 하는 것이다. 유교로써 비유하면, 선비가 생각 생각에 공자를 생각하고 기억하면 공자에 거의 가깝게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생각 생각에 오욕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부처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을 그르다 하는구나! <죽창수필>

참선하는 사람들이 염불을 경시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하는 말이다. 부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잠시라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바로 염불이니, 생각이 곧 부처의 생각이요, 말이 곧 부처의 말이며, 행동이 곧 부처의 행동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같이 염불하는 자의 모습이 당연히 부처를 닮아갈 것이므로 성불하기 위한 방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수행의 문이 여럿이나 궁극적 경지는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문으로든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택법하여 여일하게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염불은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고 또 쉽게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옛부터 재가불자에게, 하근기 중생에게, 말세중생에게 특히 권해졌다. 왜 그런가. 불교 수행의 목적은 성불에 있다. 성불이란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었다는 말이고, 우주만물의 이치를 깨쳤다는 말이고, 자성을 보아 여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망념을 쉬고, 마음을 비우고, 모든 생각을 내려놓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일이 쉽지 않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중생심을 한 번 돌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염불에서는 거두절미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고 한다. 거창한 이론도 복잡한 절차도 필요치 않다. 아무생각없이 염불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생심이 조금씩 사그러든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엔가 염불삼매가 되면 망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자성불이 드러난다. 또한 비록 염불삼매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공덕은 결코 헛되지 않으니,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수행보다 쉽게 할 수 있으면서 공덕이 크고 부작용이 없으니 말세중생에게 권하는 것이.

 

 

4) 염불수행의 원리

염불은 자신의 본성이 부처임을 믿고 자기 마음 가운데서 부처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염불만의 일이 아니고 불교의 모든 수행의 목표이다. 그런데 염불이 탁월한 점은 이행도라는 것이다. 이행도의 뜻은 앞서도 말했듯이 실행하기 쉽고 증득하기 쉽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염불을 통해 소원이 성취되고 장애가 사라지며 무생법인을 얻고, 극락왕생하며 성불하는 원리가 무엇인가. 이것은 모두 불보살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자비심과 우리가 불보살님을 그리는 마음이 만나서 얻어지는 것이다.

대세지 법왕자가 그 동안 五十二 보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여쭈었다.
“나는 생각하니 지나간 옛적 항하사겁 전에 부처님이 출현하시니 이름은 무량광이시며, 열 두 부처님이 한겁 동안에 계속하여 나셨는데, 그 마지막 부처님이 超日月光이시라. 그 부처님이 나에게 염불삼매를 가르치시기를 ‘마치 한 사람은 專心으로 생각하거니와, 한 사람은 전심으로 잊기만 하면 이 두 사람은 만나도 만나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만일 두 사람이 서로 생각하여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 간절하면 이 생에서 저 생에 또 저 생에 이르도록 몸에 그림자 따르듯이 서로 어긋나지 아니 하느니라. 시방 여래께서 중생 생각 하시기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 하거니와 만일 자식이 도망하여 가면 생각한들 무엇하랴. 자식이 어미 생각하기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이 하면 어미와 자식이 세세생생에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리라. 만일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염하면 이 생에서나 혹은 저 생에서 결정코 부처님을 뵈올 것이며 부처님과 서로 멀지 아니하여 방편을 쓰지 않고도 저절로 마음이 열리는 것이, 마치 향기를 쏘이는 사람이 몸에 향기가 배는 것 같으리니 이것이 향광장엄이니라’ 하시더이다.
나는 본래 인행 때에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을 얻었고 지금도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사람을 인도하여 서방정토로 가게 하나이다. 부처님이 원통을 물으시니 나의 경험으로는 이것 저것을 가리지 말고 육근을 모두 가져다가 항상 염불하되 깨끗한 생각이 서로 계속되어 삼마제를 얻는 것이 제일이 되겠나이다.”<능엄경>

아이가 어머니를 잃어 버렸을 때 아이가 스스로 찾는 것보다는 어머니를 부름으로써 그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머니는 자식을 잃어버리면 자식이 찾는 것 보다 더 절실하게 아들을 찾는 것처럼 우리의 어버이이신 불보살님은 우리를 애타게 찾고 계시니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그분을 만나고자 하면 곧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이다. 다만 찾고나면 우리의 근본성품이 곧 아미타부처님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한치의 간격도 없이 중생심이 머물던 바로 그 자리가 법신·보신·화신의 체성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마음이 부처요,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루는 것이며, 삼세제불이 모두 이 마음부처를 증득한 것이니라. 육도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을 왜 모르는가? 다만 미혹해서 염불하기를 좋아하지 않음이니 지혜로운 자는 이를 알아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 앉으나 누우나 항상 부처를 여읜 것 아니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부처를 잊지 않나니 옷 입고 밥 먹는 것도 부처요, 어느 곳을 가나 오나 모두 다 부처일세. 가로도 세로도 모두 부처요, 생각생각이 또한 부처이며 마음마음이 다 부처일세. 손을 놓고 활발히 집으로 돌아가서 부처를 보라!
근본성품의 둥근 광명이 본래 공(空)한 체성의 부처님(空佛)이요, 한 번 굴려 한 생각을 요달하면 그 이름이 곧 부처로다. 항상 머물러 멸하지 않는 까닭에 무량수불이라 하나니 법신 · 보신 · 화신의 체성은 조금도 부처님과 다를 바 없다네.
다만 욕심과 분노와 질투로 스스로 자기 부처를 상하게 하고, 주색잡기로 천진불(天眞佛)을 그르치며, 너다 나다 시비하여 육근으로 부처를 물리치도다.
아! 한 생각 돌이키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 부처를 구할건가? 지옥 · 아귀 · 축생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부처님 법을 듣지 못하리니 정녕코 서로 권할지니, 따로이 부처를 찾고자 애쓰지 말고 은밀히 빛을 돌이켜서 자기 부처에게 귀의할지어다.
(발징화상의 <권념문> 중에서)

 


2. 정토신앙과 염불수행

앞에서는 염불수행의 원론적인 면을 다루었으나 앞으로는 실제수행의 방법론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에 앞어 염불수행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미타정토신앙과 연관된 몇가지 필요한 사항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

 

 

1) 신(信)

총설에서도 수행에 있어 가장 근본은 발보리심과 신심이라고 했다. 정토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정토불교에서는 수행의 기본요건으로 신·원·행의 3자량을 말한다. 첫째 신이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실존을 믿는 것이고, 둘째 그곳에 가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며, 셋째 실천행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수행과 마찬가지로 염불수행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앞에서 말한대로 자신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믿는 것이고, 염불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불설아미타경>에서 석존도 ‘염불법문은 세간에 믿기 어려운 법문이다’ 하고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이 법의 골간은 완전히 신심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신심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다. 신심이 있으면 행동에 옮길 수 있어서 인(因 = 信) · 과(果 = 行)가 원만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불문이 비록 넓다 하더라도 불신하는 중생은 능히 제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 · 원 · 행을 정토의 삼자량이라 한다. 자량이란, 비유컨대 먼 길을 여행하자면 자재와 양식이 필요하여, 만약 이 두 가지가 빠지면 절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 삼자량이 다시 서로 연관관계가 있어서 차례대로 신으로 말미암아 원이 나게 되고 원으로 말미암아 행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신이 만약 구족하지 못하면 원과 행도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의심은 도에 장애가 되어 원과 행이 생기(生起)할 수 없게 한다. 만약 신심이 있으면 자연히 그 국토에 태어나기를 원하게 되며,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자연히 법을 의지하여 행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만약 차토의 선입견에 빠져있는 채 여래의 신변(神變)과 중생의 정식(淨識)으로 종합하여 만들어진 극락세계를 비교하려 한다면, 마치 개미가 인간의 국가와 사회의 갖가지 복잡한 조직과 행동을 추측하려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니, 설사 만년을 추측하더라도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노릇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개미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부처가 아닌 이상 어떻게 명백히 부처의 지혜와 신통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기왕 분명히 알 수 없다면 함부로 추측하는 따위의 우를 범하지 말하야 할 것이요, 다만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실행하여 착오나 공(空)에 떨어지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매우 총명하다. 절대 그러한 속임수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한다면, 지혜있는 자가 보기에는 이야말로 어리석고 서투른 짓이며, 복혜(福慧)가 천박한 자의 소행임을 간파할 것이요,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가장 얻기 어려우면서 가장 손쉬운 법문을 능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정법개술)

이와같이 정토왕생을 위해서는 신·원·행의 3자량이 필요하며, 그 중에서 신이 기본이다. 예를 들어 산에 오른다고 하자. 먼저 산이 거기에 있으며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산에 오르겠다는 마음을 내야 하며, 세 번째 실제로 산에 올라야 한다. 그러나 처음에 원을 세울 때 산의 중턱까지만 가겠다고 생각한다면 정상까지 갈 수 없을 것이다. 정상까지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중턱에서 내려다 본 경치에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오르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의 믿음이 중요하고 다음으로 정상까지 가겠다는 발심이 중요하며, 마직막으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오르는 행이 필요하다.

 

 

2) 원()

이와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것이 원이다. 무슨 일이나 목표가 분명해야 목적지에 재대로 도착할 수 있다. 모든 불보살님도 본원 본원이란 根本誓願의 준말로서 모든 부처님들이 지난 세상에서 성불하고자 뜻을 세운 여러가지의 서원을 말한다. 본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는데, 총원은 모든 부처님들의 공통한 본원 곧 사홍서원이며, 별원은 부처님마다 중생 제도의 인연에 따라 세우신 바 아미타불의 48원이나 약사여래의 12원 등이다.
에 의해 수행하여 그것을 성취하였다. 정토행자는 무엇을 발원해야 하는가. 먼저 법장비구의 48대원을 통해 우리가 세워야할 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우리가 염하는 아미타불은 바로 眞如實相이요, 중생이 본래 갖춘 자성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이 성불 이전 법장보살 때 세운 48의 서원은 곧 사홍서원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삼세 모든 부처님의 서원인 동시에 성불을 지향한 우리 중생의 서원이요, 이상이기도 한 것이다.

<법장비구의 48대원>
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에 지옥과 아귀와 축생의 삼악도가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수명이 다한 뒤에 다시 악도에 떨어지는 일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중생들의 몸에서 찬란한 금색 광명이 빛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중생들의 모양이 한결같이 훌륭하지 않고 잘나고 못난이가 따로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숙명통을 얻어 백천억겁의 옛 일들을 알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6.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천안통(天眼通)을 얻어 백천억의 모든 세계를 볼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천이통(天耳通)을 얻어 백천억의 많은 부처님들의 설법을 듣고 그 모두를 간직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타심통(他心通)을 얻어 백천억 모든 국토에 있는 중생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신족통을 얻어 순식간에 배천억의 모든 나라들을 지나가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모든 번뇌를 여이는 누진통을 얻지 못하고 망상을 일으켜 자신에 집착하는 분별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만약 성불하는 정정취(正定聚)에 머물지 못하고 마침내 열반을 얻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저의 광명에 한량이 있어서 백천억의 모든 불국토를 비출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저의 수명이 한정되어 백천억겁 동안만 살 수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성문들의 수효가 한량이 있어서 삼천대천세계의 성문과 연각들이 백천겁 동안 세어서 그 수를 알 수 있는 정도라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의 수명은 한량이 없으오리니. 다만 그들이 중생제도의 서원에 따라 수명의 길고 짧음을 자재로 할 수는 있을지언정, 만약 그 수명에 한량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좋지 않은 일은 물론이요 나쁜 이름이라도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님들이 저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제 이름을 다만 열 번만 불러도 제 나라에 태어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 세계의 중생들이 보리심을 일으켜 모든 공덕을 쌓고, 지성으로 저의 불국토에 태어나고자 원을 세울 때, 그들의 임종시에 제가 대중들과 함께 가서 그들을 마중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제 이름을 듣고 저의 불국토를 흠모하여 많은 선근공덕을 쌓고, 지성으로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마음을 회향할 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모두 32상(相)의 훌륭한 상호를 갖추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불국토의 보살들이 제 나라에 와서 태어난다면, 필경에 그들은 한 생만 지나면 반드시 부처가 되는 일생보처의 자리에 이르게 되오리다. 다만 그들의 소원에 따라, 중생을 위하여 큰 서원을 세우고 선근공덕을 쌓아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또는 모든 불국토에 다니며 보살의 행을 닦아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고, 또한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위없이 바르고 참다운 가르침을 세우고자 예사로운 순탄한 수행을 초월하여 짐짓, 보현보살의 공덕을 닦으려 하는 이들은 자재로 그 원행에 따를 것이오나, 다른 보살들이 일생보처에 이르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입고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하여 한참 동안에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불국토에 두루 이를 수가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드리는 공덕을 세우려 할 때 그들이 바라는 모든 공양하는 물건들을 마음대로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부처님의 일체 지혜를 연설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천상의 금강역인 나라연과 같은 견고한 몸을 얻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과 일체 만물은 정결하고 찬란하게 빛나며, 그 모양이 빼어나고 지극히 미묘함을 능히 측량할 수 없으오리니, 만약 천안통을 얻은 이가 그 이름과 수효를 헤아릴 수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을 비롯하여 공덕이 적은 이들까지도, 그 나라의 보리수 나무가 한없이 빛나고 그 높이가 4백만리나 되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스스로 경을 읽고 외우며 또한 남에게 설법하는 변재와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보살들의 지혜와 변재가 한량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불국토가 한없이 청정하여, 시방 일체의 무량무수한 모든 부처님세계를 모두 낱낱이 비쳐봄이 마치 맑은 거울로 얼굴을 비쳐보는 것과 같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지상이나 허공에 있는 모든 궁전이나 누각이나 흐르는 물이나 꽃과 나무나, 나라안에 있는 일체만물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보배와 백천가지의 향으로 이루어지고, 그 장엄하고 기묘함이 인간계나 천상계에서는 비교할 수 없으며, 그 미묘한 향기가 시방세계에 두루 풍기면, 보살들은 그 향기를 맡고 모두 부처님의 행을 닦게 되리니, 만약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불국토의 중생들로서, 저의 광명이 그들의 몸에 비치어 접촉한 이는 그 몸과 마음이 부드럽고 상냥하여 인간과 천상을 초월하오리니,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의 중생들이 제이름을 듣고, 보살의 무생법인과 깊은 지혜 공덕인 다라니 법문을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부처님 세계의 여인들이 제이름을 듣고 환희심을 내어 보리심을 일으키고 여자의 몸을 싫어한 이가 목숨을 마친 후에 다시금 여인이 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의 보살들이 제이름을 듣고 수명이 다한 후에도 만약 청정한 수행을 할 수 없고, 필경에 성불하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나 모든 부처님세계의 중생들이 제 이름을 듣고 땅에 엎드려 부처님을 예배하며 환희심과 신심을 내어 보살행을 닦을 제, 모든 천신과 인간들이 그들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의복을 얻고자 하면 생각하는 대로 바로 훌륭한 옷이 저절로 입혀지는 것과 같으오리니, 만약 그러지 않고 바느질이나 다듬이질이나 물들이거나 빨래할 필요가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누리는 상쾌한 즐거움이 일체 번뇌를 모두 여왼 비구와 같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0.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청정한 불국토를 보고자 하면, 그 소원대로 보배나무에서 모두 낱낱이 비쳐 보는 것이 마치, 맑은 거울에 그 얼굴을 비쳐 보는 것과 같으오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여러 보살들이 제이름을 듣고 부처님이 될 때까지 육근이 원만하여 불구자가 되는 일이 없으오리니 만약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들은 이는 모두 청정한 해탈삼매를 얻을 것이며, 매양 이 삼매에 머물러 한 생각 동안에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도 오히려 삼매를 잃지 않으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듣고도 수명이 다한 후에 존귀한 집에 태어자지 않는 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이름을 듣고 한없이 기뻐하며 보살행을 닦아서 모는 공덕을 갖추오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들으면 그들은 모든 부처님을 두루 뵈올 수 있는 삼매를 얻을 것이며, 매양 이 삼매에 머물어 성불하기까지 언제나 불가사의한 일체 모든 부처님을 뵈올 수 있으오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은 듣고자 하는 법문을 소원대로 자연히 들을 수 있으로리니, 만약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듣고 나서 일체 공덕이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에 이를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만 듣고도 바로, 설법을 듣고 깨닫는 音響忍과 진리에 수순하는 柔順忍과 나지도 죽지도 않는 도리를 깨닫는 無生法忍을 성취하지 못하고, 모든 불법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를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법장비구는 중생구제를 위한 간절한 염원으로 48가지 서원을 세우고 그것을 모두 이루어 극락정토를 완성하고 스스로는 아미타불이 되었다. 우리도 이와같은 원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염불행자의 서원으로는 사홍서원과 여래십대발원을 둘 수 있다. 이 외에도 각자 자신의 처지에 맞는 서원을 세우기 바란다. 이를테면 병이 많은 사람을 위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병고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기를 발원합니다. 이 세상사람들 중에 베고픔으로 고통받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이 없기를 발원합니다. 이 세상에 전쟁과 다툼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등.

영원토록 삼악도를 여의옵기 원하오며
하루속히 탐진치를 어서 끊기 원하오며
한결같이 불법승을 듣기를 원하오며
부지런히 계정혜를 닦기를 원하오며
한결같이 부처님법 배우기를 원하오며
변함없이 보리심 지키기를 원하오며
결정코 극락세계 태어나기 원하오며
하루속히 아미타불 만나뵙기 원하오며
온 세상에 나의 분신 두루하기 원하오며
한량없는 모든 중생 제도하기 원합니다.


3) 행(行)

아난아, 이렇듯 법장비구는 세자재왕부처님 앞에서 범천과 마왕과 용신 등 팔부대중과 그 밖에 많은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러한 48가지 원을 세우고 한결같이 뜻을 오로지 하여 불국정토를 건설하고자 굳은 결심을 하였느니라
그가 세우려는 불국토는 한없이 넓고 청정미묘하여 비할 데가 없으며, 또한 그 나라는 영원 불멸하여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쇠미하지 않는 곳이니라. 법장비구는 이러한 청정하고 장엄한 정토를 세우기 위해 다시 불가사의한 영겁의 오랜 세월 동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보살행을 닦았느니라. 그는 탐냄과 성냄과 남을 헤치는 생각은 내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았으며, 감각기관의 대상인 모든 형상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촉감이나 분별하는 생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았다. 또한 어려움을 참아내는 인욕의 행을 닦아 어떠한 고통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적은 욕심에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의 마음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에 물들지 않았으며, 항상 삼매에 잠겨서 밝은 지혜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었느니라.
남을 대할 때는 거짓과 아첨하는 마음이 없이 언제나 온화한 얼굴과 인자한 말로써 미리 중생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청정결백한 진리를 추구하여 모든 중생에게 은헤를 베풀었느니라.또한 그는 불법승 삼보를 공경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겼으며, 갖가지 수행을 쌓고 복과 지혜의 큰 장엄을 갖추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게 하였느니라. < 무량수경>

법장비구는 어떻게하여 48대원을 모두 이룰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루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세월 동안에 수없는 보살행을 통해 가능했다. 애초부터 법장비구의 결심은 그 무엇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철두철미한 것이었다. <무량수경>에 보면 법장비구는 세자재왕 부처님께 정토를 이루는 수행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세자재왕 부처님은 “비록 바닷물이라도 억겁의 오랜 세월을 두고 쉬지 않고 품어 내면 마침내 그 바닥을 다하여 그 가운데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바닷물을 퍼내는 심정으로 보살행을 닦았던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의 결심도 이러해야 한다. 내가 비록 무수한 세월동안 무명에 덮혀 있었으며, 이 세상이 탐진치 삼독으로 물들어 헤어날 날이 기약없지만 언젠가는 그 마음이 청정하고 이 땅이 청정할 정토를 완성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 날을 향해 쉼없이 가야 한다. 법장비구의 본원이 아니었다면, 정토도 아미타불도 없었을 것이다. 법장비구의 48대원과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의 수행력에 의해 중생은 구원의 빛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비결은 바닷물을 퍼낸다는 세자재왕의 비유처럼 그렇게 지성으로 진리를 구한 때문이다. 거룩하고 거룩하셔라, 찬탄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네.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비록 우리의 행이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산골짜기 도랑물이 멈추지만 않는다면 바다에 이르는 것은 의심할 일이 못된다. 다만 사람이 행하지 않고 좁은 소견으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안타까울뿐이다.
그렇다면 염불행자의 수행법은 어떤 것이 있는가. <무량수경>에는 삼배왕생의 길이 있다고 한다. 첫째 상배는 출가사문이 되어 보리심을 발하고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염하며, 여러 가지 공덕을 닦아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라 하였다. 둘째, 중배의 사람은 재가의 신자로서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내고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염하며, 보시·지계 등 선근 공덕을 쌓아 이것을 회향하여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다. 셋째 하배는 여러 가지 공덕을 쌓지는 않더라도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발하고 생각을 오로지하여 다만 열 번만이라도 아미타불을 염해서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다. 모두 보리심을 발하고 일념으로 염불해야 하며, 그 외에 공덕에 따라 상배와 중배, 하배로 나뉜다.
<관무량수경>에서는 극락왕생의 수행법으로 먼저 세가지 복을 닦으라 권한다. 첫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기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고, 지성으로 열가지 선업을 닦는 것이다. 둘째,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여러 가지 계율을 지키며, 거동과 예의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셋째, 보리심을 일으켜 깊이 인과의 도리를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한편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힘써 권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16관법을 행한다. 16관법 중에 제14 상배관과 15 중배관, 16 하배관을 보면 중생이 근기가 각기 달라 수행하는 모습과 극락왕생하는 모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보면 근기에 따라 지향해야 할 바를 알 수 있고, 하근기라하여 절망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4) 아미타불

믿음의 원천인 아미타불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아미타부처님은 이미 성불하신지 10겁이나 되었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설법하며 교화하고 계신다고 한다. 1겁이란 예를 들면, 둘레가 40리나 되는 돌산을 장수하는 사람이 백 년에 한 번씩 비단결 같은 얇은 옷으로 스쳐서 이 돌산을 없애도 아직 1겁이 안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1겁이란 실제로 무한한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시간 속의 현재에 주하면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설법하시는 ‘영원한 현재불’이라는 의미이다.
아미타부처님은 이와 같이 열반에 들지 않고 영원토록 중생을 교화하시는 부처님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수명이 무량하고 빛이 무량한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사리불아, 그대 생각에 저 극락세계의 부처님을 어찌하여 아미타불이라 부르는지 아느냐? 사리불아, 저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이 없어 시방세계의 모든 나라를 두루 비추더라도 걸림이 없기 때문에 아미타불이라 하고, 또한 그 부처님의 수명과 그 나라 사람들의 수명이 한량이 없고 끝이 없는 아승지겁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이라 이름하느니라. <아미타경>

아미타부처님은 법장비구 때의 수행력에 의해 한량없는 위신력을 갖춘 부처님이 되었다. 그 위신력의 빛은 무량한 곳을 두루 비추고 계시니 그 빛을 만나면 고통이 사라지고 해탈을 얻는다. 또한 그렇게 하시기를 끝없는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고 또한 미래에도 계속하실 것이니 수명이 끝이 없다. 이렇게 수행을 통해 결과를 얻으신 부처님으로 아미타부처님을 보신불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는 법신불이라고도 하고 화신불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현실에 나타난 화신불이건 수행의 과보를 보이신 보신불이든 진리 그 자체인 법신불이건 체성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미타부처님이란 나의 자성불이자 법신불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처님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몰라 밖으로 부처를 찾을 뿐이니, 우리가 모든 생각과 반연을 끊고 일심으로 염불할 때 그 속에서 나는 거짓 나를 벗어나 진실한 나, 즉 부처와 하나가 된다. 망상의 내가 자리를 비키고 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나의 진면목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다만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죽어도 놓지 못하고 생을 거듭하며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터운 무명의 벽도 염불 공덕으로 무너져 내리고 부처의 광명이 빛을 발한다. 이때 현실에서 아미타불을 만나고 나의 본래면목을 발견하며, 정토에 왕생한다.

 

 

5) 극락정토

우리가 이루고자 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정토는 어떤 곳인가. 우리는 왜 정토왕생을 원해야 하고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룰 수 있는가.

① 정토의 정의

아미타불의 본원으로 건립된 정토의 이름이 극락정토이며 흔히 극락세계라 하는데 범어 수하마제(須訶摩提)의 뜻 번역이다. 그런데 극락정토란 청정하고 안락한 국토의 뜻으로서 다섯가지 흐린 것(五濁)이 없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한 모든 괴로움이 없으며, 오직 즐거움만 있는 세계로서, 생사윤회하는 삼계를 뛰어넘은 영원한 낙토(樂土)임을 경전에서는 찬탄하여 마지 않는다. 그래서 극락정토는 모든 불 · 보살이 수용하는 청정한 보토(報土)인 동시에 중생들 또한 번뇌 업장만 소멸하면 금생과 내세를 가리지 않고, 스스로 보고 느끼고 누릴 수 있는 상주불멸(常住不滅)한 실상의 경계인 것이다.
이렇듯 극락세계는 시간 · 공간을 초월한 영생의 세계인데도 경에는 십만억 국토를 지난 아득한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번뇌에 때묻은 중생의 분상에는 실재하지 않는 꿈같은 세계이기 때문에 중생의 차원에 영합(迎合)한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임을 경전을 정독 음미할 때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범부의 망정(妄情)을 여윈 성자의 정견(正見)에는 사바세계 그대로 극락세계일지라도, 온갖 번뇌에 얽매이고 가지가지의 고액이 충만한 현실에 시달린 고해(苦海) 중생에게는 영생 안온한 극락세계란 역시 너무나 머나먼 이상향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은 필경 돌아가야 할 본래 고향인 극락세계를 동경하고 흠모하며, 거기에 이르기 위한 간절한 서원을 굳게 세우고, 한량없는 선근공덕을 쌓아야 할 것이다.ꡔ전통선의 향훈ꡕ 청화선사 법어집, 대한불교 금륜회편 p.375~376

정토란 맑고 깨끗한 땅으로 번뇌가 없는 곳이란 뜻이다. 번뇌가 있는 중생이 사는 곳이 예토이고 번뇌가 없는 불보살이 사는 곳이 정토이다. 그래서 정토를 불토 또는 불국토라고 한다. 따라서 정토란 사후에 가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한 마음 돌려 깨달으면 바로 정토에 남을 알아야 한다. 이 정토는 흔히 말하는 천상(천당, 천국)과는 달라 3계와 6도를 벗어난 곳이다. 천상은 6도 윤회 중의 최상의 곳으로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는 곳이지만 이곳도 업에 끌려가는 윤회의 세계이므로 복이 다하면 다시 3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정토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벗어났으며 6도 윤회를 벗어난 세계이므로 그곳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그곳은 고통이 없고 기쁨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극락이라고 하는데 이 즐거움도 천상의 즐거움이 비길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천상의 즐거움은 한계가 있는 즐거움으로 유루복에 그치지만 정토의 즐거움은 진리 속에서 나고 진리와 함께 하는 법락으로 무루복인 것이다. 따라서 천상의 복덕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공덕이 있으니 바로 성불의 터전인 것이다. 정토의 구체적인 모습은 앞의 법장비구의 48대원을 이룬 것이 정토이니 그것을 그대로 그려보면 될 것이다. 또한 <관무량수경>과 <아미타경>에도 정토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정토란 한마디로 성불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그곳에 태어나면 성불이 보장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천상에 나기를 바라기 보다 정토에 왕생하여 윤회로부터 해탈하고 부처를 이루기를 마땅히 원해야 할 것이다.



② 유심정토와 타방정토

그렇다면 이러한 정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타방정토설과 유심정토설이 있다. 타방정토란 이 세상 밖 어느 곳에 정토가 실제로 있다는 것이고, 유심정토란 우리 마음 밖에 따로 찾아야 할 정토는 없으며 마음이 청정하면 그 곳이 곧 정토라는 것이다.

유심불토라는 것은 마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날 수 있는 곳이니, <여래부사의경계경>에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따로 있는 바가 없고 오직 自心에 의지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법이 오직 마음의 현상임을 분명히 알아서 수순인(隨順忍 ; 화엄의 ‘十忍品’에 나오는 보살이 무명번뇌를 끊고 온갖 법이 본래 적연한 줄 깨달을 때 생기는 열 가지 安住心 가운데 第二忍. 따라서 忍은 認의 뜻이 있다. 이 忍은 지혜로 온갖 법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진리에 기꺼이 따름을 말한다)을 얻고는 혹은 초지에도 들며 몸을 버리고는 묘희세계에도 나며 혹은 극락의 정토에도 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을 알면 바야흐로 유심인 정토에 나거니와 경계에 집착하면 다못 반연하는 바의 경계 가운데만 떨어질 것이니, 이미 이와 같이 인과가 차이가 없는지라 곧 마음 밖에는 법이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평등의 문’과 ‘무생의 뜻’을 비록 교에 의지해서 믿기는 하지만 당인(當人) 스스로를 살펴보아 역량은 미흡하고 관력(觀力)은 얕으며 마음도 또한 분주히 들뜬다면 반연하는 바의 경계는 강하고 무시겁래로 사사로이 익혀 온 습기는 무거운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러므로 이런 이들을 위해 제불께서 방편문을 베푸시었으니, 간절한 원력과 가피의 힘으로 모름지기 불국에 나서 인연따라 인력(因力)을 쉽게 이루고 속히 대승의 보살도를 행할 것을 권하신 것이다. 이를테면 <기신론>에서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 올바른 믿음을 구하려 하나 마음이 성략(怯弱)하므로 이 사바세계에서 항상 부처님을 만나뵙고 친히 공양하지 못할까 근심하기를 ‘신심을 성취하기 어렵다’ 하여 뜻이 물러나려 하는 이는 마땅히 알라. 여래께서 뛰어난 방편을 두어서 신심을 섭호(攝護)하셨나니, 뜻을 오로지 하여 부처님을 염하는 인연을 지으면 원(願)을 따라 타방불토에 득생하여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며 또한 악도를 기리 떠날 것이니, 이른바 수다라에 설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오로지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생각하며 닦은 바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상에 나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뜻따라 곧 왕생하게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항상 부처님을 뵙는 까닭으로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리니, 이와 같이 저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관찰하여 부지런히 닦아 익힌다면 반드시 원생함을 얻어서 정정(正定)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한 것 등이다. <만선동귀집 제2장>

유심정토와 타방정토 설을 모두 긍정하고 있다. 상근기 보살은 마음을 깨달아 정토에 나니 유심정토가 맞는 말이나, 하근기 중생은 마음을 깨닫기가 어려우므로 부처님이 방편으로 베푸신 타방정토에 의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로 상반될 것만 같은 유심정토와 타방정토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다음의 예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이가 “내 마음 밖에 따로 정토가 없으니(唯心淨土), 10만억 찰 밖에 어찌 따로 정토가 있으랴” 하였다. 이 유심정토의 설은 원래 경에서 나온 것으로, 결코 그릇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말만을 인용하여 근거로 삼는다면 그 뜻을 잘못 안 것이다. 대개 마음이 곧 경계로서 마음 밖에 경계가 없는 것이요, 경계가 곧 마음으로서 경계 밖에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계가 바로 마음이라면 어찌 굳이 마음에만 집착하여 경계를 배척할 수 있겠는가. 경계를 버리고 마음만을 주장하는 자는 마음을 깨닫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죽창수필 2집>

마음 밖에 경계가 없으니 또한 경계 밖에 마음이 없다. 이러한 마음과 경계의 관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정토가 마음 안에 있느니 밖에 있느니를 따지는 것이다. 경계라는 것이 마음을 떠나 있을 수 없으나, 경계는 분명히 있으니 유심정토라고 하는 것과 타방정토라고 하는 것이 근기에 따른 구분임이 명백하다. 이것을 모르면서 부질없는 의심을 일으켜 이것저것 따져본 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서쪽으로 십만팔천리 밖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제자가 항상 보오니 승속간에 흔히 아미타불을 염하여 서방에 태어 나기를 원하옵는데 과연 저 곳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옵니까? 청컨대 화상께서는 이 의심을 풀어 주옵소서” 하고 자사가 또 여쭈었다.
“사군이여, 잘 들으라. 혜능이 말하리라. 세존께서 왕사성 안에 계실 적에 서방으로 인도 교화하는데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경문에 분명히 ‘여기서 멀지 않다’ 하셨고, ‘만일 현상계의 공간 거리로 말한다면 잇수로 10만 8천이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곧 몸 가운데 10악과 8사를 가리킨 것으로서 멀다는 말씀인 것이다. 멀다고 하신 것은 낮은 근기를 위함이고 가깝다 하신 것은 높은 근기를 위함인 바,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있지만 법에는 두 가지가 없느니라. 미하고 깨달음이 다르기에 견해가 더딤과 빠름이 있나니 미한 사람은 염불해서 저 곳에 태어나기를 구하고 깨달은 사람은 제 마음을 스스로 깨끗이 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의 깨끗함을 따라서 곧 불도가 깨끗하다’ 하시니라.
사군이여, 동방 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는 것이요 서방 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치 못하면 역시 허물이 있는 것이니 동방 사람이 죄가 있을 때에는 염불함으로써 서방에 태어나기를 원하거니와 서방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염불하여서 어느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할 것이냐? 어리석은 범부는 자성을 모르므로 제 몸 속의 정토를 알지 못하고 동방이니 서방이니 원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 있으나 한 가지이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머무는 바 곳을 따라서 항상 안락하다’ 하셨느니라.
사군이여, 마음 자리에 착하지 않은 것만 없으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으려니와 만일 착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아무리 염불을 해 봐도 태어나기 어려우니라. 내 이제 여러 선지식들에게 전하노니 먼저 10악을 없애는 것이 10만리를 가는 것이고 8사(邪)를 없애는 것이 8천리를 지낸 것이니 생각 생각 성품을 보아 항상 평등하고 곧 바르게 행하면 이것이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문득 아미타불을 보는 것이니라.<육조단경>

유심정토와 타방정토는 근기에 따른 설명의 차이일뿐 결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니, 낮은 소견으로 감히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밖에 경계가 없으니 마음이라고 해도 경계라고 해도 본래 둘이 아닌 것이다. 다만 깨달은 사람은 둘이 아닌 줄 알거니와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으로 본성을 깨닫고 모든 악을 여의면 곧 정토에 나려니와 10악과 8사10악은 10선(계율참고바람)의 반대이고 8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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