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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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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큰스승님의 법화경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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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136회 작성일 15-02-1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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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카페 : 『 가장행복한공부 』
序品 第一

   
  • 매일 이렇게 여러분들과 함께 부처님 말씀을 가지고 이런 시간을 가지다 보니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옛날에 총림에는 열반당 이라고 하는 그런 방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스님들이 오래 사셔서 너무 노쇠하거나, 아니면 아주 심한 병이 들어서 병고에 시달리는 그런 분들을 마지막 모시는 곳이 열반당입니다. 그래서 정말 인생의 최후를 맞이하는 그런 느낌으로 열반당에 살 때 그 처량한 모습을 읊은 시가 있습니다. 그 시와 오늘날 저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과는 너무 대비가 되어서 그 때 그 광경을 읊은 시 한 구절을 소개할까 합니다.
사해무가 병비구 (四海無家 病比丘) 고등독족 파상두 (孤燈獨照破床頭)라. 저희들이 공부하는 치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사해무가 병비구라." 사방으로 아무리 돌아보아야 아무도 친척도 없고 아는 사람 없고, 또한 가족도 또한 없다. 그리고 그런 신세의 병든 비구가 ”고등독족 파상두“라. 외로운 등불이 홀로 병상을 그 병상도 다 허물어져서 삐걱삐걱 하는 그런 병상을 외로운 등불만이 홀로 비추고 있구나!.” 하는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어릴 때 치문에서 배운 구절인데 참 처량하기 이를 데 없고, 외롭기 이를 데 없고 불쌍하다면 참 그럴 수 없이 아주 불쌍한 그런 정경을 그려놓은 그런 시입니다. 아마 예전에는 그랬을 거예요. 저도 아주아주 오래 전에 어릴 때 은혜사에서 학인으로 있을 때 학질이 걸려 가지고서 상당히 힘든 그런 세월을 보낸 적이 있는데 정말 아주 심하게 아팠었습니다. 그럴 때 도반들이 병실에 잘 오지 않더라구요. 병든 사람 좋아하는 사람 사실 없습니다.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보면 열반당에 그런 글이 써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해무가 병비구' 사해에 사방으로 돌아봐야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병든 비구, 깨어진 침상 머리만 외로운 등불이 홀로 비추고 있구나! 그 한 마디 속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고, 정말 옛날에 어려웠던 시절에 병이 들거나. 아니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열반당으로 물러나서 이제 죽음만 기다리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그려볼 수 있습니다. 한데 저는 이런 좋은 시대에 살기 때문에 문명의 이기를 한껏 활용하면서, 이러한 시간에 불편한 몸이지만 여러 신심 있는 많은 법우님들과 함께 하면서, 부처님의 대승의 가르침을 함께 이렇게 의논하고, 다시 생각해보고, 그리고 거기서 신심을 북 돋우고, 또 법희선열을 맛보는 그러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 참으로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가 없고 참으로 좋은 세상이구나! 하는 그런 느낌과 아울러, 이 모든 것이 여러 법우님들과 많은 분들의 도움과 관심, 또 신심, 이러한 것들이 이러한 오늘의 이런 좋은 모습을 볼 수 있게 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 법화경이야기는 “문수보살이 답하다”. 그랬습니다. 어제까지는 부처님의 미간 백호상에서 놓아 보이는 광명을 통해서 나타난 여러 가지 광경을 설명하고, 어찌하여 이러한 광경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문수보살에게 미륵보살이 물었지요.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면서 마지막 대목에 보리도량에서 얻은 미묘한 법을 설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6년 고행을 거친 뒤에 보리도량에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정각을 이루신 그 도리를 이야기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수기를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했습니다. 미묘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요. 존재의 법칙 존재의 원리가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고, 따라서 일심의 도리, 모든 것은 전부 마음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 수기라고 하는 것은 '사람사람이 본래로 부처님이다.'라고 하는, 그런 보증을 하려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문수보살이 그런 질문을 답하는 내용인데 과거의 사례를 들어서 문수보살이 답합니다. (1) 과거의 사례 1 이 때에 문수사리보살이 미륵보살마하살과 여러 보살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선남자들이여, 내 생각으로는 아마 부처님께서 큰 법문을 말씀하시며, 큰 법의 비를 내리시며, 큰 법의 소라를 부시며, 큰 법의 북을 치시며, 큰 법의 뜻을 연설하시리라 여겨집니다. 문수보살이 표현이 아주 참 근사하지요. 아마 부처님께서 큰 법문을 말씀하시고, 또 이런 표현을 합니다. 큰 법의 비를 내리시며, 그 부처님께서 진리의 가르침을 만 중생들에게 들려드리는 그 광경을 비유로서, 아주 깡마른 대지에 정말 큰비가 내려서 그 마른 대지를 축축히 적셔서 모든 생물이 마음껏 활개를 치면서 성장할 수 있게 한 그런 광경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을 우리가 듣고 배우고 하면서,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처로서의 삶의 그런 모습을 한껏 꽃피울 수 있는 그런 모습을,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뒤에 이제 약초유품이라고 하는데 그런 내용이 또 나오기는 합니다마는, “큰 법의 비를 내리시며” 그랬습니다. 참 좋은 표현이지요. 우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진리의 가르침을 법의 비로서 한껏 맞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온갖 지혜와 복덕과 자비와 이러한 것을 모두 한껏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끼치는 그러한 대열에 우리가 섰습니다. 또 부처님이 바라시는 바가 바로 그러한 것이고, 모든 깨달으신 분들이 바라는 바가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표현을 아주 참 아름답게 잘하고 있습니다. 큰 법의 비를 내리시며, 큰 법의 소라를 부시며, 법의 소라! 티벳 불교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데 옛날에는 큰 소라를 가지고 악기 겸해서 어떤 신호의 용도로서 그렇게 불었습니다. 지금은 동으로 만든 아주 긴, 사람의 키의 몇 배의 길이가 되는 긴 소라를 만들어서 불지요. 뚜~~우~~하고 불면 수 십리까지 들리는 그런 법의 소라입니다. 제가 언제 네팔에 갔을 때, 주변에 사찰에서 스님들이 많이 몰려나와 가지고 시내 한 가운데서 이런 저런 구경도 하고, 그 다음에 가벼운 놀이도 하고 관광객들과 대화도 하고, 이런 저런 쉬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어디서인가 뚜~~ 우~~ 하는 그런 법 소라를 부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 절을 향해서 아주 그야말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가듯이 그렇게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뒤를 따라서 들어갔지요. 따라서 들어가니까 티벳 불교의 사찰이 있었는데, 수 백 명이 사는 곳이더라구요. 그래서 거기 들어가서 차 한 잔도 얻어먹고 그리고 또 그 스님들이 외우는 그런 경전 책상 한쪽을 빌어 가지고, 그 책상 한쪽에서 나도 앉아 가지고 같이 저도 가사를 입었으니까, 같이 소리도 모르고 뜻도 모르지만 한 시간쯤 앉아서 흥얼거리면서, 그러면서 그 분들의 경전 읽는 수행에 참여했던 생각도 납니다. 법의 소라를 분다 라고 하는 것이 마치 그러한 것으로도 또한 표현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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