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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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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禪)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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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817회 작성일 12-08-0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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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즉 말할화, 머리두 이것이 한자의 원뜻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번역은 무엇일까요? 話는 대화를 뜻하는 말이고, 頭는 머리가 아닌 끝머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화의 끝머리 또는 대화의 끄트머리라는 말입니다.

예를들어 무언가를 염두(念頭)에 두었다고 하면 그말은 생각의 끝자락에 두었다는 말입니다. 설두(舌頭)는 혀머리 라는 뜻이 아니고 혀끝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서두(序頭)라고 할때는 순서의 머리(첫)라는 뜻입니다. 화두는 대화의 머리 즉 처음이라는 뜻이 아니고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반대의 의미이지요. 그래서 저는 영어로 옮길때 the edge of a dialogue, the end of a dialogue 라고 씁니다.

그러나, 사전에 보면 화는 대화를 의미하고 두는 어조사로서 아무 의미가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뜻을 적은 것으로 정확한 설명이 못됩니다. 화두의 의미와 유래를 간단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한 제자가 큰 스님(스승)에게 묻습니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汝何是祖師西來意
"뜰 앞의 잣나무다." 庭前栢樹子
"..."

여기서, 즉 스승과 제자간의 대화에서 끝은 어디입니까? 바로 '뜰앞의 잣나무'입니다. 제자가 참선공부를 할때 주목해야할 부분이 바로 뜰앞의 잣나무이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은 아닙니다. 대화만으로 보면 질문에 대한 답인 셈입니다. 그러나...

답이 묘합니다. 질문과 전혀 코드가 맞질 않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처음 제자가 물었을때는 답을 기대하고 물었습니다. 바로 이순간 제자는 마음을 놓친 것입니다. 스승은 이것을 간파하고 제자에게 놓친 마음을 더 강하게 흔들어 봅니다. 기대와 완전히 다른 것을 제시해 제자를 흔들어 놓습니다. 그때....

제자가 흔들리지 않으면 제자의 마음은 확고한 경지에 들어선 것이고 (一如) 그 답에 끄달여 망설이면 인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때 제자가 스승의 마음을 간파하면 곧바로 스승에 대한 답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코드가 다른 듯하지만 제자는 스승의 마음을 간파했으므로 스승의 코드를 알아차립니다.

화두란 대화의 끄트머리입니다. 대화의 끄트머리인 뜰앞의 잣나무가 바로 화두입니다. 달마대사는 화두가 아닙니다. 간화선을 할때 화두를 든다고 하는데 이것은 화두를 간파하라는 말입니다. 화두를 간파하는 방법은 대화의 끝에서 더 이상 대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화는 이미 끝났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면서 계속 자문자답하는 대화를 그만두는 것이 간화선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문자답하면서 수수께끼의 정답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이것은 생각의 훈련이지 참선이 아닙니다. 망상을 정리하는 수련일 뿐입니다. 올바른 간화선은 대화를 끝내고 곧바로 화두만 간파하는 일입니다.

간화선은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이요 그 마음이 부처님과 전혀 다름없는 것이라는 것을 체득하는 공부입니다. 따라서 간화선을 할때 스승이 던지 마지막 구절을 붙잡고 그것이 해결될때까지 놓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간화선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해결되는 공부입니다. 그냥 앉아있는 좌선이 아닙니다. 간화선은 말그대로 대화로 해결하는 선입니다. 진정한 대화는 바로 선문답입니다. 그래서 이심전심입니다. 화두를 잘 간파하면 모든 대화가 열립니다. 그래서 통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간혹, 화두보다 염두나 심두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 짚은 것입니다. 생각의 끝이나 마음의 끝을 붙잡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스승이 던진 대화의 끝을 갖고 의심해야 합니다. 바로 대화의 끝자락에서 콱 막혀 옴짝달싹 못할 정도록 의심에 갇혀야 합니다. 이것이 간화선의 시작입니다.

도솔 합장 (뉴욕달마스쿨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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