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는 마음의 귀의처 (歸依處)
페이지 정보
본문
삼보는 불교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대상이다. 모든 불자는 삼보를 마음의 귀의처(歸依處:위험할 경우 안전하게 숨을 곳을 말함)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삼보에 대한 귀의의 표명은 통상 다음과 같은 구절의 외움으로써 이루어진다.
나무불타(南無佛陀)
나무달마(南無達磨)
나무승가(南無僧伽)
그러면 왜 삼보는 귀의할 가치가 있는가. 이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불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양족중(兩足中) 가장 훌륭하기(兩足尊) 때문입니다.
법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탐욕을 떠난 청정함 가운데 가장 훌륭하기(離欲尊) 때문입니다.
승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중에서 가장 훌륭하기(和合尊) 때문입니다."
여기서 양족존이라 함은 두 발로 서 있는, 다시말해 인류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간 불타, 즉 석가모니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또 승을 화합존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교교단이 인간이 운영하는 집단, 공동체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집단이라는 뜻이다. 승은 곧 평등과 화합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또 법을 이욕존(離欲尊)이라 하는 것은 교주의 가르침이 욕망을 떠난 이상상태(이를 열반이라고 한다)로 인도하는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을 매개로 하여 교주와 제자들이 화합하여 이상적인 공동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불교교단의 당초 목표였다.
이와 같이 불교는 귀의의 대상이 본질적으로 어느 특별한 초월적인 절대자가 아니고 인간이 만든 모범적인 대상이었다. 즉 인간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남방불교권에서는 일상적으로 팔리어의 '삼귀의문(三歸依文)'을 세 번 한다. 팔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붓담 사라남 가차미(나는 불타를 귀의처로 합니다.)
담맘 사라남 가차미(나는 진리를 귀의처로 합니다.)
상감 사라남 가차미(나는 승가를 귀의처로 합니다.)
삼귀의는 불교에 입문할 때 수계(受戒)와 함께 한다. 의정(義淨:635∼713)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에 의하면 수계할 때는 먼저 삼귀의를 하도록 되어있다. 즉 '나무불법승(南無佛法僧)'을 세 번 외운 뒤 '귀의불양족중존 귀의불이욕중존 귀의승화합중존'을 세 번 외우는 것이다.
'나무(南無)'란 산스크리트어로 예경·경의를 표명하는 말이다. 원어로는 나마스로 '나무'는 소리대로 옮긴 말이다. 인도 인들이 통상 인사할 때 하는 말 나마스트(당신께 경의를 표합니다.)에서 온 말이다.
다음에는 '귀의불경 귀의법경 귀의승경'을 삼창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경(竟)'이란 '이미 끝났다'는 완료의 뜻으로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가르침에 귀의했습니다. 교단에 귀의했습니다.'라는 말이다.
《화엄경(華嚴經)》정행품에는 다음과 같은 삼귀의례문이 있다.
자귀의불 당원중생 체해대도 발무상의
자歸依佛 當願衆生 體解大道 發無上意.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같이 대도를 체해(體解)하고 무상의(無上意)를 발하게 하옵소서.)
자귀의법 당원중생 심입장경 지혜여해
自歸依法 當願衆生 深入藏經 知慧如海
(스스로 가르침에 귀의했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더불어 깊은 장경(藏經)에 들어가 지혜가 바다와 같게 하옵소서.)
자귀의승 당원중생 통리대중 일체무애
自歸依僧 當願衆生 統理大衆 一切無碍
(스스로 교단에 귀의하겠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더불어 대중을 통리하고 일체 경계에 걸림이 없게 하옵소서.)
여기에는 삼보에 귀의함과 동시에 중생제도를 서원하는 대승 불교의 이타적 입장이 표명되고 있다.
나무불타(南無佛陀)
나무달마(南無達磨)
나무승가(南無僧伽)
그러면 왜 삼보는 귀의할 가치가 있는가. 이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불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양족중(兩足中) 가장 훌륭하기(兩足尊) 때문입니다.
법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탐욕을 떠난 청정함 가운데 가장 훌륭하기(離欲尊) 때문입니다.
승은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중에서 가장 훌륭하기(和合尊) 때문입니다."
여기서 양족존이라 함은 두 발로 서 있는, 다시말해 인류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간 불타, 즉 석가모니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또 승을 화합존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교교단이 인간이 운영하는 집단, 공동체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집단이라는 뜻이다. 승은 곧 평등과 화합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또 법을 이욕존(離欲尊)이라 하는 것은 교주의 가르침이 욕망을 떠난 이상상태(이를 열반이라고 한다)로 인도하는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을 매개로 하여 교주와 제자들이 화합하여 이상적인 공동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불교교단의 당초 목표였다.
이와 같이 불교는 귀의의 대상이 본질적으로 어느 특별한 초월적인 절대자가 아니고 인간이 만든 모범적인 대상이었다. 즉 인간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남방불교권에서는 일상적으로 팔리어의 '삼귀의문(三歸依文)'을 세 번 한다. 팔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붓담 사라남 가차미(나는 불타를 귀의처로 합니다.)
담맘 사라남 가차미(나는 진리를 귀의처로 합니다.)
상감 사라남 가차미(나는 승가를 귀의처로 합니다.)
삼귀의는 불교에 입문할 때 수계(受戒)와 함께 한다. 의정(義淨:635∼713)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에 의하면 수계할 때는 먼저 삼귀의를 하도록 되어있다. 즉 '나무불법승(南無佛法僧)'을 세 번 외운 뒤 '귀의불양족중존 귀의불이욕중존 귀의승화합중존'을 세 번 외우는 것이다.
'나무(南無)'란 산스크리트어로 예경·경의를 표명하는 말이다. 원어로는 나마스로 '나무'는 소리대로 옮긴 말이다. 인도 인들이 통상 인사할 때 하는 말 나마스트(당신께 경의를 표합니다.)에서 온 말이다.
다음에는 '귀의불경 귀의법경 귀의승경'을 삼창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경(竟)'이란 '이미 끝났다'는 완료의 뜻으로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가르침에 귀의했습니다. 교단에 귀의했습니다.'라는 말이다.
《화엄경(華嚴經)》정행품에는 다음과 같은 삼귀의례문이 있다.
자귀의불 당원중생 체해대도 발무상의
자歸依佛 當願衆生 體解大道 發無上意.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같이 대도를 체해(體解)하고 무상의(無上意)를 발하게 하옵소서.)
자귀의법 당원중생 심입장경 지혜여해
自歸依法 當願衆生 深入藏經 知慧如海
(스스로 가르침에 귀의했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더불어 깊은 장경(藏經)에 들어가 지혜가 바다와 같게 하옵소서.)
자귀의승 당원중생 통리대중 일체무애
自歸依僧 當願衆生 統理大衆 一切無碍
(스스로 교단에 귀의하겠습니다.
원하옵나니 중생들과 더불어 대중을 통리하고 일체 경계에 걸림이 없게 하옵소서.)
여기에는 삼보에 귀의함과 동시에 중생제도를 서원하는 대승 불교의 이타적 입장이 표명되고 있다.
- 이전글하심(下心)의 원천 오체투지 (五體投地) 12.08.13
- 다음글반야(般若:Praina) 12.08.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