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 遮 法 (개 차 법 ) > 사찰구조와 불자예절

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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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구조와 불자예절

開 遮 法 (개 차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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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375회 작성일 14-02-20 17:00

본문

계는 신앙의 생명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불교 수행자로서, 불자로서 부처님이 제시하신, 반드시 받아 지니고 지켜나가야 한 계의 정신을 상실해 버린 데 있다. 승속을 불문하고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그것의 보다 손쉬운 취득을 위해 불교를 이용한다. 부처님을 향해 앉아서 부처님께서 버리신 왕궁을 구하고, 출가를 했다고 하면서 버리라고 한 기득권과 기존의 가치를 더 추구하고 있다. 해탈을 구하면서 아집의 독단은 더욱 커져만 가고, 열반을 주장하면서 권위와 현존의 재물에 집착한다. 중생구제를 외치면서 산중에 안주해 있으며, 연기를 말하면서 인과를 믿지 않는다.
어찌 이렇게 하면서 불교 문중의 수행자라고 할 수 있으며, 온 우주의 대 스승이신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가.
부처님이 주신 계는 바로 이러한 세상의 참된 가치를 다 버리고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계를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 계는 우리를 열반으로 이끄는 끈끈하고 단단한 생명의 줄이며 구원의 줄인 것이다. 계는 지키는데 뜻이 있고 지키는 것은 곧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다.



2. 열렸다 닫혔다 하는 법

계는 목숨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 그러나 계를 지킨다는 것은 계의 올바른 정신을 지킨다는 것이지 계의 자구(字句)를 그대로 지키라는 것은 아니다. 이는 세 가지 기술 (상징성, 역사성, 표현의 단정성)에 비추어 그 근본정신을 찾아야 한다. 또한 계는 그 우열이 있으니 절대계에 비추어 나머지 계의 파계는 인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생명의 계인 '불살생계' 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계는 자신의 올바른 삶을 위하여 그러나 자신보다는 타인의 행복을 위하여 실천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림이 살인강도에게 쫓겨서 도망가고 있을 때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옆길로 숨었다고 하자. 곧이어 강도가 쫓아와 당신에게 칼을 들이대며 도망간 곳을 대라고 말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불망어계'를 범할 것인가? '불살생계'를 범할 것인가? 당연히 불망어계를 범하고 불살생계를 지켜야 한다. 그리나 궁극적으로 보면 불망어계를 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강도에게 불살생계를 지키게 하여 주고 결국은 강도를 위하여 생명의 말을 전한 것이 되는 셈이다.
불망어계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을 고통 속에 빠뜨리는 것에 대한 경계를 주는 것이니, 오히려 양심의 말을 한 것이 진정한 불망어계를 지키는 길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계의 근본정신을 잃는 것을 우려하여 개차법(開遮法)을 말씀하셨다.

"계는 지킴으로써 지키며, 파함으로써 지킨다.
계는 파함으로써 파하며, 지킴으로써 파한다."

이른바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법'이다. 어쩌면 불교의 묘미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계는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요즈음은 이 개차법이 너무나 왜곡되어 자기편의 위주로 이용되고 있으며 오히려 어느 정도는 계를 어기는 것이 마치 깨달음을 얻어 도가 트인 양 행세하기도 하는 꼴불견을 낳기도 한다. 이러한 세태는 당연히 그리고 단호히 부정되어야 한다. 자구에 얽매이기에 앞서 계를 목숨으로 지키려 하는 것이 개차법의 올바른 정신이다.


3. 어떤 것이 계를 지키는 행동인가?

예1)
스님 한 분이 시골길을 가다가 모내기하는 농부 내외를 만났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못자리는 아직 저만치 남았고, 두 부부가 해지기 전에 모를 다 심기는 어려웠다. 스님은 가던 길은 멈추고 모내기를 거들었다. 오늘 안에 끝내지 못할까 걱정하던 농부는 무척 고마와 했다. 스님 덕분으로 모내기가 일찍 끝나자 두 부부는 스님께 감사한 마음에 뭔가 대접을 해 드리려 했으나, 스님은 곧 걸망을 메고 길 떠날 자비를 하신다.
농부는 부부가 모두 일하다 보니 준비해 둔 음식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막걸리뿐이었다. 농부는 하도 고마와서 집에 가서 저녁이라도 들고 가시라고 권유한다. 스님은 그렇게 되면 산 길이 어두워 져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가야 한다고 하신다. 농부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있는 것은 이것뿐인데 그럼 술이나 한잔하시지요"하면서 막걸리를 따라서 권유한다. 먹어야 하나? 안 먹어야 하나?

예 2)
어느 나라에서 불교를 극심하게 탄압하였다. 누구든지 불교를 믿으면 5년 이상의 중형을 주고 스님들은 10년 이상이라고까지 했다.
모든 사람이 신앙을 포기하고, 보지 않는 곳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만 부처님을 찾았다. 이때 한 스님이 산 속에서 수행을 하다가 아무 것도 모르고 시내로 나왔다가 관리에게 붙잡혔다.
관리의 우두머리는 자신도 과거에는 불교 신자였는지라 어떻게 하든지 스님을 구해주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스님이 이 명령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산 속에서 수행을 하다가 몰랐기 때문에 '불교 금지령 '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관리의 우두머리는 스님에게 가서 말했다.
-재판장에 나가시면 관리가 '앞으로도 계속 불교를 믿겠느냐?'하고 물을 겁니다. 그러면 '아니오'하고 한마디만 하십시오,
그러면 풀려 나오고 계속 믿겠다고 하시면 스님은 10년 이상의 징역을 사실 겁니다."
모르고 한 일이니 관대하게 선처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몰래 혼자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세상이 바뀌면 아마 불교 금지령도 풀릴 것이니, 일단은 살아 남아서 대책을 강구해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예', '아니오'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예1>에서는 술을 마셔도 좋다. 그 이유는 '불음주계'가 올바른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에 대한 경계이지 술을 마시고 안마시고 와는 관계가 없고, 또한 자신이 중독되어 억지로 달라고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시고 안 마시고는 외부적 강제가 아니며, 그 가부간의 결정이 굴복이나 포기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안 마셔도 그만 마셔도 그만이다.
그러나 농부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고맙기는 이루 말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보답할 것이 없어 미안한데, 그냥 간다면 얼마나 섭섭하겠나?
농부는 아마 스님께 못할 일을 시킨 것 같아서 영 마음에 걸릴지도 모른다. 이때 아무 소리말고 아니 오히려 고마운 얼굴로 술을 한잔 들이킴으로써 농부의 마음을 편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이것은 술이 아니다. 한 그릇의 시원한 냉수이며, 농부의 마음인 것이다. 스님이 마음에 걸리거나, 술을 잘 못한다면, 비록 한 고개 넘어가서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 토할지라도, 농부의 마음을 편이해 주는 것이 스님의 도리가 아닐까?

이때 '계를 파함으로써 지킨다'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예 2) 에서는 '아니오'라고 대답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살아 남는 것은 살아 있으나 사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자유는 종교선택과 믿음의 자유와 더불어 포교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포교할 수 없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부처님의 45년을 보라. 어디 하루도 전교활동을 멈춘 적이 있는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아니오'라는 한 마디를 하고 살아 남아서 큰 일을 할 것 같지만, 이때는 중형을 받는, 아니 차라리 죽는 것이 그 이후의 어떤 활동보다도 인과가 크다. 신앙의 자유란 개인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전파할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개인적 신앙의 자유로써 신앙의 자유가 있는 것이라면 이 세계 어느 곳이나 또 어느 시대이거나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곳이 없을 것이다.
신앙이 외부적 강제에 의하여 굴절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예 ', '아니오'에 대한 대답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때는 더욱 그렇다. 모두가 '지금은 때가 아니니 우선 몸이나 살고 보자' 하는 식으로 진리를 외면하고 숨긴다면 그 진리는 영원히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개인의 이익에 의하여 혹은 외부의 압력에 의하여 거짓말을 하는 말은 사람들로 인하여 현실은 항상 진리가 왜곡되어 모든 대중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단 하루를 살고 죽더라도 계행을 청정히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며, 거짓된 삶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굴절된 것은 살면 살수록 업만 짓는 결과를 낳으므로, 헛된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년 이차돈의 죽음은, 아직도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다.
이때는 '계를 지킴으로써 계를 지키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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