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제 를 지네야 할이유?
페이지 정보
본문
기도와 더불어 또 하나의 대표적인 기복행위가 ‘천도재’이다. 기도가 ‘기독교 따라하기’의 전형이라면, 천도재는 그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어 기복의 대명사와도 같다. 이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천도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승불교권 국가로 분류되는 한국불교는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같이 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비불교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천도재라는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도재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홍사성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효도와 관련된 《부모은중경》이나 앞에서 읽은 《목건련경》 등은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는 대표적인 위경이다. 이 위경이 부처님이 직접 설한 가르침으로 둔갑한 데서 모순이 일어난 것이다. 인도에서 찬술된 수많은 대승경전도 사상의 문제가 아닌 역사적 사실의 문제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홍사성님,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하자, 불교평론 2001-06-01)
홍사성님은 기복의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을 말한다. 천도재 역시 위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 위경 중의 하나로서 ‘목건련경’을 들고 있다.
목건련경에서
그렇다면 목건련경에서 부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목건련경에 천도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복은 열심히 공부해서 신통제일의 목련 존자가 됐다. 목련 존자는 신통으로 어머니가 태어났을 천상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목련이 부처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부처님은 청제 부인이 살아서 인과를 믿지 않고 나쁜 업을 지었으므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했다. 목련이 신통력으로 지옥으로 찾아가니 과연 어머니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다. 목련이 부처님을 다시 찾아 뵙고 어머니를 구할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7월 보름 스님들이 해제하는 날 우란분재를 베풀어라. 그러면 지옥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목련이 우란분재를 베풀어 수행자를 공양했더니 그의 어머니는 지옥에서 벗어나 정토에 태어났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7월 보름 스님들이 해제하는 날 우란분재를 베풀어라. 그러면 지옥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목련이 우란분재를 베풀어 수행자를 공양했더니 그의 어머니는 지옥에서 벗어나 정토에 태어났다.
(홍사성님,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하자, 불교평론 2001-06-01)
홍사성님의 글에 소개된 목건련경의 일부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7월 보름 스님들이 해제하는 날 우란분재를 베풀어라. 그러면 지옥에서 벗어날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현재 한국불교에서 대유행하고 있는 천도재의 근거가 되는 문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근거는 매우 중요하다.
시대적 요청에 따라
시민의 힘으로 당선된 박원순 서울시장이 강연에서 한 말이 있다. 공무원들이 매번 하는 세 가지 타령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산이 없다”는 것이고, 셋째는 “전례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 조건 중에 어느 것 한 가지라도 걸리는 것이 있으면 아무 일도 추진할 수 없는 것이 공무원들의 일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종교에서도 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어느 종교이든지 경전을 근거로 하여 말을 한다. 특히 유일신교의 경우 경전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는데, 어느 경우이든지 바이블의 ‘몇 장 몇 절’을 들먹이는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불교 역시 경전에 근거하여 법문을 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승불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경우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경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고, 인도의 대승불교가 중국으로 전래 되었을 때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었다. 그래서 그 때 당시 중국에서 시대적 요청에 따라 만든 것이 중국의 위경이다. 천도재의 근거가 되는 목건련경, 우란분경, 지장보살본원경, 부모은중경 등이 해당된다.
가미니경에서
목건련경에서 부처님은 “7월 보름 스님들이 해제하는 날 우란분재를 베풀어라. 그러면 지옥에서 벗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2,600년전에 실재 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와 같은 말을 하였을까. 하지만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여겨지는 초기경전에 이와 같은 말은 없다. 그 대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가미니여! 저 남녀들은 게을러 정진하지 않고 그러면서 악한 법을 행하며, 열 가지 선하지 않은 업도[十不善業道], 곧 생물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하며,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나아가 삿된 견해를 성취했다. 그런데 만일 여러 사람이 합장하고 그들을 향해 칭찬하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것을 인연으로 죽어서 좋은 곳에 가서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다.
가미니여! 그것은 마치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깊은 못이 있다. 거기에 어떤 사람이 큰 무거운 돌을 그 물 속에 던져 넣었다. 만일 여러 사람이 와서 저마다 합장하고 그것을 향해 칭찬하고 축원하면서 ‘돌아 제발 떠올라다오.’라고 말하였다. 가미니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무거운 돌이 어찌 여러 사람이 저마다 합장하고 축원했다고 해서 이 인연으로 돌이 물 위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 ……“
“가미니여! 저 남녀들은 정진하여 부지런히 닦고 그러면서 묘한 법을 행하여, 열 가지 선한 업도[十善業道]를 성취하여 살생을 떠나고 살생을 끊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과 사음과 거짓말과 나아가 삿된 견해를 떠나고 삿된 견해를 끊어 바른 견해를 얻었다. 그런데 만일 여러 사람이 저마다 합장하고 그들을 향해 칭찬하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것을 인연으로 죽어서 악한 곳으로 가서 지옥에 태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미니여! 이른바 이 열 가지 선한 업도는 깨끗하여 자연히 위로 올라가 반드시 좋은 곳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가미니여! 그것은 마치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못이 있는데, 거기서 어떤 사람이 타락기름병[酥油甁]을 물에 던져 부수면 병조각은 밑으로 가라앉고 타락기름은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다."
(『中阿含經』3, 『大正藏』1, pp.439c-440c)
(마성스님, 재가자를 위한 붓다의 교설(21) 가미니경(伽彌尼經))
마성스님은 글에서 본 가미니경의 일부내용이다.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가미니의 질문에 대하여 매우 명쾌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에 대한 가르침이다. 만일 그가 선업을 쌓았다면 선처에 태어날 것이고, 불선업을 쌓았다면 악처에 태어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자신이 지은 업에 대하여 다른 누군가가 선처에 나게 하거나 악처에 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돌아 제발 돌아 떠올라다오.”
가미니경에서 하늘의 신을 섬기는 자가 천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거운 돌을 연못에 가라앉혀 놓고 “돌아 제발 돌아 떠올라다오.”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하늘의 신에게 기도하는 행위는 돌덩이에 기도하고, 나무에 기도하여 소원성취하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어떤 대상에 기도하는 행위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연못에 가라앉은 돌덩이가 떠오르게 하려는 것과 같고, 병속에 들은 기름이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초기경에서 분명하게 말함으로서 기도를 ‘부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경전의 부처님의 말씀과 초기불교경전의 부처님의 말씀은 180도 다르다는 것이다.
두 분의 부처님
초기불교의 가미니경과 대승경전의 목건련경을 비교해 보면 불교에는 두 분의 부처님이 계신 것으로 보여진다. 한 분의 부처님은 자업자득을 말하고 있고, 또 한 분의 부처님은 인과를 ‘무시’하고 있다.
가미니경에서 부처님은 철저하게 ‘개인이 지은 업이란 누가 대신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목건련경에서 부처님은 우란분재를 올린 공덕으로 어머니가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말함으로서 인과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내용에 대하여 불자들은 매우 당혹해 한다.
전세계가 글로벌화하고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로 특징지워지고 있는 현시대에 모든 정보는 오픈되고 공유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접하게 된 불자들은 대승불교의 가르침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 반대라면 어느 것을 믿어야 할 지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렇게 믿어라 말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믿어라고 말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관성도 없고 동시에 신뢰성도 없다. 설령 그 가르침이 방편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도 결론이 180도 다르다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반대의 현상을 대승경전 도처에서 보게 된다. 이는 모두 위경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경은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경전이다. 따라서 위경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왜곡되고 변질되었다면 이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내는 꼴’과 같다.
- 이전글이웃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14.07.05
- 다음글성철 큰스님 이야기 14.07.0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