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탁리자성결집(華氏城, 제3차 結集) > 불자신행생활

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사)대한불교원융종
불교교리 불자신행생활

불자신행생활

파탁리자성결집(華氏城, 제3차 結集)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52회 작성일 17-03-12 22:08

본문

파탁리자성결집(華氏城, 3結集)

 불멸 후 218년 외도(外道)들로부터 불교를 보호하기 위해 아소카왕(즉위 17)은 목갈리 풋타티사(Moggaliputtatissa, 목건련자 제수)에 요청하여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Pāṭaliputra, 華氏城)의 계원사에 1,000명의 비구가 모여 9개월간 논의한 끝에 경(), (), () 삼장(三藏)을 정비하고, 교단의 화합을 유도하였다. 이 결집은 화씨성에서 이뤄졌다고 해서 화씨성 결집 혹은 일천 결집이라 부른다. 이때 경전이 최초로 문자화되었으며 사용 문자는 팔리어이다. 경전의 기록에 산스크리트어가 사용된 것은 대승경전이 출현하면서이다. 따라서 초기경전은 팔리어, 대승경전은 산스크리트어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초기경전은 바로 이 경전을 모본(母本)으로 한다. 또한 아소카왕은 불교 전파를 위해 여러 지역에 전도승을 파견하는데 그 가운데 한곳이 스리랑카였다. 스리랑카는 전통 고수성향이 농후한 상좌부불교였고 덕분에 인도 불교가 멸망한 후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될 수 있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 2차 결집은 경전 전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단 내에서 의견대립이 노출된 율장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분에 국한하였으므로 아소카의 제3차 결집이 실질적으로는 제2차 결집이라 할 수 있다.

 인도 공작왕조(孔雀王朝)의 아소카(Aśoka, 阿育王, B.C 268~232 재위)왕은 인도 전역을 하나의 통치권 아래 지배했던 최초의 제왕이다. 그는 강력한 무력 통치권을 기반으로 인도를 하나의 정치적 통합체로 만들었으며 아소카란 슬픔을 모르는 이라는 뜻인데, 정복전쟁 시절의 잔인하고 무자비했던 그의 성품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되풀이하던 아소카왕은 기원전 260년경에 돌연 불교도로 전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불교에 귀의하기 전에 아소카왕은 아지비카 교도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불교에 귀의(歸依)한 뒤, 불살생의 원리를 실천하고 공평무사한 정책을 통해서 만인의 인심을 얻은 아소카왕이 불교를 위해 공헌한 일들은 지대하다.

 그는 수많은 승원과 기념탑을 세웠고, 불교도를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몸소 붓다의 유적을 찾아가서 참배하였다. 여러 왕비들이 낳은 그의 자녀들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는데, 아소카왕은 그들을 스리랑카를 비롯한 외국 곳곳에 전법사로 파견했다. 아소카왕이 삼보(三寶)께 지극한 공양을 드리고 널리 보시를 행하니 외도(外道)들은 의식(衣食)이 자연히 궁핍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외도들이 승복(僧服)을 입고 들어와 더부살이를 하면서 불교를 훼손시키는 경우가 잦았다. 그들의 교묘한 방해로 승단에서는 포살(布薩)행사를 못하는 등 피해가 컸다. 이를 알게 된 아소카왕은 모든 비구를 대상으로 일정한 테스트를 거처 이교도를 가려냈다.

   ☞ 포살 : 동일 지역 내의 비구·비구니가 반달에 한 번, 15·30일 또는 14·29일에 한곳에 모여 250계의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의 한 조목을 3번씩 읽으며, 계율을 범한 자는 다른 승려들에게 고백·참회하는 의식

 아소카왕은 제3차 결집을 마무리한 후 여러 지역에 세운 강목을 통하여 어떤 누구에 의해서도 승가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내지는 승가의 분열을 간곡히 막아보자는 문구를 남겼다.

 아소카왕이 승단에서 이교도들을 추방하였다고 하나 이는 교단이 분열되기 시작하여 그 분열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을까 한다.

 제2차 결집 이후에 율장을 가지고 이견을 보인 비구들은 점차 자기들이 소지한 법장의 내용대로 교리를 세우고, 주장하다 보니 서로 다른 논장이 나왔을 것이다. 아소카왕은 율장에 이어 교리와 논장에서 이견을 보이며 서로 대립하는 각 교단의 분열을 염려하여 이교도 추방이라는 명분하에 승단을 정리하고 논장을 통일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제3차 결집이 추진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후 아소카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법과 율과 논을 중심으로 지역별로, 또는 대 비구를 중심으로 이견을 보여 각 부파가 성립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분열을 불교에서는 부파불교, 아비달마불교라고 한다. 이제까지 아비달마불교 하면 대승불교에서는 다소 깔보는 듯한 태도였으나, 사실 아비달마불교는 대승불교를 탄생시키는 산실 역할을 하였으며, 불교의 교리를 한층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역할을 다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1·2차 결집은 남방불교나 북방불교 모두가 다 전하지만 제3차 결집에 관해서는 북방불교에서는 언급(言及)을 하지 않고 있다. 4차 결집은 2세기경 카니슈카(Kaniska)왕 밑에서 파르슈바(Pārśvā, 脇尊者), 바수미트라(Vasumitra, 世友) 등의 주재 하에 카슈미르(Kaśmira)의 비구 500명이 모여 삼장(三藏)에 대한 해석을 가하였는데, 그것이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남방불교에서는 믿지 않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