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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진정한 절집 스님이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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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780회 작성일 12-07-2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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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 ‘두 개의 절집 풍경’에 혼돈…낯가리기 잔치는 이제 멈춰야 
법인스님/ 201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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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태도는 우아하고 안색은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이며 어떤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6대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산자야의 으뜸가는 제자 사리풋트라는 저잣거리에서 매우 엄정하고 기품이 넘치는 한 수행자를 만난다. 사리풋트라의 눈에 앗사지 비구는 다른 수행자에 비해 확연하게 차이를 풍기는 모습으로, 내면의 성숙과 일상의 풍모가 조화롭고 격조가 높아 보였다.
 
그래서 사리풋트라는 매우 신선한 호감과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대체 누구의 제자이고 그의 스승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을까?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 생기고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 없어진다고, 나의 위대한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앗사지 비구의 이 한 마디에 사리풋트라(사리불)는 사상의 구심점이 무너지는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아 절친한 동료 목갈리나(목련)와 함께 산자야를 결별하고 부처님께 귀의한다. 후에 이 두 사람은 부처님의 10대 제자로 불교 교단 형성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다.

이 두 사람이 부처님께 귀의한 직접적인 동기는, 연기법의 이치를 듣고 사상적 전환을 이룬 것에 있다. 그러나 수행의 내공이 우아한 풍모로 드러난 앗사지 비구에게 주목하지 않았다면 사리풋트라는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을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이 사람을 끌리게 한 것이다. 명실상부! 그래서 ‘속살림’과 ‘겉보매(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새)’의 융합이 어김이 없을 때 우리는 누군가를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때로는 ‘아름다운 풍경’이 속박이 되고 함정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보아왔다. 절집을 소재와 배경으로 하는 몇 개의 아름다운 그림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대중에게 눈속임이 되며, 나아가 우리의 삶을 왜곡하고 포장하고 있는지를. 더 혹독하게 말한다면 ‘그저 아름답게 보여지는 풍경’이 불교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간 세간의 지면과 화면에 보여지는 불교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그것은 끊이지 않는 종단의 내분과 추문, 그리고 수려하고 정갈한 산사와 거기에 깃들어 살아가는 이들의 세속과는 색다른 일상이다. 그래서 대중은 이 두 개의 풍경이 늘 낯설고 혼돈스럽다. 그래도 지치고 힘든 삶을 위로 받기 위해서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을 기댄다.

산중의 새벽 세 시. 청아한 목탁과 염불소리에 삼라만상이 고요히 몸을 털고 일어난다. 이어 심장을 흔드는 법고의 울림, 범종 소리가 천상과 지하에 있는 뭇 생명들을 맑게 깨운다.

가사를 두른 많은 스님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께 예불을 올린다. 조금은 애절한 듯한 장중한 화음이 사뭇 경건하다. 예불이 끝나면 대중방에서는 낭낭한 목소리로 경전을 독송한다. 이어지는 아침공양.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고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공양게송 한 마디에 엄숙함이 서려 있다.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먹는 발우공양에 모두가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도량에서 낙엽을 쓰는 풍경이 펼쳐진다. 투명한 아침 햇살과 더불어 빈 공간을 빗질하는 무심한 몸짓이 한 폭의 그림이다. 낙숫돌에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며 녹차를 마시는 운치도 더없이 환상적이다.  

간혹 밭에서 농사짓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밀짚 모자를 쓰고 채소를 거두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다. 간혹 이에 적절한 한 마디가 곁들여진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청규를 말하면서 수행과 노동이 하나라고 한다. 대중의 눈에는 산중의 스님들이 한가하게 도만 닦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선원에서 참선정진하는 풍경은 또 어떠한가?
 
하안거와 동안거에 산문을 나가지 않고 결가부좌한 채 화두 타파에 전념하는 단단한 저 결기, 장군죽비에 등짝을 맞아가며 졸음과 싸우는 혹독한 정진, 저 극심한 고행의 모습에 사뭇 비장한 감회가 서린다. 그리고 검은 고무신을 신고 겹겹으로 기운 누비옷을 휘저으며 오솔길을 걷는 수행자의 모습에는 그 어떤 군더더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풍경들에서 세간의 사람들은 왜 눈길을 주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토록 템플스테이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풍경을 넘어 무욕과 자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욕탐과 경쟁의 세계에서 그것들을 미련 없이 놓아버리고 스스로 기꺼이 가난을 선택한 삶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단절을 상징하는 스님들의 삭발염의한 겉모습에서 공경심과 함께 알 수 없는 압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참된 자아의 완성을 향하여 팽팽한 긴장의 정신줄을 놓지 않는 수행정신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속적 삶을 성찰하고 조금이나 수행자의 모습을 닮아가고 싶어서 풍경에 몰입하고 산을 찾는다.

그러나 정직하게 묻는다. 진실로 이와 같은가? 
다시 정직하게 묻는다. 진실로 이와 같은가? 
또 다시 정직하게 묻는다. 정말 이와 같은가?

부처님께 예경하고 삼천배를 하면서 우리는 삶터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가? “예배는 자신의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꺾는 일이다” 서산 대사의 <선가귀감>의 한 말씀이다. 자신을 정화하고 이웃 사람을 부처로 알아 겸손하고 경건하게 대하고 있는가? 나는 승속을 막론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배려하는 모습보다는 엄숙하고 딱딱하게 굳은 모습을 많이 본다. 부처님께 드리는 예경의 정신이 이웃에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풍경은 왜곡이고 포장이다. 

산중이나 저자의 절을 가보면 많은 곳이 검박하고 절제하는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기가 힘들다. 음식은 낭비되고 있으며 연료사용은 세간보다 심하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사치에 가까운 과다한 장식물이 자리잡고 있다. 승용차, 부도와 비석, 장례식 등 각종 행사는 어떠한가? 거의 헝겁스러운(혼이 나가도록 질겁하는 태도가 있음) 허례허식이 상류에 있다.  

이미 절집의 일상의 문화가 ‘대한민국 평균으로 살아가기’의 도를 이미 넘어섰다. 이럴진대 밥 한 톨, 고춧가루 하나 남기지 않는다고 그림으로 보여주는 발우공양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검소와 절제와 자족의 삶이라고 공감을 얻겠는가?
 
발우공양정신이 불필요한 소유와 과다한 소유를 내려놓은 청빈의 ‘빈그릇’ 운동이 되지 못한다면, 대중을 희롱하는 ‘눈속임’이 될 것이다. 생명 생태적 삶을 살지 못하면서 전통과 관습으로 행하는 발우공양은 그야말로 그저 아름다운 풍경 한 장면에 머무는, 한 컷의 사진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무서운 일이다.  

때로는 절집에서의 울력은 정말 노동의 정신에 합당한지를 묻고 싶다. 나는 노동을 말하면서 거창하게 막스 베버나 칼 맑스를 거론하고 싶지 않다. 불교의 영역에서, 보살수행의 길에서 노동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내가 보살수행에서 바라 본 노동의 의미는 이렇다. 몸을 움직이는 기쁨을 느낄 것, 몸을 기꺼이 움직이므로 귀족적이고 관념적인 잔재를 털어낼 것,
 
몸의 활발한 작동과 사유가 동시에 진행되어 정신의 깊은 성숙으로 이어질 것, 나아가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과정에서 모든 존재가 참여하는 관계의 법칙과 소중함을 깨달을 것, 때문에 소비적 욕망을 줄이고 상생하는 질서를 배우고 실천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게 밥을 먹여주는 근로노동자들의 고마움에 고개 숙일 것, 그리하여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대중이 실감하는 최소한의 ‘밥값’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늘 비움과 나눔을 실천하지 않고 대중울력이라는 이름으로 간간히 행하는 감자캐기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어설프게 일과 밥값을 말하지 않았으면 하겠다.

다시 말하겠다. ‘세상 사람에게 보여주는, 보여지는, 무난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자가당착 도취하지 말자. 당신들은 감히 하지 못한, 삭발염의한 우리들은 그 용기만으로도 응당 공양 받을 자격이 있노라’는 홧홧거리는 자격운운으로 우리들의 직무유기를 합리화하지 않기로 하자. 낯가리기 잔치(체면치레로 하는 잔치)는 이제 멈출 때가 되었다.

어느 해부턴가 지면과 화면에서 부처님오신날 특집방송의 소재와 배경이 달라지고 있다.  대중에게 의미와 감동을 주는 삶을 꾸준히 실천하는 절과 스님, 불자를 담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생명생태 운동, 북한과 오지에까지 가서 봉사하는 보살의 삶이 공감과 감동을 주고 있다. 

분명히 마음에 새기자. 세상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풍경에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생생한 진실이고 무엇이 보여주기 위한 연출인지를 이제 대중은 금방 알아차린다. 맑은 차 한 잔에 은은하게 미소 지으면 자비로운 수행자이고, 억울하게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분노하면 수행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고 할 것인가?

아름다움은 진실한 눈물과 뜨거운 땀으로 세상에 출현한다. 

ㅡ 법인 스님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
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
과 <불교신문> 주필을 지냈으며, 현재 조계종 교육부장으로 승가 교육 진흥에 힘을 보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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