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의위대한 가르침 윤회 (輪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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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도는 윤회설을 순전한 이론으로 보지 않고 확인할 수 있는 사실로 본다. 윤회에 대한 믿음은 불교의 기본 교리를 이룬다. 윤회설은 여러 나라, 여러 종교 그리고 자유로운 사상가들에게서도 발견된다.
피다고라스(Pythagoras)는 그의 전생을 기억할 수 있었고, 플라톤(Plato)은 수많은 그의 전생을 기억 할 수 있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사람은 단 열번까지만 윤회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동물 세계에 태어 날 가능성이 있음을 믿었다. 고대 이집트와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황제나 왕들처럼 오직 유명한 사람들만 윤회한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다.
오리겐(Origen. 초기 그리스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겸 성서학자) 이라는 유명한 기독교 권위자는 윤회를 믿었는데 그는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고통은 없다고 하였다. 서기 1788년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는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비판 하였다. 그는 다른 천체계에서의 환생 가능성을 믿었다.
역시 철학자인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생명에의 의지가 있는 곳에 반드시 태어남이 있다고 말했다. 살려는 의지는 새로운 형태로 이어 모습을 나타낸다. 고타마 붓다는 이 '존재에의 의지'를 존재를 향한 갈애로 설명 하였다.
우리의 전생을 실제로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생을 회상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의 본질이다. 우리 마음은 다섯 가지 장애로 과중한 부담을 안고 있다. 감각적 욕구, 악의, 게으름, 불안, 그리고 의심. 이러한 장애 때문에 우리의 밝게 보는 눈은 세속적인 것에 묶여 버리고 윤회를 보지 못한다.
거울이 먼지로 덮여 있으면 물체를 반사 못하듯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은 전생을 회상하지 못한다. 낮에 별을 볼 수 없는 것은 하늘에 별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이 너무 밝게 비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우리 마음은 일상사와 세속적인 환경 같은 현실에 너무나 많은 생각으로 언제나 차 있기 때문에 전생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 생애가 너무 짧은 것을 생각하면 윤회에 대한 이해가 더 쉬워진다. 인생, 그리고 궁극적 의미와 목적, 나아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경험을 생각해 본다면 단 한번의 생애로서는 인간 자신이 하고자 한 욕망은 말할 필요도 없고 천성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해 내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겪었던 일들은 엄청나다.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가 알고 있고 또 계발할 수 있는 우리의 숨은 능력은 대단하다. 이에 대하여 조사를 해 보면 오늘날은 특히 그러하다. 우리는 이상에 대한 높은 열망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이룰 시간이 없음을 안다.
한편 감정과 욕구의 커다란 소용돌이, 이기적인 동기와 야망으로 내적 갈등을 겪고 남과 투쟁한다. 이러한 힘은 죽음의 시간으로 서로 몰아간다. 이 기세는 시련을 겪고 정복되어 누그러지고 약화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에 한 생애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 앞에 놓인 이 가능성에 오로지 한 번의 인생 뿐이어서 이 가능성을 계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면 우주와 인생을 엄청나고 매정스러운 우스개 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윤회에 관한 불교의 교리는 영혼의 이전과 재생을 주장하는 타종교의 교리와 구별하여야 한다. 불교는 신이 창조한 영원한 존재나 한 생명으로부터 다른 생명으로 이전하는 불변의 실재를 부인한다.
상대적인 개체는 자아나 영혼 없이도 인과율의 연속으로 생성이 가능하며 죽음은 영혼의 이전 없이도 새로운 출생을 낳는다. 한 생애 동안에도 개별적인 순간순간(心刹那.심찰나)들은 한 순간순간이 일어났다가 다음 순간 생각으로 이어지고는 사라지면서 들어오고 나가고 한다.
엄격히 말하면 이 모든 개별적인 생각의 순간적인 명멸이 출생이오 죽음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 생애 중에도 수많은 순간적 생사를 경험하나 이 과정의 연속이 하나의 육체에 의지하므로 정신과 육체(名色.명색) 의 연속을 한 생명을 구성하는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죽음을 육체의 결정적 기능이 정지된 것으로 생각한다. 육체가 생명을 잃으면 정신작용인 의식의 흐름을 유지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를 존속시키려는 생명에의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의식의 흐름은 육체를 잃어도 정지하지 않는다. 육체가 죽으면 오히려 존재에로의 집착으로 촉발된 정신작용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생긴 새로운 육체에 의지하여 다시 나타난다.
그리하여 출생은 죽음 후에 즉시 나타난다. 기억의 흐름은 아마도 중단되고 주체의식은 새로운 상황으로 옮겨 가지만 겪었던 경험과 기질은 새로운 생명으로 이전되어 윤회의 반복으로 또 다른 인생의 순환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죽음은 영원한 생명이나 완전한 허무에로의 문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새로운 성장, 노쇠와 사망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출생의 입구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에는 육체의 새로운 기능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모터사이클을 타는 사람이 정지하려고 악세레이터를 놓아 엔진에 추진력이 없어진 것과 같다.
불교도는 현생은 불행과 행복사이에 놓인 단 한번의 인생이라 여기지 않으며 또한 죽음이 자기들을 극락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현생은 무한히 이어지는 존재형태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믿으며 이 지상에서의 생활은 수많은 다음 생애의 여러 생활 가운데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믿는다.
모든 존재는 무의식 속에 선업이나 악업이 정신적 에너지 형태로 남아 있는 한 언젠가 어느 곳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불경에서 말하는 잠재의식(안이비설신의(6식), 말라식과 아뢰아식을 추가하면 8식이 있다)과 현대 심리학자가 말하는 잠재의식은 개념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므로 잘못 해석하여
혼돈해서는 안된다.
윤회의 원인은 무엇인가? 고타마 붓다는 무지(無知 또는 무명)가 욕구를 낳는다고 가르쳤다. 만족되지 않은 욕구가 윤회의 원인이다. 만족되지 않은 욕구가 사라지면 윤회는 그친다. 윤회를 정지시키는 것은 모든 욕구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욕구를 소멸시키려면 무지를 없애버려야 한다. 무지를 없애 버리면 이 모든 출생이 가치가 없음을 느끼게 되고 출생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려는 최고의 욕구를 버릴 수 있다.
이 무지는 인간은 단 한번만 태어난다는 착각과 비논리적인 생각, 이 한번의 인생 다음에는 영원한 행복이나 영원한 고통이 뒤따른다는 착각이 들어 있다.
고타마 붓다는 사성제를 이해하면 무지를 소멸시키고 술픔을 없앤다고 하며 다른 방법으로는 윤회를 막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무지를 소멸시키려면 끈기 있게 모든 것을 끌어안는 이타적 행동을 실천하고 총명과 지혜를 열심히 닦아야 한다. 또한 저질적인 개인적 쾌락에 대한 욕구와 이기적인 욕구도 버려야 한다.
어떻게 출생이 일어나는가? 육체가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을 때 에너지는 죽지 않고 다른 생명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형태로 계속된다. 인간의 형태로 나타난 카르마의 힘은 동물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자신의 적극적인 카르마를 배야할 기회를 가지 못한 경우이다. 갈애, 욕구, 의욕 또는 생명에의 집착이라 불리는 이 힘은 윤회라는 다른 존재형태로 계속하여 나타난다.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자력으로 전생의 기억을 살려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의 경험은 신문이나 정기 간행물에 기록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윤회 같은 일은 결코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밝힌 전생에 관한 보고는 조사가 이루어져 확실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최면술을 통하여 전생에 대하여 알 수 있다. 무의식을 깊이 파고 들면 전생을 되살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최면술사는 말하고 있다.
전생의 연속으로서의 새로운 출생과 이것의 반복인 윤회는 특정 종교나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닌 자연적 현상이다. 새로운 출생을 믿건 믿지 않건 이것이 일어나거나 이를 피하는데 아무 차이가 없다. 생명에의 집착과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가 마음속에 있는 한 윤회는 되풀이 된다. 이 강력한 정신적 힘은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만연되어 있다.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거나 기도하는 사람은 갈애와 욕구를 제거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들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속적 생활에서 인생의 불확실성과 불만족을 경험한 현명한 사람들은 이 바른길(팔정도)를 따름으로서 반복되는 생사를 피하려고 한다. 갈애와 집착을 줄이지 못하는 사람은 불만족한 상황, 불확실한 상황을 겪을 환생과 반복되는 생겨남에 직면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청용사 카페에서 발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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