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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큰스승의 천수경해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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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3,255회 작성일 14-12-3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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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불교 경문..천수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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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수경해설2 ▒
경전 펼치기(開經) ---------------------------------------------- 개경-경전 펼치기 오방의 제신을 안위하는 진언 개경게-경전을 펴는 게송 ----------------------------------------------- 1. 개경-경전펼치기 (원문)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3번) (옮김) 말로 지은 업을 깨끗이 하는 진언 1)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 이 부분은 '천수경'뿐만 아니라 모든 경전을 독송할 때 맨 먼저 독송하는 부분으로 송경의식(誦經儀式)에 해당합니다. 경전을 독송한다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만큼 경전을 독송하기 전에 입으로 지은 갖가지 죄업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은 진리를 전달하는 문(門)이 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업을 입으로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남을 속이기도 하고(妄語), 험한 말로 남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하고(惡口), 사람들을 이간질시켜 화합을 깨뜨리기도 하고(兩舌), 뒤에서는 험담을 늘어놓으면서도 당사자 앞에서는 마음에 없는 칭찬을 늘어놓기도(綺語)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면서 입으로 짓는 업을 구업(口業)이라고 합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 망어(妄語) 거짓말. 남을 속이는 말 악구(惡口) 욕지꺼리. 험한 말 양설(兩舌) 두 가지 말.남을 이간질 시키는 말 기어(綺語) 발림말. 겉과 속이 다른 말 2) 입은 화의 근원 업에는 세 가지 종류(三業)가 있습니다. 몸으로 세 가지 업(身三業)을 짓고, 마음으로 세 가지 업(意三業)을 짓고, 그리고 입으로 네 가지 업(口四業)을 짓습니다. 이를 모두 합쳐 '열가지 업(十業)'이라고 합니다. 나쁜 마음으로 짓는 열 가지 업을 '십악업(十惡業)'이라 하고 착한 마음으로 짓는 열 가지 업을 '십선업(十善業)'이라고 합니다. 그 열 가지 업 가운데 작은 입으로 짓는 업이 가장 많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고 해서 입을 화의 근원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만큼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언어가 좌우하는 부분이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경전을 독송하기 전에는 이렇게 입으로 지은 모든 악업을 깨끗이 하는 의식인 '정구업진언'을 먼저 독송하고 나서 비로소 부처님의 말씀을 독경하는 것입니다. 3) Om과 Svaha 진언에 있어서 옴과 스바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옴은 매우 신성한 뜻을 간직한 소리(音)라 해서 인도에서는 모든 종교의식에서 꼭 제창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옴 옴"하고 옴만 외우는 것을 수행으로 삼기도 한다고 합니다. 옴의 뜻은 '귀의(歸依)' 또는 '공양(供養)'을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스바하는 '원만히 성취됨(圓滿, 成就)'이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천수경이나 밀교 경전에 나오는 대부분의 진언은 '옴'으로 시작해서 '스바하'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내가 이제 부처님의 성스러운 말씀을 독송하고 '부처님께 귀의하고 공양하오니 제가 소원하는 바가 모두 원만히 성취되기를 비옵니다' 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진언의 형식입니다. 4) 진언의 의미 진언(眞言, Mantra)이란 말 그대로 '진실된 말'이란 뜻입니다. 어떤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업이라면 참되고 진실된 것을 밀교에서는 '밀(密:Guhya)'이라고 합니다. 입으로 짓는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구업이라면 반대로 선과 악의 행위를 떠난 '진리의 언어'를 진언(眞言)이라고 부릅니다. 진언은 업이 아니라 진실한 언어이므로 구밀(口密)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과 입으로 짓는 삼업(三業)도 그것이 선과 악이라는 인과의 산물이 된다면 삼업이 되지만 그것을 초월한 진실한 행위가 될 때에 그것은 세 가지 비밀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三密)이 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과 입으로 밀을 갖추는 것을 삼밀가지(三密加持)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말을 떠나 있는 것이며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不在文字, 知者不言). 즉 참된 진리는 말이 끊어진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인 진언은 일상적 언어처럼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상식적으로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진언은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구마라습과 현장과 같은 역대의 대 역경승들도 이 진언부분에 이르러서는 붓을 놓았다고 합니다. 진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듯 진언이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면 그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언이 어떤 개념을 내포한 말로 표현되고 상식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언은 비밀한 것이며 그것은 선악이라는 관념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그것은 업의 범주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5) 개념의 틀을 뛰어넘는 진언 사람을 흔히 언어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언어는 인간의 사유를 내포하고 의사를 전달하며 문화적 활동과 지식을 후대로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지식은 언어를 통해 축적되고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언어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특히 선종(禪宗)에서는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의 핵심은 언어로 된 경전밖에 있는 것이며 언어에 근거하지 않았다 (敎外別傳 不立文字)고 해서 언어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노자같은 경우에도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며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言者不知 知者不言)'라며 언어의 해악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진언도 그 자체가 가진 힘을 말의 개념 속으로 이해하려 할 때 이미 진언으로써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진리의 세계를 내포하고 있는 진언은 상식과 제한된 개념을 뛰어넘고 있으며 그것은 작은 개념의 틀로 담을 수 없는 광대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6) 말은 사고를 결정한다. 언어의 엄밀한 논리적 분석을 추구하는 분석철학이나 언어철학에서는 말이 없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이 생각보다 앞선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언어 생활이 그 사람의 건전한 사고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로 지은 업'이 다른 모든 업보다 먼저 있기 때문에 모든 업을 치료하는 처방으로 진언을 외우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훈습(燻習)이란 말이 있습니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카페에 오래 앉아 있으며 옷에 담배 연기가 배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을 훈습이라고 합니다. 반복되는 언어는 마치 담배연기가 옷에 배어들듯 그 사람의 사고에 훈습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말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까지 합니다.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에 나오는 여덟 가지 실천(八正道)에도 올바른 언어생활(正語)을 중요한 수행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말을 참답게 함으로써 인간과 그 마음을 참답게 하는 것이 진언밀교(眞言密敎)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밀교 경전인 '천수경'에서도 '정구업진언'을 맨 먼저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말이 인간의 사고를 형성하고, 그 언어의 행위자를 역으로 결정짓는다는 전제하에 참된 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오방의 모든 신들을 편안케 하는 진언 (원문)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3번) (옮김) 오방의 선신들을 편안케 하는 진언 1) 오방의 신들 오방(五方)이란 동서남북과 그 가운데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방의 모든 신들'이란 절대적 권능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하는 유일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신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화엄경'에 나오는 '화엄성중(華嚴聖衆)'들을 말합니다. 이들 오방의 모든 신들은 원래 바라문교에서 신봉하는 신이었지만 불교가 인도의 대표적 종교로 성장하면서 불교를 외호하는 신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종교학에서는 이를 습합이라고 하는데 불교의 개방적 종교성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칠성이나 산신 등 우리의 토속적인 신앙이 불교에 흡수된 것도 종교적 습합의 좋은 예입니다. 경전에 나타나고 있는 신들은 절대적 권능의 신이 아니라 대부분 불교를 외호하는 수호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진리에 안주하는 신들 불교에서는 불법의 세계로 수용된 이들 신들이 부처님의 진리에 안주케 하기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늘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찰에서는 부처님께 공양과 예불을 올린 뒤에는 화엄성중들이 모셔진 신중(神衆)단을 향해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의 세계에 안주하라는 뜻입니다. '안위(安慰)'는 편안히 안주하라는 뜻입니다. 3. 개경게(開經偈) - 경전을 펴는 게송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義 가장 높고 미묘하며 깊고 깊은 부처님 법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뵙기 어려워라 저는 이제 다행히도 보고 듣고 지니오니 부처님의 진실한 뜻 알기를 원합니다. 1)게송 게송(偈頌)이란 산스크리트어 Gatha를 음역한 것으로 '가요, 성가, 시구' 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2) 가장 높고 미묘한 법 여기서 말하는 '가장 높고 미묘한 법'이란 천수경의 핵심인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자비의 어머니인 관세음보살님의 다라니입니다. 그렇다면 신묘장구대다라니가 가장 높은 진리라는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판단 근거를 듭니다. 첫째: 성언량(聖言量), 불언량(佛言量) 진언은 범인(凡人)이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그 가치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귀의하는 부처님과 옛 성인들이 가장 높은 법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것을 판단의 근거로 삼아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둘째: 만 중생을 위한 자비의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衆生)이란 개념에는 인간 뿐 아니라 모든 동물, 나가서 산천초목과 기와 조각과 벽돌과 같은 무정물(無情物)들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산과 들 그리고 심지어는 기와조각 같은 자연과 무생물도 설법(說法) 한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중생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높다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불교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중생이라는 말이 됩니다. 모든 가치 판단의 근거는 바로 중생이며 중생이 진리의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이름으로 또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속박하는 다른 종교나 가치체계에 비추어 볼 때 불교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교의 열린 사상은 인간 중심의 사고와 그로 인한 무분별한 개발 정책으로 초래된 자연파괴를 막고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 불교임을 말 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는 서양의 물질 중심의 가치 체계와 기독교가 내세우는 인간 중심적 윤리체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basistitle3.gif생활불교 경문..천수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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