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내세관(來世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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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관은 사람은 죽음을 끝으로 완전히 소멸(消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되리라는 신념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삶과 죽음이 단절(斷絶)된 것이 아니라 연속(連續)한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고대종교에서는 선악(善惡)의 관념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현세와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믿었다. 불교의 내세관은 업 사상(業 思想)과 윤회설(輪廻說)에 기초하여 성립한다. 이에 따르면, 현세의 삶은 모두 전생(前生)에서 지은 업보 때문에 생긴 것이고, 현세의 삶은 다음에 태어날 생의 모습을 결정한다. 현세의 업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6가지 윤회의 길(六道),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삶이 되풀이된다. 인간은 현세에서 계속적으로 업을 짓는 한 고통스런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며 오직 해탈(解脫)을 통해서만이 이러한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가. 연기설(緣起說)
연기(緣起)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핵심내용이며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나거나 또는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다른 존재와 여러 원인,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 정신적, 물질적 모든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관계성의 법칙, 상의성의 법칙 혹은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고도 한다.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잡아함경)
아함경(阿含經)에 부처님은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했다.
연기설을 구체화한 12연기설이 있다.
나. 업설(業, karma)
업(業)이란 조작(造作), 인위적 행위, 의지에 의한 심신의 활동 즉 짓는다는 뜻이고 보(報, vipaka)는 이숙(異熟)이라고도 번역되고 있듯이 성숙함을 나타낸다. 모든 유정(有情)들의 경험 등 일체행위는 훈습(薰習)된 습기(習氣)라는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여(이를 업력 또는 업장業障이라고 함), 이것이 원인(原因)이 되어 반드시 결과(結果)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 두 낱말은 불교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파니샤드(Upanisad)철학이나 이 계파에서도 중요한 교리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그 두 술어(述語)를 특히 인간의 의지적 작용과 그에 대한 객체의 필연적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 채택하셨다.
업과 보(報)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 또한 동일성을 띠게 될 것은 물론이다. 즉 업인이 선(善)이면 과보도 선, 악(惡)이면 과보도 악의 성질을 띠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선업에는 즐거운 보(善報)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惡報)가 따른다고 설한다. 어떤 경우에는 더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흑업(黑業)에는 흑보(黑報)가, 백업(白業)에는 백보(白報)가, 흑백업(黑白業)에는 흑백보(黑白報)가 따르고, 불흑불백업(不黑不白業)에는 보(報)가 없다(중아함 권 27 達梵行經). 불흑불백의 업이란 작용된 것이 아니므로 보가 없다고 할 것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적 작용만을 업으로 보고 있으므로 의지가 작용되지 않는 업(不故作業)은 보를 받지 않는 것이다(중아함 권 3 思經).
이와 같이 선업(善業)에는 즐거운 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가 따른다면 우리의 행동방향은 마땅히 악을 여의고 선을 행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괴로움보다는 즐거움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은 자신의 선업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업설(業說)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고 설명(說明)할 수 있다. 달리 인과응보(因果應報), 업보(業報)라고도 한다.
◉ 업설은 사람들에게 선행(善行)을 권장하려는 통속적인 교화방편설(敎化方便說)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이유는 불교의 무아설(無我說)과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무아설은 무명(無明), 망념(妄念)에 실재하는 아(我)가 없다는 것이지 망념 자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생사윤회는 바로 그런 망념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므로 업설과 무아설은 이론적으로 아무런 모순(矛盾)이 되지 않는다.
다. 윤회설(輪廻說)
중생이 연기(緣起)를 모르고 계속 생사윤회를 반복하는 것을 윤회전생(輪廻轉生)이라 한다.
1) 삼선도(三善道) : 천상(天上), 인간(人間), 수라(修羅)를 윤회하는 것을 선취(善趣)라고 한다.
2) 삼악도(三惡道) :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을 윤회하는 것을 악취(惡趣)라고 한다.
3) 사유(四有) : 윤회의 4가지 과정
가) 사유(死有) : 죽는 순간
나) 중유(中有) : 죽어서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기간(10~49일)
다) 생유(生有) : 태어나는 순간
라) 본유(本有) : 생애를 누리는 기간
♥ 열반경(涅槃經)은 부처님이 쿠시나가라 사라수(紗羅樹) 아래에서 열반(涅槃)에 들기 직전, 대중에게 정진(精進)을 당부하신 최후의 법문(法門)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경의 중심사상은 불신상주(佛身常住), 열반상락아정(涅槃常樂我淨)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으로 요약된다. 부처님의 몸이 상주(常住)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법신은 육신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모습에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법신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 열반이 상락아정하다는 것은 종래의 사념처관(四念處觀), 즉 모든 것은 무상하다(諸行無常). 모든 것은 내가 아니다(諸法無我). 모든 것은 괴롭다(一切皆苦). 이 몸은 부정하다(身不淨)는 소극적인 이론을 초월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을 일컫는다. 부처님이 상주불멸하기 때문에 상이요, 상(相)을 인정하니 나(我)도 인정한다는 것이다. 상(相)이면서 나(我)가 소유하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으니 깨끗함(淨)이요 이는 곧 즐거움(樂)이다. 이는 무상한 세계를 단순히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한 세계를 완전히 거치고 나서 상의 세계를 발견하는 데에 그 참뜻이 있다고 하겠다. 일체중생 실유불성은 열반경의 핵심으로서 모든 중생에게는 반드시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성품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를 실증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부단히 수행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경전이 추구하는 부처님의 핵심적인 말씀은 모든 것은 변하니 게으름에 빠지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교훈이다. 이러한 실유불성의 입장에서 극악무도한 일천제(一闡提)도 성불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야기되기도 했으나, 열반경에서는 결국 일천제도 중생인 이상 마땅히 성불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라. 제법개공설(諸法皆空說) : 모든 만법의 본성은 공(空)이라는 것으로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이다. 자성이 없기에 모든 법은 서로 연기하며 생멸하는 것이다. 공은 무(無)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 눈앞의 존재를 여실히 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 유심설(唯心說)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상이다.
♥ 당나라 문명 원년(684년) 수도에 왕씨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살아 생전 착한 일을 하지도 않았고 계율을 지키지도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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