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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파사론의 찬집(撰集, 제4차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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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81회 작성일 17-03-1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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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파사론의 찬집(撰集, 4차결집)

 불멸 후 6백 년경 대월씨국(大月氏國, 굽타왕조) 카니슈카 왕이 부파의 이설(異說)을 통일시키고자 협존자(脇尊者)에게 의뢰해 이루어졌다. 카슈미르(kasimila. 迦濕彌羅) 환림정사(環林精舍)에서 세우(世友)를 상수로 5백 명의 대비구들이 모여 경 10만송, 10만송, () 10만송, 660만언()의 대 주석을 만들어 결집했다. 환림사 결이라 하며 오늘날에는 논장의 주석서인 아비달마비바사만 남아있다. 삼장 주석에 관한 결집이었기에 불설 편찬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6백년이 지나서 인도 서북쪽에 유명한 카니슈카(Kanisika, 加泥色迦 : A. D 125-150)왕은 불교에 대한 신심이 아주 돈독하여 불탑을 세우고 불교의 예술적 승화에 힘썼다. 또 왕은 정사의 한가한 틈을 타서 하루에 한 명씩 승려를 궁중으로 초빙(招聘)해서 설법을 들었다. 그런데 승려들의 의식(儀式)이 모두 같지 않고 설()하는 내용도 서로가 달랐다. 왕은 협존자(脇尊者)의 자문(諮問)에 따라 제4차결집을 발기(發起)하였다. 그 목적은 삼장(三藏)해석으로 먼저 10만 송의 경장(經藏), 다음에 10만 송의 율장(律藏), 그 후에 10만 송의 논장(論藏)을 해석하였다. 도합 30만 송을 결집 완료하여 붉은 동첩(銅牒)에다가 새겨 넣어 탑()안에다 모시고 국외로 전하는 것을 금하였다. 당 현장역(唐玄藏譯) 아비달마비파사론(阿毘達摩毘巴娑論) 10만 송이 그때 결집한 3분의 1이고 그 나머지 20만 송은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때 결집한 경, , , 삼장은 그전 것보다 상세하게 해석하였으며 제1차 내지 제3차 때의 결집을 질서 있게 정리하였다.

 협존자는 유부학자(有部學者)였으며 카니슈카왕도 역시 특별한 유부 신자였다. 이때의 삼장의 해석도 유부사상에 의거하여 해석되었고 그 당시 부파분쟁(部派分爭)과 각기의 이견(異見)도 이때의 결집으로 인하여 해소되었다. 특히 내용이 풍부한 각 부파간의 설집(說集)을 대성(大成)시켜 정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전에 해설한 부처님의 유교(遺敎)를 현저하게 진보시킨 것이다.

 이때부터 불교는 구자국(龜慈國), 월지국(月支國) 등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 성행하였고 그 뒤에 중국, 한국, 일본 순으로 전파되니 이것을 북방불교 즉 대승불교(Mahayana. 大乘佛敎)라 이르고 스리랑카, 미얀마, 말레이시아, 태국, 자바, 보르네오 등 남방(南方)으로 전파된 불교는 소승불교(Hinayana. 小乘佛敎)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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