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파사론의 찬집(撰集, 제4차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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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후 6백 년경 대월씨국(大月氏國, 굽타왕조) 카니슈카 왕이 부파의 이설(異說)을 통일시키고자 협존자(脇尊者)에게 의뢰해 이루어졌다. 카슈미르(kasimila. 迦濕彌羅) 환림정사(環林精舍)에서 세우(世友)를 상수로 5백 명의 대비구들이 모여 경 10만송, 율 10만송, 논(論) 10만송, 660만언(言)의 대 주석을 만들어 결집했다. 환림사 결집이라 하며 오늘날에는 논장의 주석서인 아비달마비바사만 남아있다. 삼장 주석에 관한 결집이었기에 불설 편찬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6백년이 지나서 인도 서북쪽에 유명한 카니슈카(Kanisika, 加泥色迦 : A. D 125-150년)왕은 불교에 대한 신심이 아주 돈독하여 불탑을 세우고 불교의 예술적 승화에 힘썼다. 또 왕은 정사의 한가한 틈을 타서 하루에 한 명씩 승려를 궁중으로 초빙(招聘)해서 설법을 들었다. 그런데 승려들의 의식(儀式)이 모두 같지 않고 설(說)하는 내용도 서로가 달랐다. 왕은 협존자(脇尊者)의 자문(諮問)에 따라 제4차결집을 발기(發起)하였다. 그 목적은 삼장(三藏)해석으로 먼저 10만 송의 경장(經藏), 다음에 10만 송의 율장(律藏), 그 후에 10만 송의 논장(論藏)을 해석하였다. 도합 30만 송을 결집 완료하여 붉은 동첩(銅牒)에다가 새겨 넣어 탑(塔)안에다 모시고 국외로 전하는 것을 금하였다. 당 현장역(唐玄藏譯) 아비달마비파사론(阿毘達摩毘巴娑論) 10만 송이 그때 결집한 3분의 1이고 그 나머지 20만 송은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때 결집한 경, 율, 논, 삼장은 그전 것보다 상세하게 해석하였으며 제1차 내지 제3차 때의 결집을 질서 있게 정리하였다.
협존자는 유부학자(有部學者)였으며 카니슈카왕도 역시 특별한 유부 신자였다. 이때의 삼장의 해석도 유부사상에 의거하여 해석되었고 그 당시 부파분쟁(部派分爭)과 각기의 이견(異見)도 이때의 결집으로 인하여 해소되었다. 특히 내용이 풍부한 각 부파간의 설집(說集)을 대성(大成)시켜 정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전에 해설한 부처님의 유교(遺敎)를 현저하게 진보시킨 것이다.
이때부터 불교는 구자국(龜慈國), 월지국(月支國) 등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 성행하였고 그 뒤에 중국, 한국, 일본 순으로 전파되니 이것을 북방불교 즉 대승불교(Mahayana. 大乘佛敎)라 이르고 스리랑카, 미얀마, 말레이시아, 태국, 자바, 보르네오 등 남방(南方)으로 전파된 불교는 소승불교(Hinayana. 小乘佛敎)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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