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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58회 작성일 17-03-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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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나한(五百羅漢)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 500명의 아라한을 말하며 오백비구(五百比丘오백상수(五百上首)라고도 한다. 아라한과를 성취한 이들은 더 이상 나고 죽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흐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므로 불생과(不生果)의 최고의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한다. 석가여래 열반에 드신 후 미륵불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오실 때까지 이 세상의 불법을 수호하도록 수기(授記) 받은 분들을 가리키며 응공(應供) 또는 응진(應眞)으로 번역된다. 아라한과는 더 이상 생사윤회의 흐름에 태어나지 않으므로 최고의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며 매우 덕이 높은 성자로 추앙받는다. 오백나한에 대하여는 여러 경전에 기록이 있는데 법화경의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서는 부처님께서 500명의 나한을 위하여 특별히 수기(授記)를 베푸는 인연이 상세히 설해진다. 여기서 부처님이 오백 명의 아라한들에게 오랜 겁이 지난 뒤 보명(普明)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신다. 보명불이 성불한 후 다시 다음에 보명(普明)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처가 출현할 것이라고 수기를 주게 되는데 이렇게 오백 명의 보명불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 제자들의 이름은 우루빈나가섭, 나제가섭, 가야가섭, 가유타이, 아누룻다, 리바타, 겁빈나, 박구라, 사가타 등의 오백 명이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이나 십송률(十誦律)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중인도 코살라국의 사위성(舍衛城)에서 500명의 나한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고 하며, 흥기행경(興起行經)에는 매월 15500나한을 위한 계()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마하승기율이라는 문헌(文獻)에 오백아라한의 일화가 전해져 온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 사위국이라는 나라와 그 옆에 비사리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두 나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해마다 서로 침략하였다. 어느 날 비사리국의 사람 500명이 떼를 지어 사위국으로 침략하여 마을을 약탈하였다. 이때 사위국의 왕은 도적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장군을 불러 군사를 주어 이 도적들을 속히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 군사들은 재빨리 도적들을 추격하였다. 오백 명의 도적들은 비사리국의 영토로 돌아가서 무기들을 풀어놓고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 사위국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모두 생포되어 사위국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사위국왕은 이들을 묶어서 처형하기 위해 넓은 곳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때 오백도적들은 죽음의 공포로 울부짖었다. 이 소문이 부처님에게까지 알려졌는데 부처님이 시자인 아난존자를 시켜서 왕에게 말했다. 그대가 백성들을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해야 하는데 어찌 한꺼번에 오백 명씩이나 죽이려 하는가?

 왕이 대답하기를 존자여!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죽여도 죄의 과보가 매우 많거늘 하물며 오백 사람이겠습니까? 다만 도적들이 자주 우리나라를 약탈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능히 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도적질하지 않게 하신다면 이들을 석방하여 살려주겠습니다.

 아난존자가 돌아와서 부처님께 왕의 말을 전하였다.

 부처님이 다시 아난존자를 시켜서 왕에게 말했다. 왕은 그 사람들을 석방하여 보내라. 내가 능히 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도적질하지 않게 하리라. 아난존자는 먼저 사형장으로 가서 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 말했다. 이 죄인들을 부처님께서 구제하기로 하셨으니 죽이지 말라고 하고 도적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능히 출가(出家)하겠는가?

 도적들이 대답하였다. 존자여! 저희들이 진작 출가하였더라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아난은 다시 왕에게 가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능히 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도적질하지 않게 하리라하셨으니 왕께서는 명령을 내려 그들을 살려주시고 그들을 묶은 채로 부처님께 보내시면 부처님께서 스스로 놓아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적들은 묶인 채로 부처님께 보내졌는데, 부처님께서 그들을 제도하고자 넓은 곳에 앉아계시었다. 도적들이 멀리서 부처님을 뵈오니 묶이었던 밧줄이 저절로 풀리기에 머리 숙여 부처님께 절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부처님이 물으셨다. 그대들은 참으로 출가하기를 원하는가?

 도적들이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진작 출가하였더라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원하오니 저희들을 제도하여 출가하게 하소서. 그들은 모두 비구가 되었고 부처님께서 그들의 전생을 살펴보시고 보시와 계율과 사성제에 대하여 설법하시니 그들은 수다원과를 얻었다

 ❸ 오분율(五分律)에는 부처님이 열반한 후 마가다국(摩伽陀國) 왕사성(王舍城)의 칠엽굴(七葉窟)에서 500명의 나한이 결집하여 불전(佛典)을 편찬하였는데 이 제1결집을 오백결집이라 부른다.

 불교 교단에는 단 한명의 절대적인 지도자가 없으며 서로 존중하고 화합하여 이끌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인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직후, 수행(修行)이 아직 너무 부족한 사람들이 다소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때 마하가섭존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흐트러지지 않고 바르게 전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오백 명의 아라한을 모아서 모임을 가진다. 여기서 오백 명의 아라한이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일일이 확인하고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은 부처님의 시중을 가장 오래 들었던 아난이었으므로 그도 참석하기 위해 찾아갔었는데 문제는 그가 아라한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마하가섭존자는 아라한이 아닌 사람을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고 아난존자는 스스로 매우 부끄럽게 여겨 밤을 새워 용맹정진(勇猛精進)한 끝에 아라한이 되었다. 다시 찾아간 그는 허락을 얻어 참석할 수 있었다. 바위굴 속에서 3개월간 모임이 계속되었는데 아난존자는 경을 암송하고 우바리존자는 계율을 암송하였으며 오백 명의 아라한들이 이에 동의하면 인정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그 나라의 왕이 음식을 계속 공급하여 모임을 지원하였다. 이후로는 오랫동안 이 가르침들을 암송하여 전해오다가 몇 백 년 뒤부터 문자로 기록하여 전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모임을 일차 결집이라고 부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결집(結集)에서 특히 아난다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하면서 부처님 설법을 기억해 낼 때면 부처님 생존 시 부처님을 따르던 나이 많은 장로 비구(長老 比丘)들은 그만 그 자리에 엎드려 모두 울어 버렸다 한다.

 석가모니 열반 후 600년이 지난 뒤, 인도 서북경의 가습미라(迦濕彌羅)에서 카니시카 왕의 주도 아래 협존자(脇尊者)와 세우(世友)존자를 중심으로 열린 제4결집, 즉 비바사론결집(毘婆沙論結集)에서는 500명의 비구(比丘)가 참가하였는데 이들도 오백나한으로 받들어진다.

 당나라 사람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에는 옛날 한 바라문이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500상인의 동자를 가르쳤는데 그 500동자가 지금의 500나한이 되었다고 하고 또는 그때의 500상인이 지금의 500나한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오백나한이란 석가 생존 시의 500명의 제자나 석가의 열반 후 결집한 500명의 나한(羅漢)이나 비구(比丘) 등을 칭하는 데 두루 사용됨을 알 수 있으며 이들 오백나한은 중국과 한국, 일본 등에서 특별히 존경의 신앙 대상으로 숭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백나한을 모신 전각이 따로 있어 나한전(羅漢殿)이라 부른다.

 오백나한과 관련된 문헌은 사분율(四分律)에 상세히 나온다. 중국 푸젠성(福建省) 서풍암(瑞豊巖)에는 오백나한원(五百羅漢院)이 있고, 저장성(浙江省) 서암사(西巖寺)에는 철조(鐵造)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일본 도쿄(東京)의 라칸사(羅漢寺)와 교토(京都)의 다이도쿠사(大德寺) 및 도호쿠사(東福寺) 등지에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대부분의 사찰에서 나한전(羅漢殿) 또는 응진전(應眞殿)이라는 전각에 조상(彫像)을 만들어 나한을 모시고 있다. 영주 성혈사는 나한전이 유명하고 영천 거조암(居組庵)의 석조 오백나한상도 유명하다.

  ♥ 정각(正覺)을 성취한 부처님이 녹야원이라는 곳에서 전에 함께 수행한 적이 있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맨 처음 설법을 했다는 것은 소위 초전법륜이라 하여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후 다섯 사람은 부처님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원시적인 교단의 형태를 이루게 되는데, 이들은 차례차례 모두가 정각을 얻게 됨으로써 부처님을 포함한 여섯 사람의 아라한이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승을 보면, 애초에 아라한(阿羅漢)은 부처님과 같은 사람을 가리켰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아라한은 부처님의 칭호로서, 여래의 열 가지 이름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나한이라 약칭되기도 하는 아라한이라는 말의 의미는 존경할 가치가 있는 사람, 공양을 받기에 어울리는 사람, 존경할만한 수행자, 수행을 완성한 사람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아라한은 신자들로부터 의식주 등의 공양(供養)을 받음으로써 그 자체가 신자들에게 보다 많은 공덕을 부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응공(應供)이라 번역되는 아라한은 복전(福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부파불교에 이르러서는 아라한이 부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지 않고 불제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계위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나중에 아라한은 소승의 수행을 완성한 사람을 가리키게 되어, 부처와는 구별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아라한은 소위 사향 사과라는 8단계로 된 수행의 계위 중에서 최고의 계위가 된 것이다.

 아라한과라 불리는 이 계위에 도달하면, 번뇌가 모두 사라지고 다시는 미혹(迷惑)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게 된다. 따라서 이제 아라한은 더 이상 배우거나 닦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이런 의미에서 무학이라고 불린다. 한편 이 무학의 아라한을 보다 현학적으로 연구하여, 6종 또는 7종의 아라한이 있다고 분류하기도 한다.

 6종의 아라한이란, 아라한이라는 계위를 얻더라도 후퇴해 버리고 마는 자, 후퇴를 염려하여 스스로를 해침으로써 무여열반, 즉 육신을 멸해서 얻는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려 생각하는 자, 후퇴하지 않으려고 방호하는 자, 후퇴도 증진도 하지 않은 자, 증진하여 속히 다음 단계에 이르려고 하는 자. 일단 아라한과를 얻으면 어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후퇴함이 없는 뛰어난 자이다. 여기서 앞의 다섯은 성격이 느리고 둔한 아라한이라 하며, 이들이 얻는 해탈에도, 때를 기다려 명상에 들어가 얻는 해탈과 아라한의 깨달음을 애호하여 얻는 해탈의 2종이 있다 한다.

 맨 뒤의 아라한은 성격이 예리한 자로서 때를 기다리지 않고서 해탈한다. 이 마지막의 아라한에는 감각기관을 단련하는 수행력에 의해 다섯째로부터 여섯째에 나아가는 아라한과, 그러한 수행력에 의하지 않고 본래의 탁월한 소양에 의해 여섯째에 이르는 2종을 구분함으로써 총 7종의 아라한이 있게 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阿羅漢)을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규정하는 것을 무가치(無價値)하다고 본다. 사실 이러한 아라한에 대해서는, 아직 부처님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수행자로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를 가리키는 이외의 특별한 의의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대승(大乘)의 시각인 것으로 보인다.

 대승(大乘)에서는 성문(聲聞), 연각(緣覺, 또는 독각), 보살(菩薩)의 삼승이라는 구별을 강조하고, 보살승의 우위를 설했다. 특히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이 삼승은 모두가 부처라는 일승으로 유인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간주한다. 이것이 소위 일승사상(一乘思想)이다. 아라한 역시 부처의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임시의 한 단계가 되므로 아라한 그 자체가 배척(排斥)되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나한을 소승의 성자라 하여 참선(參禪)하는 고승대덕들은 대단치 않게 여기는 경향이 다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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