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 큰스님 반야심경강의 55 終 > 불자신행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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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큰스님 반야심경강의 55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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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504회 작성일 14-12-27 13:30

본문

5장. 결론
 

2. 진실되어 헛되지 않다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3번)
揭諦 揭諦 婆羅揭諦 婆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옮김>
 
고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노니 곧 주를 설해 말하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풀이>
텅 비어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반야의 도리를 주문으로 말하리라.
건너 갔네, 건너 갔네. 저 언덕에 건너 갔네. 저 언덕에 모두 다 건너 갔네. 깨달음을 성취했네.
성취했네, 성취했네. 모든 소망 성취했네. 만 중생들의 모든 소망 다 성취했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우리 모두 행복하여라. 이 세상 우리 모두 다 함께 행복하여라.



<해설>
여 기서 설해진 주문은 <반야심경>의 결론입니다. 그것은 곧 팔만대장경이 결론이며, 불교 전체의 결론입니다. <반야심경> 전체의 내용을 이 한 구절의 주문으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부터 주문은 번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는 음역한 것으로서, 범어로는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바하입니다.

가테, 즉 "아제"는 '가다'의 뜻인데, 호격으로 '가는 이여' 혹은 청유형으로 '가자, 가세'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파라가테, 즉 "바라아제"는 '피안으로 가다'는 뜻입니다. "바라아제"는 '저 언덕으로 가는 이여' 혹은 '저 높은 곳으로 가자'라고 의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도일체고액" 혹은 "능제일체고"한 상태입니다.

"승"은 '집단 모두' 혹은 '총(總)'의 뜻이 있습니다. "모지"는 '보리', 즉 '각(覺)'이란 뜻입니다. "사바하"는 '원만, 성취, 구경'등의 뜻이 있는데, 앞의 내용이 원만히 이루어지도록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래서 주문의 뜻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면, '가는 이여, 가는 이여, 저 언덕으로 가는 이여, 저 언덕으로 온전히 가는 이여, 깨달음이여, 영원하여라'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가세, 가세, 저 언덕에 가세, 우리 함께 저 언덕에 가세, 깨달음이여, 행복이 있어지이다'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주문으로 <반야심경>의 마지막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이 주문 속의 '가는 이여'라는 말 속에는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가고 있습니다. 한 살은 두 살을 향해. 학생은 학교를 향해, 어른은 돈과 명예를 향해 끊임없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가는 방향이 전부 다릅니다. 불행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고, 행복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행복을 위해 간다고 하는 것이 불행을 향해 갈 수도 있고, 올라간다고 하는 것이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매 순간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불교는 마음을 닦는 공부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닦기 위해서는 자신이 과연 어느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지 항상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어릴 때는 청년을 향해, 청년은 중년을 향해, 중년은 노년을 향해 쉼 없이 가는 인생이지만, 그냥 가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육신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마음은 지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누구나 피안을 향해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향해 가야 합니다. 지혜의 완성은 우리에게 행복과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옆길을 돌아보지 말고 온전히 피안을 향해서 앞으로 가야 합니다. 외형상으로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기의 본래 모습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영원히 살리려면 지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신라시대에 양지(良志)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지은 향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그 내용은 <반야심경>의 주문과 일맥상통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가다'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오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맨 첫 구절에서 세번 '오다'라고 한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통해 우리는 무한히 왔고, 오고 있고, 또 올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음 구절의 '오다 서럽더라'는 와서 보니 우리의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서럽더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서럽더라 우리네여'라는 부분에서는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고해 속에 젖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괴로움의 바다를 피해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해로 인해 서러운 인생이지만 '공덕 닦으러 오다'는 구절에서 삶의 목적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피안을 향해 가는 것처럼 공덕을 닦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 구절에서는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주문과 양지 스님의 노래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결국 생활 속에서 지혜를 완성할 때, 그것이 진정 살아있는 반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상으로 <반야심경>의 강설을 모두 마칩니다. <반야심경>의 공 도리를 체득함으로써 그 오묘한 이치가 생활 속의 지혜로 완성되길 기원하며, 맨 마지막의 주문인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끝없는 질문을 화두로 남깁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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