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윤리관 > 불자란 무엇인가?

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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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란 무엇인가?

불교의 윤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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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융종
댓글 0건 조회 866회 작성일 24-05-3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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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부처님같이

1. 불교의 윤리관
 

1) 불교 윤리의 근간  


윤리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나 규범을 말한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구분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여, 궁극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윤리의 목적이다.


불교의 윤리사상은 업설, 계율사상에 잘 나타나 있다업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으로, 불교 윤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많은 분야에서 생산성이 높아져 물질이 풍성해지고, 생활이 편리해졌다. 그러나 자연환경 파괴, 물질만능주의, 도덕과 규범의 상실, 가치관의 충돌 등 그 역기능 또한 적지 않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윤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불교는 세속을 떠난 종교이기 때문에 인간의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적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펴고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 업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불교에서 업은 인간의 의지작용과 행위를 말하며, 거기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고 설하고 있다. 선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른다는 것이 경전의 말씀이다.

 

또한 선과 악의 판단 기준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시되지만, 그 판단에는 사회 윤리적 책임이 함께 따른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1) 삼세업보설  


세상에는 나쁜 일을 저지르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한 일만 하는데도 불우하게 사는 이가 있는 등 인과의 법칙 어긋나는 듯한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유신론자들은 신의 뜻이라고 하고, 운명론자들은 그 원인을 운명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만일 신의 뜻이나 운명 때문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설 자리를 잃고, 인간의 존재성마저 의미를 잃고 만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현상은 삼세업보설로 설명할 수 있다. 삼세란 전생과 현생, 내생을 뜻한다. 그래서 전생의 업에 대한 과보를 현생에서 받는 경우와, 현생의 업에 짓는다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되, 현세에 받을 수도 있고 내세에 받을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윤회설이 등장한다. 윤회설은 인간 윤리의 대상을 현세에서 무한한 시간으로까지 펼쳐 놓는다. 즉 금생만 살고 말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순간적인 환락, 자포자기 등을 억제하고, 좋은 과보를 받기 위해 선을 행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생겨난다. 여기에서 미래 지향적인 불교의 인생관, 가치관 사회 윤리관을 엿볼 수 있다.
 

(2) 십악업과 십선업


인간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불행을 불러올 악업을 일삼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악업을 열 가지 설명하고 있다.


으로 세가지 억업 때문에 괴로운 보를 받는다. 살생과 도덕질과 사음이 그것이다.

으로 짓는 네가지 악업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다. 거짓말이간질하는 말욕설아첨하는 말이다.

으로 짓는 세가지 악업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다. 곧 욕심성냄어리석음이다.


이상의 열 가지 악업에 반대되는 것이 십선업이다. 즉 살생하지 않는 것. 훔치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거짓말 하지 않는 것. 두말하지 않는 것. 악한 말을 하지 않는 것. 간사한 말을 하지 않는 것.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바른 견해 그것이다.


이 열 가지 업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인간의 사회생활과 무관한 것은 없다.


작은 구멍 하나 때문에 거대한 댐이 무너지듯이, 사회라는 큰 틀도 개인의 변화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특히 문명의 이기와 개인주의가 범람하는 이 세대에 개인의 가치관과 삶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의 변화는 시대정신을 이끄는 출발점이자 완성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불자 개개인 들이 지켜야 할 생활규범의 원칙으로 제시하신 것이 바로 이 열 가지다. 이열 가지 원칙들은 몸과 입과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몸과 관련된 것이 세 가지, 입과 관련된 것은 네 가지 , 생각과 관련되 것이 세 가지다.
 

첫째, 과 관련된 규칙으로는, 산 목숨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는 것, 남의 것을 훔치지 말고 남에게 베풀 것, 다른 사람과 삿된 관계를 갖지 말고 정숙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셨다. 이 세 가지를 지키지 않을 경우 자신에게도 해로울 뿐 아니라 다른 이를 고통에 빠뜨리는 원인이 된다.

 

둘째, 과 관련된 규칙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경우가 있다. 언어 생활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남에게 정직한 말을 해야 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이나 숨길 것 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스스로 당당한 사람이 되어 거짓말에 쏟는 노력을 긍정적인 분야로 돌려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안온한 상태에서서로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을 속이는 것은 나를 속이는 일이다. 이런 행동이 계속되면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남을 속이게 된다. 인간의 자의식은 언제나 잠재하고 있으므로 속이다 보면 나중에는 누가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닌지 남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깊어지면 좋지 않은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바른 말로 신뢰를 쌓아야 하며, 이상한 말로 남을 현혹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봐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마음 상태가 지속될 경우, 믿음보다는 불신이 깊어져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 이간질은 비윤리적임을 알아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으로 이끄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셋째, 생각과 관련된 규칙들이다. 우리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계율, 선정, 지혜의 삼학을 닦아 나아가는 것뿐이다. 잘못된 행동의 뒷면에는 탐욕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탐욕을 버리는 정신 수양이 필요하다. 부처님께서는 늘 무욕의 경지를 설하셨다. 재가불자들은 탐욕을 억제하고 지족하는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

 

한편, 남을 배려하지 않고 화를 낼 경우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돌이킬 수 없는 분열과 대립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자신의 조급한 마음과 남을 배려하지 않고 화내는 마음을 다루는 일이 중요하며, 그것은 수행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성냄이 없는 경지를 무진에라고 한다. 


2) 일곱 부처님의 공통 계율 - 칠불통계(七佛通戒) 


이러한 불교의 바탕에는 지헤와 자비가 있다. 지헤와 자비로 이러한 잘못된 행동의 원인을 없애고 진리의 입장에 서서 바로 보는 것(正見)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서로 위해주러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선을 추구하는 정도(正道)인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거칠불(過去七佛)]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제악막작(諸惡莫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중선봉행(衆善奉行) 모든 선을 힘써 행하여

자정기의(自凈其意)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시제불교(是諸佛敎)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칠불통계란 일곱 부처님(석가모니 부처님과 그전 여섯 분의 부처님)의 공통 계율이란 뜻으로 이 가르침에 따라 청정하고 맑은 마음으로 모든 더러운 생각을 떨쳐버린 사람은 절대 평화와 대자유의 경지인 해탈과 열반에 도달할 것이다.


중국 당나라때 나무 가지 위에 앉아서 선에 든다 하여 '새둥지'라는 뜻의 조과(鳥菓)로 잘 알려진 지도림(支道林)선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 백거이(白居易)가 선사를 찾아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조과 선사는 '칠불통계'의 가르침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백거이가 웃으며

"그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오" 하자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선사가 백거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 모르나 여든 된 노인도 그것을 실천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다 생각만으로는 쉽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진리도 그대로 실천해 옮기기는 어렵다. 불자들은 이를 위해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 한다.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야 한다.

 
2. 깨달음을 향한 실천 덕목 - 육바라밀 수행 


올바른 불자의 삶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실천하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하는 사람을 대승불교에서는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보살은 부처가 되고자 원을 세운 사람이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을 이롭게 하는 수행을 해야한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보살 수행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이다.


지혜로운 이가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남을 위한 일이 결국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자리이타행을 실천해야 하고 그 수행이 육바라밀(六波羅密) 수행 즉 여섯가지 실천 행동의 완성이다. 바라밀을 파라미타(Paramita)의 음역으로 '완성' 또는 '피안에 이르다'라는 뜻이다. 

 

1)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


인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을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것을 좋아하나니

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 더 높은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게 한다. <법구경><세속품>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람들은 남에게 많이 베풀면 그 공덕으로 자신에게 좋은 과보가 들어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수행자 등을 만나면 복을 짓는 일이라고 믿고 기쁜 마음으로 베풀었다. 그 까닭에 도움을 받는 사람을 복전 또는 복밭이라고 했다.


보시는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주저없이 베푸는 것이다. 보시에는 재물을 베푸는 재시(財施),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법시(法施)가 있다.


자기 것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이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시는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다. 그래서 보시는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과 그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를 없애주는 길이기도 하다.


탐욕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첫째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요, 둘째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라 하였다.


보시를 행할 때에는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보시할 때 어떠한 보답을 원해서는 안되며, 자신이 남에게 보시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준다는 생각조차 없이 주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강조한 것이다. 


2)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 즉 올바른 생활 규범을 갖는 것이다오계, 십선계, 보살계 등 부처님과 한 약속을 일상생활 속에서 어기지 않는 것으로 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다.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은 일절 보지 말라.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그대 자신의 잘못을 반드시 되돌아보라. <숫타니파타>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직전 전생의 과보로 등창이 생겨 고생하셨다는 내용이 <전생담>에 실려 있다. 이것은 부처님조차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알게 모르게 하는 행동이 결국 다시 본인에게로 되돌아온다. 과보를 받지 않으려면 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살면서 업을 전혀 짓지 않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좋은 일을 행하는 계를 지킴으로써 선업을 쌓고 악업을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늘의 행동이 내일의 모습을 결정한다. 부처님은 모든 행동이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하셨다. 한방울의 물이 모여 큰 항아리를 채우는 것처럼 우리가 '별거 아니겠지'하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저지른 악행이 결국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계를 스승으로 삼아 열심히 정진하라'고 당부하셨다.


3) 인욕바라밀(持戒波羅密)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행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는 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한다. 참기 어련운 것에는 탐냄과 성냄, 또는 본능 등이 있다. 수행자가 화를 낸다면 이는 수행이 덜된 징조이다.


불교는 흔히 수행의 종교라고 한다 .수행은 모든 것을 참아가며 참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참는다는 것은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하며, 이를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켜보아야 한다.성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물이나 조건 또는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


내게 분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하거나, 혹은 그가 잘못된 판단으로 그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고 저절로 참을성이 생겨나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억지로 참는것이 아니어야 한다. 억지로 참으면 당장에는 좋을지 몰라도 내마음속에는 화가 쌓여 병이 나고 언제가는 그 화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참을 일마저 없는 것이다. 분별이 끊어진 수행자는 남을 용서하고 참을 일마저 없기 때문에 인욕한다는 생각조차 없다.


4)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

 

정진바라밀은 끊임없는 노력, 정법을 믿어 수행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완성을 위하여 번뇌를 끊고 끊임없이 노력하되, 시작이 없는 과거에서부터 끝이 없는 미래에까지 영원히 계속해 나가는 것을 정진바라밀이라 한다.


과거의 버릇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는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에도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실천하며 살려고 해도 탐욕에 길든 버릇을 하루 아침에 털어버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몸과 말과 마음의 수행이 어느 정도 되는가 싶다가도 금방 그것을 허물어버리는 삼독심이 솟아나곤 한다. 그러므로 더 굳건한 마음으로 수행하면서 습관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투철하게 깨달음을 이루어 다시는 어제의 생활로 돌아기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용감하게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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