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와 위파사나 (묘원스승님) 14 > 불자란 무엇인가?

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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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 불자란 무엇인가?

불자란 무엇인가?

12연기와 위파사나 (묘원스승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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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868회 작성일 17-03-02 13:58

본문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연기가 중간에서 끊어지는 것과
연기가 알아차림에 의해서 시작부터 끊어지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을 때, 연기는 그 순간 중간에서 끊어지며
갈애가 일어날 자리에 지혜가 일어나면, 무명이 지혜로 바뀌어서
연기가 시작부터 끊어집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있으면 연기가 중간에서 끊어지며
그리고 다시 시작부터 끊어지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오늘은 연기가 끝에서 끊어지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교재 제 81쪽
제 6장 끝에서부터 보는 연기의 회전에 대해서 공부하시겠습니다.

여러분! 일어나는 것은 사라집니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일어난 뒤에 반드시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힘으로 다시 일어나는 힘이 생깁니다.
새로운 일어남이 있어서 다시 또 새로운 사라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 반드시 사라지지만,
사라지는 힘이 없으면 다시 일어남이 생기지 않습니다.
새로운 일어남이 없으므로 다시 사라짐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세속에서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고,
사라짐만 있고 일어남이 없는 것은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사라짐에 갈애가 없으면 새로운 일어남이 생기지 않습니다.

범부는 모르기 때문에 나고 죽는 것을 즐겨 반복하지만,
성자는 알기 때문에 나고 죽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무지는 모르기 때문에 계속하고 지혜는 알아서 끊습니다.

우리는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정신과 물질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요소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정신이 물질을 떠날 수 없고, 물질이 정신을 떠날 수 없습니다.

죽을 때 마음이 소멸하고 그 과보의 마음이 찰나간에
다음 재생연결식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탄생을 합니다.

이와 같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새로 일어난 마음은
다시 죽을 때까지 항상 물질과 함께 있습니다.

정신은 물질에 영향을 주고 물질은 정신에 영향을 줍니다.
생존한다는 것은 이 두 가지의 상호 작용에 의한 것입니다.
마음은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물질이 없으면 할 수가 없고
물질은 마음의 의도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정신은 저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앉은뱅이라고 말합니다.
물질은 저 스스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장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처럼 앉은뱅이와 장님이 동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우리의 삶은 연속적인 괴로움뿐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 어떤 마음으로 죽는가에 따라서 다음 생이 결정됩니다.
죽는 마음으로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입니다.
사악도, 색계, 무색계에서의 죽음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죽음은 갈애가 소멸되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위대한 죽음은 지혜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위대한 죽음은 기능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죽음은 반드시 수행을 해서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며
다음으로 위대한 죽음은 반드시 수행을 해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위대한 죽음은 지식을 쌓아서 기능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을 때 이것이 결정됩니다.
연기가 끝에서 다시 회전하는 것은 죽을 때
바라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 고통은 단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라고 알 때 그 고통은 소멸합니다.
그런데 이 고통이 소멸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알아차림에 의한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이 있어도 내가 고통이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단지 그 고통은 있는 것일 뿐이지 나를 괴롭히는 원인이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죽을 때 몸이 갑갑하고 숨이 벅찬 고통을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그 고통이 소멸됩니다.

그런데 이 고통을 알아차려서 소멸하게 될 때에 그냥 고통만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 소멸 될 때 고통을 알아차려서 고통과 함께 소멸되는 것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갈애가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빠알리어로는 싸마씨시 싸마씨사라고 합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고통은 알아차림에 의해서 소멸될 때
고통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갈애까지 소멸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해탈입니다. 이것이 아라한이나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해야 된다는 사실은, 있는 고통을 단지 고통으로 알아차리면
그것은 마음이 아프지 않아서, 단지 있을 수밖에 없는 원인과 결과의 고통이라고 알 때
우리는 갈애가 일어나질 않습니다.

고통이 일어나서 소멸하면 반드시 갈애가 소멸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수행을 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아라한이 되어서 열반을 성취합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불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받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론 열반은 특별한 정신적 상태입니다.
열반은 이르기는 해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열반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성자는 있어도 성자를 얻은 자는 없습니다.
부처는 있어도 부처가 된 자는 없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정신적 상태이지 그것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이렇듯 열반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불탄 것을 말합니다.
바로 모든 번뇌가 불타서 끊어진 것이 지고의 행복입니다.
이것은 연기가 끝에서부터 회전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열반은 원한다고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차린 결과로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해서 집착이 끊어져서 자연스럽게 오는 것입니다.
열반의 상태에 이르기는 해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열반에서 벗어나서 비로소 우리는 열반에 들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을 가지고 매번 의식이 정지된 상태의 열반이 있고,
윤회가 끝나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반열반, 빠리닙빠나가 있습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한 사람은 지속적으로 열반을 경험합니다.
이 때 열반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열반이라고 해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윤회가 끝나는 열반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열반은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이 있습니다.
몸을 가지고 경험하는 열반과 몸이 다시 재생되지 않는 그런 열반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으로 얻은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지혜로 얻은 열반의 기쁨만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벗어난 정신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있어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수다원의 정신적 도과는 있어도 수다원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성자의 정신적 상태는 있어도 깨달음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없기 때문입니다.

열반은 지혜의 상태에 따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열반이 있고 아라한의 열반이 있습니다.
이 때 아라한이 되어야 비로소 빠리닙빠나라고 하는 반열반에 이릅니다.

여러분들! 우리들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입니다.
이 열반은 모든 번뇌의 괴로움을 불태우고 지고의 행복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살아서 가지고 있는 물질적 재산은 재산이 아닙니다.
살면서 가지고 있는 정신적 상태가 진정한 재산입니다.

여러분! 살면서 얻은 모든 부귀영화는 영원한 것이 아니지만
살면서 얻은 수행의 지혜는 계속해서 상속됩니다.

물질과 정신이 모두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생멸하지만,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지혜만이 진정한 재산입니다.

죽을 때 가지고 가는 재산은 살면서 행한 계율과 선행이며
계율과 선행으로 청정하다면 그 과보로 인해서
다시 태어나서 한 대로 받는 좋은 생을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죽습니다.
그리고 연기가 회전하지 않는 죽음과 연기가 회전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나를 죽이는가요?
바로 자신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여
비참한 죽음으로 내몹니다.

누가 나를 죽입니까? 자신의 무명이 나를 죽입니다.
어리석음이 행위를 일으켜 끝없이 태어나게 합니다.

누가 나를 죽입니까? 자신의 몸과 마음이 나를 죽입니다.
세월은 근본 원인이 아니고 단지 따르는 것입니다.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에서 죽으려는 것은 탐심입니다.
죽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옵니다.

누구나 죽지만 자신의 죽음만은 외면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사실 어리석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행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명으로부터 벗어나서 지혜를 얻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지혜를 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혜는 알아차린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지는 모르는 것이고 지혜는 아는 것입니다.
무지는 불선의 행위이고 지혜는 선한 행위입니다.
무지는 끊을 수가 없고 집착을 하게 하지만
지혜는 끊어버리기 때문에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애써 지혜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마음이 일을 할 때 욕망으로 하느냐
알아차림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지혜가 나서 좋아하게 되면 퇴보합니다.
지혜가 나서 지나치면 간교해 집니다.
그래서 이 지혜도 알아차려야 됩니다.

지혜도 알아차릴 대상이기 때문에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지혜가 다시 번뇌로 바뀝니다.
그래서 언제나 알아차림만 있어야 합니다.

재산, 지위,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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