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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란 무엇인가?

12연기와 위파사나 (묘원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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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418회 작성일 14-07-2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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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상좌 불교 한국명상원 묘원입니다.

오늘은 어제 12연기에 대한 첫 번째 법문에 이어서 두 번째 시간으로
우 티틸라 사야도의 서문에 관해서 여러분과 함께 공부해보겠습니다.

모곡사야도의 법문집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기록되어있는
우 티틸라 사야도의 서문을 여러분들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어제는 생명의 시원에 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무한한 과거 속에서 시원이 있고,
그 시원은 바로 창조주라고 하는 견해입니다.

두 번째는 생명은 시원이 없으며,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는 이러한 내용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생명의 시원은 창조주라는 견해를 어제 말씀드렸고,
오늘은 그것과 다른 또 다른 견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두 번째 또 다른 견해라는 것은,
즉 생명에는 시원이 없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적 관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현상으로 나타난 존재의 근원은 알 수가 없고,
존재의 시작은 무지에 의해서 막히고, 갈애에 의해 덮여져있어서
발견할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 뜻은 우리는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인해서
가장 위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체 즉 우주는 원인과 결과라는 자연의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원인은 결국 결과가 되며,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서
태어남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음은 다시 태어남으로 이어집니다.

태어남과 죽음은 한 생명의 과정의 두 가지 단계입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 즉 불교의 윤회라고 알려진 태어남과 죽음의 고리 속에서
시발점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윤회(輪廻)라고 말하는 뜻은 빨리어로 삼사라(Saṁsāra)라고 합니다.
이 삼사라는 순환, 상속, 흐름이라고 하는데,
우리들의 삶은 이처럼 영원히 방황하는 재생(再生)의 순환을 의미합니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윤회하는 정신이 환생이 아니고 재생이라는 사실입니다.
태어나서 죽으면, 이미 그 마음은 끝나고, 죽을 때의 마음이 과보가 있어서 다음 생에 전해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재생연결식, 재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다음 생에 몸만 바꾼다는 환생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삶과 죽음의 이러한 과정은 연기 안에서만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연기는 윤회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고,
삶과 죽음의 과정과 원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연기는 생명의 절대적인 근원을 밝히려 한다거나,
세계의 진화에 대한 이론이 결코 아닙니다.

연기는 각 과정을 연결하는 열두 가지의 결합 요소 및
상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단지 밝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지만,
오직 인간의 번뇌를 해결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사상은 한 인간의 정신과 물질에 국한 되지,
우주의 시원이나 언제부터 인류가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들은 실제 불교의 관심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한 인간의 번뇌를 해결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부터 인류가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나의 번뇌를 해결하는 것과 는 무관합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관점은
오직 한 인간의 머리에 붙은 불과 가슴에 박힌 화살을 빼는 데에 모든 것이 맞추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가 하는 시원에 문제는
사실 불교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12연기 중 처음인 무명(無明)과 행(行)은 과거의 존재를 의미하며,
무지의 탓으로 형성된 과거의 업(業)을 말합니다.

식(識)에서 수(受)까지의 연결고리는 과거의 존재
혹은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갈애(渴愛)에서 업의 생성까지의 연결고리는
현재 매 순간 진행 중인 의도를 가진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는 우리의 성격이나 환경 등 처한 현재 위치가 과거에 행해진 업의 결과라고 할지라도
미래는 지금 하고 있는 행위, 즉 현재의 환경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업력(業力)의 질을 바꾸거나 수정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두 가지 연결고리인 생(生)과 노사(老死)는
현재의 행위에 따른 미래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연속적인 흐름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겠습니다.

조금 내용이 어렵더라도 우 티틸라 사야도의 서문에 관한 내용이니까, 그냥 아시는 대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꼭 지금 이 순간에 이 말의 뜻을 모두 아실 수는 없습니다.
차츰 여러분과 함께 공부를 하다보면 이 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나시게 될 것입니다.
우선은 그냥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이제 연기(緣起)는 다음 세 가지의 큰 물음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첫 번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과거의 전생으로부터 왔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의 전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과거의 과보로부터 현재에 왔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는 결코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한다면
단지 과거로부터 왔다라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행했던 행위로부터, 끝내지 못한 생의 노고로부터, 과거의 악과 덕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무지와 어둠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왔을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의 악과 덕을 가진 채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어디서 왔습니까?
과거의 전생으로부터 왔는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왔습니다.
그 과거의 원인의 연속으로부터 현재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일어난 온갖 행위의 결과로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주목해야합니다.

12연기 공부를 하면 두 번째 우리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여기에 존재합니까?
우리는 과거로 인해 이곳에 존재합니다.
과거는 현재를 낳고, 현재로부터 미래가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쁨과 슬픔에 의해 이곳으로 불려져왔습니다.
자신의 욕망에 의해 이곳으로 이끌려와 마지막 이기적인 욕망이 다 소멸할 때까지
현재라는 이곳에 남아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는, 이 생의 삶이 과거에 자신이 쌓아놓은 짐을 제거하고,
잘못된 행위, 그릇된 관점, 삶과 죽음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며,
이들 모두를 떠나 중도(中道)의 길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여러분들! 인간으로 태어난 사명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사명은 수행을 해서 윤회를 끝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회를 끊을 수 있는 길은 중도로서만이 가능합니다.
중도는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8정도의 길을 말합니다.
이 8정도를 또 다른 말로는 위빠사나 수행이라고도 말합니다.

자, 12연기 공부를 하면 우리는 세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 의문은 우리는 과연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들!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요?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현재의 원인으로 인해 생긴 과보로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서 현재의 결과가 생겼으며
새롭게 현재의 원인으로 미래의 결과가 있을 뿐입니다.
내가 미래로 가지 않습니다.
단지 현재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그래서 인간의 태어남을 재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원인에 따른 결과를 향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삶의 수고를 다하지 않은 이는 생의 수레바퀴를 끝없이 돌뿐이며,
완전한 소멸을 할 때까지 고달픈 삶을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중도의 길을 따라가 삶의 수고를 다 마친 이는
모든 고통의 완전한 종말인 열반(涅槃)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윤회를 하는 미래를 향해서 가든가,
아니면 윤회가 끝나는 해탈을 향해서 가든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향해서 갑니다.

여러분들! 이제 우리가 어디를 향해서 가야 되겠습니까?
괴로움뿐인 끝없는 윤회의 길을 향해서 가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괴로움을 끝내는 열반의 길을 향해서 가야 되겠습니까?

괴로움뿐인 윤회하는 세계의 길은 고통뿐입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끝나는 열반은 지고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삶에 대한 거대한 환상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때 환상이라는 것은 내가 있고, 또 나를 내가 소유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의 한가운데에서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도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신 길이고 우리가 가야 될 길입니다.
삶을 숙고하되 세속의 삶 속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바른 법입니다.
세속의 삶 속에서 보다 높은 영적인 삶으로 나아가라는 것이 부처님의 충고입니다.
실제로 변하지 않는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불자로서 삶의 완성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12연기를 공부해야 되는 그 이유를 위대하신 스승인
우 티틸라 사야도의 가르침으로 다시 한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하는 두 번째 시간을 마치고
다음 시간부터는 모곡사야도 12연기 본문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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