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불교와 대승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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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불교를 부파불교 혹은 아비달마 불교라고 합니다.
승(乘)은 싣고 운반한다는 뜻으로 소승이란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기에는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수레라는 뜻으로 대승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소승은 아라한과 벽지불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시고 난 후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미혹함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깨달음의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어 보이신 많은 내용의 교설들은 부처님 당시에는 문자나 글로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말씀을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 후대에 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글(문자)로 적어 놓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을 통하여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하가섭은 500인의 아라한을 마가다국의 왕사성에 소집하여 부처님의 교법과 계율을 수집하여 편성하였는데 이것을 제1 결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결집된 경과 율은 화합된 교단에 의해 잘 지켜지고 있었으나 약 100년쯤 지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용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비구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급격한 사회의 변화는 종래의 엄격한 계율에 의해 생활하는 수행자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고, 불교의 사상 또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불교교단 내에서도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립이 심화되었으며, 보수적인 장로(長老, thera)들은 제 2결집을 행하여 진보적인 사상을 배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불교교단은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승부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그 뒤 대중부에서는 다시 8파로 나누어 지고, 상좌부에서도 11파로 나뉘어져 B.C 1세기 경에는 20부파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부파불교(部派佛敎, 불멸 후100여년~B.C 1세기 경)라고 말하고 그 이전을 원시불교 시대라고 합니다.아비달마 교학은 부파불교 시대에 있어서 각 부파는 불교의 법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arma) 교학이라고 하는 것이며, 법(法, dharma)에 대한(abhi-) 연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부처님이 살아 계신 당시에도 부분적으로 행하여 지고 있었지만, 각 부파의 성립으로 이러한 연구는 더욱 특색 있게 되었습니다. 각 부파는 자신들의 연구한 결과를 결집하여 간직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아비달마 문헌 또는 논(論)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모든 부파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아비달마 문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경전은 예전부터 있었던 경(經)과 율(律)에 논(論)이 하나 더 보태어져 삼장(三藏)이 성립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삼장의 완성은 부파불교 시대에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합니다.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많았던 부파 불교의 삼장은 거의 사라지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남방(南方) 상좌부(上座部)의 것만 전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상좌부의 삼장은 팔리어로 기록되어 이것을 파리삼장(巴利三藏)이라고 하고, 설일체유부의 삼장은 현재 범어로 된원래의 경전은 없고 한역(漢譯)으로 된 것만 남아 있습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란~!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을 담은 것이 근본교설 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말씀을 풀이 하는데 있어서 다른 의견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결집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결집에서는 경과 율이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이 결집에서 중요한 것은 아직 부처님의 교설이 문자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함(阿含)의 교설이라고 합니다.
불교교단은 부처님의 열반에 드신 후 100년간은 다 함께 화합하여 아무런 동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0년쯤(B.C 4세기) 되어서는 계율과 교리에 대하여 다른 견해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의 분열입니다.
이것을 근본 이부(根本二部)의 분열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분열이 일어나자 다시 새로운 분열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B.C 1세기 경에는 총 20부파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부파불교의 시대라고 부르고, 그 이전의 시대를 원시불교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부파불교 시대의 각 부파는 아함(부처님의 근본 교설)의 교법에 대하여 전문적인 연구를 행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사람들의 근기(根器: 사람들 각자가 가진 성품에 따라 법을 받아 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이해할 때도 개인에 따라 그 차이가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를 살펴 보아 그에게 알맞은 설법을 하였기 때문에 그 근기가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많은 단편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을 체계화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을 말해 주는 것이 아비달마 교학이었습니다. 부파불교의 이러한 아비달마 교학은 부처님의 근본 교설(아함)을 체계화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교설을 아함에 한정시키고 어려운 해석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고 무의미한 불교로 만들어 갔습니다, 부파불교에서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무위열반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러한 열반을 얻는 아라한(阿羅漢)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인간상과 수행상은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는 출가한 승려들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출가한 승려들로부터의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재가 신도들은 부처님의 유골을 모신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모여 부처님에 대한 동경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가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여 교단을 지켜 온 것과는 반대로, 불탑을 지켜온 재가 신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보다도 과거에 생존해 있던 부처님에 대한 동경이 바로 신앙의 원천이 되었을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경이나 찬양이 부처님을 점차 초인화 하고 신격화 하면서 새로운 종교 운동이 일어 났는데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인 것입니다.부파불교가 어려운 수행과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뜻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 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대승불교운동이라고 하는데, 재가신도의 적극적인 참여와 진보적인 출가인들이 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열반을 추구하는 아라한의 길을 ꡐ소승불교(小乘佛敎)ꡑ라고 비판하고,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자신만을 위하여 수행을 하는 것은 자리(自利)이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을 이타(利他)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남도 함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자리이타를 완전하고 원만하게 수행한 사람을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적인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불(成佛)에 있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불교의 진정한 뜻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일어난 대승불교는 일반 재가 신도들을 포함하는 사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도 바로 대승불교인 것입니다.그리하여 부처님의 이러한 사상을 담은 교설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대승경전으로서 B.C 1세기 경부터 이러한 문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초기 대승경전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들은 반야경, 법화경, 십지경, 무량수경, 유마경 등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집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 졌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는데 대승경전의 결집에 대한 문헌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승(乘)은 싣고 운반한다는 뜻으로 소승이란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기에는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수레라는 뜻으로 대승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소승은 아라한과 벽지불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시고 난 후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미혹함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깨달음의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어 보이신 많은 내용의 교설들은 부처님 당시에는 문자나 글로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말씀을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 후대에 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글(문자)로 적어 놓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을 통하여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하가섭은 500인의 아라한을 마가다국의 왕사성에 소집하여 부처님의 교법과 계율을 수집하여 편성하였는데 이것을 제1 결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결집된 경과 율은 화합된 교단에 의해 잘 지켜지고 있었으나 약 100년쯤 지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용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비구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급격한 사회의 변화는 종래의 엄격한 계율에 의해 생활하는 수행자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고, 불교의 사상 또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불교교단 내에서도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립이 심화되었으며, 보수적인 장로(長老, thera)들은 제 2결집을 행하여 진보적인 사상을 배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불교교단은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승부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그 뒤 대중부에서는 다시 8파로 나누어 지고, 상좌부에서도 11파로 나뉘어져 B.C 1세기 경에는 20부파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부파불교(部派佛敎, 불멸 후100여년~B.C 1세기 경)라고 말하고 그 이전을 원시불교 시대라고 합니다.아비달마 교학은 부파불교 시대에 있어서 각 부파는 불교의 법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arma) 교학이라고 하는 것이며, 법(法, dharma)에 대한(abhi-) 연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부처님이 살아 계신 당시에도 부분적으로 행하여 지고 있었지만, 각 부파의 성립으로 이러한 연구는 더욱 특색 있게 되었습니다. 각 부파는 자신들의 연구한 결과를 결집하여 간직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아비달마 문헌 또는 논(論)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모든 부파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아비달마 문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경전은 예전부터 있었던 경(經)과 율(律)에 논(論)이 하나 더 보태어져 삼장(三藏)이 성립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삼장의 완성은 부파불교 시대에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합니다.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많았던 부파 불교의 삼장은 거의 사라지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남방(南方) 상좌부(上座部)의 것만 전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상좌부의 삼장은 팔리어로 기록되어 이것을 파리삼장(巴利三藏)이라고 하고, 설일체유부의 삼장은 현재 범어로 된원래의 경전은 없고 한역(漢譯)으로 된 것만 남아 있습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란~!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을 담은 것이 근본교설 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말씀을 풀이 하는데 있어서 다른 의견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결집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결집에서는 경과 율이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이 결집에서 중요한 것은 아직 부처님의 교설이 문자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함(阿含)의 교설이라고 합니다.
불교교단은 부처님의 열반에 드신 후 100년간은 다 함께 화합하여 아무런 동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0년쯤(B.C 4세기) 되어서는 계율과 교리에 대하여 다른 견해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의 분열입니다.
이것을 근본 이부(根本二部)의 분열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분열이 일어나자 다시 새로운 분열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B.C 1세기 경에는 총 20부파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부파불교의 시대라고 부르고, 그 이전의 시대를 원시불교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부파불교 시대의 각 부파는 아함(부처님의 근본 교설)의 교법에 대하여 전문적인 연구를 행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사람들의 근기(根器: 사람들 각자가 가진 성품에 따라 법을 받아 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이해할 때도 개인에 따라 그 차이가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를 살펴 보아 그에게 알맞은 설법을 하였기 때문에 그 근기가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많은 단편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을 체계화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을 말해 주는 것이 아비달마 교학이었습니다. 부파불교의 이러한 아비달마 교학은 부처님의 근본 교설(아함)을 체계화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교설을 아함에 한정시키고 어려운 해석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고 무의미한 불교로 만들어 갔습니다, 부파불교에서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무위열반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러한 열반을 얻는 아라한(阿羅漢)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인간상과 수행상은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는 출가한 승려들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출가한 승려들로부터의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재가 신도들은 부처님의 유골을 모신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모여 부처님에 대한 동경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가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여 교단을 지켜 온 것과는 반대로, 불탑을 지켜온 재가 신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보다도 과거에 생존해 있던 부처님에 대한 동경이 바로 신앙의 원천이 되었을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경이나 찬양이 부처님을 점차 초인화 하고 신격화 하면서 새로운 종교 운동이 일어 났는데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인 것입니다.부파불교가 어려운 수행과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뜻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 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대승불교운동이라고 하는데, 재가신도의 적극적인 참여와 진보적인 출가인들이 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열반을 추구하는 아라한의 길을 ꡐ소승불교(小乘佛敎)ꡑ라고 비판하고,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자신만을 위하여 수행을 하는 것은 자리(自利)이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을 이타(利他)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남도 함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자리이타를 완전하고 원만하게 수행한 사람을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적인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불(成佛)에 있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불교의 진정한 뜻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일어난 대승불교는 일반 재가 신도들을 포함하는 사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도 바로 대승불교인 것입니다.그리하여 부처님의 이러한 사상을 담은 교설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대승경전으로서 B.C 1세기 경부터 이러한 문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초기 대승경전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들은 반야경, 법화경, 십지경, 무량수경, 유마경 등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집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 졌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는데 대승경전의 결집에 대한 문헌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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