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와 禪 (3) > 불자란 무엇인가?

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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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란 무엇인가?

중도와 禪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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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803회 작성일 17-06-1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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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떤 게 자유자재한 삶인가?
 
부처님께서는 첫 설법 뒤에도 당신의 깨달음을 팔정도, 사성제, 삼법인, 연기, 무아, 공, 불성 등등 다양하게 말씀하여 팔만대장경이 성립되었지만, 이것이 모두 중도를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는 중도를 ‘양변에 집착을 떠나고 가운데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양변(兩邊)이란 ‘고-락’, ‘선-악’, ‘나-너’ 등 대립하는 두 변견(邊見)을 말한다. 이것은 현실세계에서 ‘좌-우’, ‘빈-부’, ‘갑-을’, ‘남-북’ 등 대립하는 어떤 것도 해당한다.
 
서양 철학의 ‘신-인간’, ‘물질-정신’ 등의 이원론, 이분법적인 세계관도 양변이다. 이 양변에 생각이 머물러 집착하고 있으면 지혜가 나올 수 없다. 집착을 놓아야 지혜가 나온다. 아울러 양변에 집착하지 말라 하니 그 가운데를 중도로 착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가운데도 아니다. 그럼 어디를 말하는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평상심이고, 바로 선(禪)…
 
우리는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늘 나와 남을 비교하고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분별심으로 살아가니 단 하루도 편 한 날이 없다. 나보다 잘나고 많이 가지고 배운 사람을 만나면 위축되고 나보다 덜 배우고 가진 것이 부족한 사람을 마주하면 우월의식이 나온다. 이렇게 행복과 불행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양변에 집착하는 중생의 마음이다.
 
부처님은 이 양변에 집착을 떠나고 가운데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를 깨치라 한다. 예컨대 내 마음이 대립하는 양변의 어느 편이 옳다고 생각해서 집착하면 반대편은 그르다고 보게 된다. 이렇게 해서는 공존, 평화가 오지 않는다. 내 견해와 다른 사람과 늘 시비 갈등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내 마음 안에도 양변에 집착하는 마음이 오락가락해서 늘 초조하고 불안해서 행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견해를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으면, 상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나와 상대의 마음을 다 이해하는 지혜가 나와서 평화와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도가 영원한 자유와 행복의 길이라 하신다.
초기불교에 ‘사마타 - 위빠사나’가 있다. ‘지관(止觀)’이 바로 사마타-위빠사나다. 지(止)는 사마타, 관(觀)은 위빠사나에 해당한다. 지관은 우리 마음의 선정 삼매를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고, 중도이다. 지관(止觀)을 풀어보면 ‘번뇌가 그치면(止) 지혜가 나온다(觀)’는 뜻이다.
 
즉, 우리 마음에 양변에 집착한 번뇌를 비우면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먹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오듯이 ….
 
초기불교에서 강조하는 사성제(四聖諦)인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중도를 말한다. 가령, 우리 삶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쌓임인 고집(苦集)을 알면[觀], 그것을 없애는 멸도(滅道)가 되어[止] 자유자재한다. 그러니 사성제가 그대로 위빠사나(觀)-사마타(止)이고,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를 말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즉, ‘물질이 공(空)이고 공(空)이 물질이다’도 중도를 말한다. 물질과 공이 둘이 아니라 중도로 존재한다. 물질과 공을 대립적으로 보면 갈등이 일어나지만, 양변에 집착을 비우고 다 아우르면 조화롭게 활용하는 지혜가 나온다. 그 지혜의 길이 바로 중도이고, 큰(마하) 지혜의 바라밀인 ‘마하반야바라밀’이다.
 
우리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도 중도를 말한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 집착하여 머물지 않으면 그대로 지혜가 나온다.
 
그 마음이 내편-네편, 진보-보수, 선-악, 부처-중생 등의 양변에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되어 자유자재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평상심이고, 바로 선(禪)이다.
 
 
3. 중도실상 바로 알면 부처님을 본다
 
일체 번뇌망상을 비우는
그 마음을 행하는 것이 禪
부처님이 중도를 깨달았다고 선언한 이후 불교의 모든 사상은 중도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조금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불교 2600년 역사에서 나타난 주요 사상을 중도로 회통시켜 보자.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져 정립된 천태종의 천태사상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를 핵심으로 한다. 이 쌍차쌍조가 바로 중도이다. 쌍차쌍조란 ‘양변을 차단하고(쌍차) 양변을 비춘다(쌍조)’는 뜻인데, 풀어 보면 나-너, 옳다-그르다 대립하는 양변에 집착을 떠나되 양변을 다 아우르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집착하고 나와 대립하는 상대는 그르다고 미워하고 욕한다. 이렇게 해서는 일시적인 승부만 있지 평화와 행복은 요원하다. 평화와 행복으로 가려면 나와 상대의 입장을 다 버리면서도 상대와 내 입장을 다 아우르는 중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쌍차쌍조이니 바로 중도를 말한다.
 
화엄종의 화엄사상에서는 중도를 ‘이사무애(理事無碍)’로 표현한다. 물론 너무나 화려하고 방대한 화엄사상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사무애’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사무애란 ‘이치와 일이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理)와 사(事)란 말에서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나왔다.
   
 
 
즉, 이치를 추구하는 수행 분야와 일을 다루는 분야를 말하는데, 여기에 승(僧)을 붙이면, 이판승-사판승이 된다. 흔히 불교계에는 이판과 사판으로 구분을 많이 한다. 참선, 염불, 간경 등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을 이판승이라 하고 종무를 전문으로 하는 스님을 사판승이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로 볼 때, 이런 구분은 옳지 않다. 이판과 사판 어느 한편에 치우침이 없이 서로 원융무애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도이고 부처님이 깨달은 길이다.
 
화엄십찰로 개산하였다는 가야산 해인사의 법당이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적광전이라 하는데, 이 적광(寂光)도 중도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 마음에 양변의 집착을 비우면 고요한 적(寂)이 되어 지혜의 빛인 광(光)이 난다. 적광이 바로 중도로 존재하는 우리 마음을 말한다. 중도가 부처님 마음인데 그 마음을 적광이라고도 표현한다.
 
선종에서도 가장 많은 도인을 배출하여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표 종단 조계종과 일본에까지 큰 법맥이 전해진 임제종(臨濟宗)에서는 중도를 ‘살활(殺活)’로 표현한다. 양변의 번뇌망상은 죽이고(살), 지혜는 살린다(활)는 것이다. 선도 중도이지 별 다른 세계가 아니다. 부처님이나 조사의 깨달은 마음은 하나다. 중도의 마음이다. 중도의 마음은 일체의 번뇌망상을 여의고 지혜로 밝은 마음이다.
 
이런 중도의 마음을 조사들은 흔히 ‘운개일출(雲開日出)’로 표현한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번뇌라는 구름이 걷히면 지혜가 나온다. 번뇌를 버리면 지혜가 저절로 나온다. 우리 마음에 욕심과 화, 어리석음을 버리면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대자유인, 영원한 행복인 부처님이라 한다. 우리 범부들은 흔히 ‘비워라’ 하니 무조건 남에게 양보하고 져주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더욱 더 나와 내 것에 집착한다. 그러는 한 행복할 수가 없다. 마음에 집착하는 생각, 분별망상을 놓아버리면 지혜의 빛이 저절로 나온다. 이와같이 번뇌망상을 비우는 마음을 행하는 것이 참선이다.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중도가 부처님이니 중도를 바로 알면 부처님을 봅니다 … 시비선악의 양쪽을 버리고 융합자재한 이 중도실상을 바로 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원한 휴전을 하고 절대적 평화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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