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와 위파사나 (묘원스승님)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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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릴 대상이 법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이란 법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법은 관념적인 대상의 속제가 있으며, 실재하는 대상을 아는 진제가 있습니다.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은 사마타이며,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수행은 위빠사나입니다.
사마타는 모양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근본집중을 통하여 선정을 얻는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느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찰나집중을 하여 지혜를 얻는 수행입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순서에 따라 분리해서 할 수도 있고, 함께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수행방법은 근기에 따라 선택할 수 있지만, 먼저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우선입니다.
법은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법과, 알아차린 결과로 얻는 진리의 법이 있습니다.
누구나 처음에 수행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대상을 알아차린 결과로서 대상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의 법은 알아차리는 법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얻는 진리의 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알아차리는 법으로 수행을 시작하여
지속하는 법으로 집중력을 키워서 진리를 통찰합니다.
좋은 법이 있어도 누구에게나 법이 아니며
법을 필요로 하고 알아차리는 자에게만 법입니다.
법은 선과 악이 없으며 정신과 물질의 구별이 없습니다.
나타나는 모든 대상이 모두 알아차려야 할 법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과, 사견에 대한 집착과 ,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네 번째 집착인 자아론에 대한 집착을 설명하겠습니다.
자아론에 대한 집착은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자아의 교리는 영혼의 실체에 대한 믿음을 뜻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보는 견해를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몸과 마음이 나의 소유이며
몸과 마음이 나라고 하는 유신견을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은
일반적인 집착과, 깊게 뿌리박힌 집착,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불교수행자들에게 팽배해 있는
일반적인 집착은 팔정도를 닦아가는 데 해롭지는 않습니다.
불교수행자는 영원한 영혼을 부정하고, 정신과 물질만이 중생의 유일한 실재로 인정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아의 교리는 깊게 뿌리박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내가 있다고 알아왔고,
자아를 강화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위빠사나 수행자는 이 자아론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고 듣는 것은 오직 눈과 귀의 감각기관들이며,
그에 상응하는 형상과 소리의 감각대상들이 안식과 이식과 서로 결부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신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도 때로는 유신견에 빠질 수 있으며, 성스러운 도를 얻지 않은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이 세상은 모두 고정관념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내가 있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신견을 가르쳤던 사람들은 자아를 자유의지와 스스로의 결정권을 지닌
오온의 주인으로 말해 왔습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께서 출가사문인
사짜까와의 대화 속에 물으신 것도 바로 이 유신견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몸이 너의 자아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몸을 항상 잘 간수하고, 즐겁지 못한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느냐?”
사짜까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세존께서는 계속해서 질문을 하시어 사실상 오온 중의 어느 것에 대한 통제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답변을 유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스승들은 ‘물질은 무아다’를 ‘육체적인 몸은 통제받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이는 통제하는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범부들은 다 이 견해를 지니고 있으며 자유의지를 믿습니다.
그리고 오직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을 통해서만 이러한 견해를 완전히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자아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는 스승들은 자아가 육체적인 몸에 영원히 존재한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는 전 존재의 일생에 걸쳐 지속한다고 하는 개체의 동일성을 뜻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아란 모든 행위의 주체라고 하고, 행의 무더기와 동일하게 봅니다.
이는 ‘보고 듣는 것은 나이다’라는 믿음을 일으키는 전도된 인식인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자아는 느끼는 살아있는 실재며, 행복해하거나 불행해하는 것은 자아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자아, 즉 영혼을 느낌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자아론을 주장하는 자가 자아와 오온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을 하더라도
자아를 몸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자아는 몸 안에 영원히 머물고 있고 주관자이며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인공이나 진아라는 견해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자아를 오온과 동일하게 여깁니다.
자아에 대한 전도된 인식은 오온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알아차림을 통해서 오온의 진정한 본성을 알게 될 때만이
비로소 그러한 전도된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아론을 집착하는 사람은 유신견이 강한 사람입니다.
유신견은 자아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유신견이 잘못된 견해라는 것은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집착하면 욕망의 세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를 집착하는 것이 됩니다.
욕망의 세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유신견은 20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색, 수, 상, 행, 식이 자아라는 믿음 5가지입니다.
둘째, 자아가 색, 수, 상, 행, 식을 소유한다는 믿음 5가지입니다.
셋째, 색, 수, 상, 행, 식 안에 자아가 있다는 믿음 5가지입니다.
넷째, 자아 안에 색, 수, 상, 행, 식이 있다는 믿음 5가지입니다.
이상 20가지의 유신견이 있는데,
결국 이 20가지라는 것은 오온이 나라는 것과 내가 오온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는 수다원과를 성취해야 사라집니다.
수다원이 되어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야
비로소 정신과 물질은 있지만 그것이 내가 아니며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실재하는 몸과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과 마음은 조건에 의해 매순간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으며 나의 것이 아닙니다.
과연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있다면 몸과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자신이 미칠 수 있는 영역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과연 내가 있다면 죽지 않거나 스스로 죽음을 연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습니다.
생명은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생명도 끝납니다. 그래서 죽습니다.
만약 내가 있어서, 죽기가 싫다면 호흡을 계속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조건이 성숙되면 호흡이 끊어져 결국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을 내가 있다는 무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없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아를 강화하면서 살았습니다.
부처님이 위대하다는 것은 혜안으로 마음을 살펴보니
마음이 매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면서 과보에 의해 다시 일어나는 현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있지만 이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아입니다.
이렇게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나를 위해서 집착할 이유가 사라져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정신과 물질에 관해서 설명하실 때,
자신의 아들 라훌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훌라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라훌라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렇다. 오온이 너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라훌라에게 하신 이 법문은
모든 불교의 교리의 가장 핵심적인 요지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불교는 성스러운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선한 것이나 선하지 못한 것을 모두 초월해야 합니다.
선한 것을 집착하면 선하지 못한 것을 비난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은 선하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그런 반대급부가 있는 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아차려서 무엇이나 집착하지 않는, 원인과 결과가 없는 그런 절대선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너는 정법을 버려야 한다, 하물며 비법을 버려야 하는 것을 말해서 무엇하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정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정법이라도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도 사실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단지 모든 것이 알아차릴 대상이어야 무엇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네 가지 집착 가운데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은 갈애에서 발전된 형태의 집착입니다.
그리고 사견에 대한 집착,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
이 세 가지는 각기 다른 대상에 따라서 구분한 것입니다.
이러한 집착은 기본적으로 모두 개인의 신념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러한 집착은 모두 개인에 대해서 관련된 것이지만,
사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사상들을 유지해왔습니다.
즉, 유신견에 대한 신념, 팔정도가 아닌 다른 수행법이 더 효과적이라는 신념,
그리고 이상 두 가지의 집착이 아닌, 다른 범주의 모든 그릇된 신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그릇된 신념은 갈애와 관련되어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나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믿음을 집착합니다.
그래서 네 가지 집착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두 갈애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갈애가 원인이고 집착이 그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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