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와 위파사나 (묘원스승님) 11. > 불자란 무엇인가?

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사)대한불교원융종
불교교리 불자란 무엇인가?

불자란 무엇인가?

12연기와 위파사나 (묘원스승님) 11.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449회 작성일 15-02-10 14:41

본문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모양이 있다고 해서 실재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법의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실재는 보이지 않아서 없는 것 같지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성품은 인식하는 것으로써, 느낌으로 나타납니다.
진리는 관념, 모양, 숫자, 이름, 개념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에 실재하는 것에 있습니다.
진리는 밖에 있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내가 본다는 잘못 된 견해로 보게 됩니다.

인간의 번뇌는 몸과 마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벗어난 것에서는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대상을 접촉 할 때 모양으로 보면 관념이고,
대상의 실재를 알면 대상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때에 마음이 대상으로 가면 차별이 일어나고,
눈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면 그냥 대상을 보는 것입니다.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이 소리로 가면 차별이 일어나고,
귀에서 마음으로 들으면 그냥 소리로 들립니다.
냄새를 맡을 때 마음이 냄새로 가면 차별이 일어나고,
코에서 마음으로 냄새를 맡으면 그냥 냄새일 뿐입니다.

맛을 볼 때에 마음이 음식으로 가면 차별이 일어나고,
혀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면 그냥 맛일 뿐입니다.
접촉을 할 때 마음이 대상으로 가면 차별이 일어나고,
피부에서 알아차리면 단지 부딪침일 뿐입니다.

생각을 할 때에 마음이 대상으로 가면 차별이 일어나고,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리면 단지 망상일 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란 결과가 일어납니다.
그 결과는 항상 새로운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집착이란 고통의 원인이며, 수행자에게는 장애를 주는 것들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제가 오래 전에 미얀마에서 호흡을 주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몇 년 동안 했습니다.
그런 뒤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곳으로 옮겨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 지도를 받았습니다.
호흡을 주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곳에서는 명칭을 붙이면서 수행을 했습니다.
호흡에 일어남 꺼짐을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고,
경행을 할 때에는 오른발 왼발이라고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곳에 오니 대상의 명칭을 붙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미 수년을 명칭을 붙이면서 수행을 했기 때문에 사실 명칭을 떼기란 여간 어렵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 명칭을 붙이지 말라고 하는가를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스승께서는 명칭이 대상이 되면 미세한 대상인 마음과 느낌을 볼 수가 없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붙여온 명칭을 떼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명칭이 떨어지지 않고 전 자동으로 붙는다고 고충을 호소했습니다.
어느덧 저도 모르게 오른 발, 왼발, 일어남, 꺼짐, 봄, 봄, 들음, 씹음, 잠, 잠,
이런 것들이 습관적으로 명칭으로 되어서 도무지 이 명칭이 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스승께서는 ‘명칭을 붙이려고 할 때 명칭을 붙이려는 마음을 알아차려라’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다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냥 스승의 말씀으로 흘려버리고, 명칭을 붙이면서 수행을 계속 했습니다.
이때에 명칭을 붙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명칭을 계속 붙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가 않아서 명칭을 붙이면서 수행을 하던 중에,
어느 날 좌선을 하면서 일어남 꺼짐이라는 명칭을 붙이려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스승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명칭을 붙이려는 마음을 알아차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명칭을 붙이는 것이 전 자동으로 붙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간 명칭을 붙인 것은 내가 집착해서 붙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명칭이 어쩔 수 없이 붙는다는 것은 사실 제 자신의 견해였습니다.

저는 명칭을 집착하고 있는 것을 안 뒤에
명칭을 붙이는 것을 좋아해서 붙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명칭을 붙이는 것을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이제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오히려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명칭을 붙이려고 해도 명칭이 붙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명칭을 붙이는 것이 집착이라는 것을 지혜로 안 뒤부터
명칭이 결코 붙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집착의 무서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라면 하나의 작은 지혜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지혜가 나면 대상을 끊는다는 특성이 사실이라는 것도 이때 알았습니다.

지혜는 알기 때문에 대상을 끊는 것입니다.
끊는다는 것은 더 이상 집착을 하지 않고 미련을 버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집착을 해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먼저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을 알아차렸는데도 갈애가 일어났다면,
다시 갈애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갈애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렸는데 집착이 일어났다면,
다시 집착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집착을 없애려고 해서는 집착이 더 강해집니다.
그래서 단지 집착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착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마음속에 뿌리박힌 욕망을 알게 됩니다.
이 뿌리인 욕망을 알아야 비로소 근본 원인이 제거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토록 집착은 우리가 선택해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아셔야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집착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업의 생성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업의 생성을 빨리어로는 깜마바와라고 합니다. 깜마는 업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와는 존재, 유(有), 존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뜻과 생성. 윤회. 다시 태어남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깜마바와를 여기서는 업의 생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업유(業有)라고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12연기 안에서 업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책에 12연기의 도표를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표 부분 1에 무명을 원인으로 행(行)이 일어난다고 할 때 행도 업을 말합니다.
이때의 업은 과거에 형성된 업입니다.
그래서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는 ‘업의 형성’을 뜻합니다.

나머지 다른 하나의 업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도표 부분 3에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의 업입니다 .
이때의 업은 첫 번째 업인 과거의 업이 아니고 현재의 업입니다

그래서 이미 형성되어 나타난 업이 아니고,
지금 새로운 행위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성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형성된 업은 바꿀 수 없지만,
현재 새로 짓는 생성하는 업은 자신의 의도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과거의 업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지금 새로 생성하는 업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업이란 무엇일까요?
업을 행 또는 행위라고 합니다.
이는 앞서서 의도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루어지는 행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행은 의도를 말합니다.
 
그 의도는 바로 마음입니다.
바로 이 행이 과거의 업의 형성과 현재의 업의 생성으로 나뉩니다.
업은 먼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말을 하는 과정을 거쳐 행위를 하는 결과로 갑니다.
이것이 신구의(身口意) 3업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선업과 불선업은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는데
이것이 원인과 결과로써 연기의 조건입니다.

이 같은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이 업의 존재를 받아들여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이 마음의 의도이기 때문에 물질에 속하지 않고 정신에 속합니다.
업이 행이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에 속합니다.

다음으로 빨리어 바와라고 하는 생성(生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생성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업의 생성과 둘째 재생의 생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 업의 생성은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이 일어난다고 하는 업의 생성입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는 업유(業有)라고도 합니다.

이때의 업의 생성은 재생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되는 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존재로 태어나지 않는 업을 뜻합니다.
그래서 다음 생을 받게 하는 요소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업의 생성은 12연기 안에 있습니다.
이 때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생의 업의 생성으로 미래 생의 태어남이 있는데,
이때 미래 생의 태어남은 다른 힘이 아닌, 업의 생성하는 힘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내가 있어서 다음 생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업의 생성하는 힘이 다음 생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12연기의 흐름 안에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로 흐르는 과정만 있지,
자아가 있어서 이것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생의 항상하는 자아가 있어서 다음 생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고,
행위를 한 힘이나 행위를 한 과보인 업의 생성이 다음 생을 태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가속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는 과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윤회나, 흐름이나, 상속이나, 회전이나,
굴레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같은 용어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12연기 안에 열두 가지 요소는 모두 정신과 물질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 자아가 있지를 않습니다.
단지 그 순간의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에 의해 상속되는 흐름과 그 과정만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