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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란 무엇인가?

12연기와 위파사나 (묘원스승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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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056회 작성일 15-02-10 14:32

본문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갈애의 본성은 눈, 귀, 코, 혀, 몸, 생각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의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다양한 대상을 즐기는 마음입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를 막는 길은,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되고,
들어오는 대상을 6문에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과거 생에서는 무명으로 인해 현생을 받았고
현생에서는 갈애로 인해서 미래의 생을 받습니다.

수행자의 임무는 현생의 갈애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108가지 번뇌는 모두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갈애는 감각적 느낌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어나므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만이 갈애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집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데
지난 시간에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과 사견에 대한 집착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집착인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지 않는 그릇된 수행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와 개, 다른 동물들의 습관을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수행과
동일시하는 견해가 바로 그릇된 수행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에 일부 고행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견해입니다.
고행자들은 동물처럼 발가벗고, 동물처럼 먹고, 동물처럼 똥을 누고,
동물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동물처럼 맨 땅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악업이 정화되고, 새로운 업이 생기지 못하며,
죽은 뒤에 괴로움에 종지부를 찍고, 영원한 지복이 보장된다고 믿었습니다.

불교 신자들에게는 믿기지 않겠지만,
어떤 사람들의 취향은 아주 이상하여 보통 사람들과 다릅니다.
경전에 따르면, 소처럼 사는 뿐나와 개처럼 사는 쎄니아라는
두 고행자가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뿐나와 쎄니아는 자신의 고행으로 무슨 이익을 얻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대답하기를 꺼리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재차 간청을 해서 답변을 들었습니다.

간청을 받자, 완전히 소나 개처럼 사는 고행자는
죽어서 소나 개로 태어날 것이며,
그러한 수행으로 천인계에 이른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며,
그러한 사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죽어서
지옥이나 축생계에 떨어지기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나쁜 과보를 맺는 나쁜 수행과,
선한 과보를 맺는 선한 수행과, 선한 수행과 섞여 있는 나쁜 수행과,
선업과 악업의 완전한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도의 수행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설법을 들은 뿐나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쎄니아는 승가에 들어가서 법을 닦아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개처럼 사는 꼬락까띠아라는 고행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릿차위의 후예 수낙까따라는 비구와 함께
그 고행자 옆을 지나가셨습니다.

수낙까따는 그 고행자가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
땅바닥에 있는 음식을 손을 사용하지 않고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고행자의 삶의 방식은 아라한이라는 인상을 수낙까따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사실 그 고행자의 삶의 방식은 사악도 중 하나에 떨어지게 하는,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의 일종으로
높은 이상과 염원을 지닌 사람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우매한 대중들에게 아라한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매우 허다했습니다.
수낙까따가 이에 감명을 받은 것은 그의 낮은 취향과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릿차위 비구는 이런 면에서 유별한 인물입니다.

그 당시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합되지 않는 삿된 견해와
삿된 수행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여러 전생을 거치며 삿된 집착을 지녀온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것들을 선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타심통으로 수낙까따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저 고행자를 아라한으로 보는구나!
그러고도 네가 여래의 제자라고 서원을 할 수 있느냐?”

그러자 수낙까따는 세존께서 고행자가 아라한이라는 것을 시기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물론 이는 누가 자신의 그릇된 스승에 대해 진실을 말해 줄때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일종의 반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낙까따에게 이익 됨이 없는 전도된 인식을
없애주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는 7일 뒤에 이 고행자가 소화불량으로 죽어서
가장 낮은 아수라계에 떨어질 것이고, 시체는 어떤 묘지에 버려질 것인데
수낙까따가 그곳에 가서 지금 어디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시체가 알려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낙까따로 하여금 여래에 대한 믿음을 되찾게 하려고
이러한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수낙까따는 사마타 수행을 해서 선정과 천안을 얻었습니다.
이 천안으로 수낙까따는 남자 천인과 천녀를 보았지만, 그들의 소리를 듣고 싶어서
부처님께 천이통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수낙까따의 악업 때문에 천이통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신 세존께서는 그 청을 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수낙까따는 세존이 천이통을 얻지 못하도록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또 수낙까따는 세존이 자기 요청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은
시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세존에 대한 믿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수낙까따에게 감화를 심어주고
믿음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고행자의 운명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수낙까따는 고행자에게 세존의 예언을 알려주며 과식을 주의하라는 경고를 하였습니다.
고행자는 6일을 굶었지만 7일째 되는 날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의 유혹을 참지 못하였습니다.

고행자는 한 재가 신도가 제공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는
그날 저녁 소화불량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동료 고행자들은 부처님이 예언하신 묘지가 아닌
다른 장소에 내다 버리려고 그의 시체를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묘지에 도착해 보니 부처님이 예언하신 종류의 풀이 있어서
자신들이 피하려고 했던 바로 그 장소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끌고 가려고 했지만, 넝쿨풀에 얽혀서,
풀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래서 고행자들은 시체를 그냥 거기에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낙까따도 역시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세존께서 하신 예언의 뒷부분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묘지로 가서 시체를 툭툭 두드리며 어디서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시체는 일어나서 깔라깐디까 아수라계에 있다고 말하고 다시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깔라깐디까는 가장 낮은 아수라계입니다.
아수라는 괴물처럼 생기고, 입이 너무 작아 제대로 먹거나 마실 수 없는
일종의 아귀에 속합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아수라인 아귀가 시체에 깃들이게 되는 것은
부처님의 신통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심령술사는 시체를 일으킬 능력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부처님께서 신통으로 죽은 고행자를 부활시킨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수낙까따는 풀이 죽어서 돌아왔고,
세존의 예언이 모두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낙까따는 부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환속하여 세존을 비방하였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가장 존경하는 부처님을 지금 열절하게 흠모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시대의 부처님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모두 다 수행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모든 것들은
스스로 일으킨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소와 개처럼 사는 것 외에도 잘못된 계율과 의식이라고 할만한 다른 수행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코끼리나 말과 같은 동물을 흉내 내기도 하고, 동물을 숭배하기도 합니다.

토속신앙을 숭배하는 것은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물질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의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토속신앙을 숭배하기 위해서 동물을 재물로 바치는 것은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에 속합니다.

불을 숭배하거나, 용을 숭배하거나, 달을 숭배하거나, 태양을 숭배하거나,
정령을 숭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숭배의 목적이 죽어서 행복을 얻거나 영적인 해탈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요컨대 사성제나 팔정도에서 벗어난 모든 수행은 그릇된 계율과 의식으로 분류되고,
구원에 이르는 방법으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정신과 물질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서 적어도 수다원과를 성취한 수행자는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계율과 의식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내관과 팔정도의 실천만이
괴로움의 종식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체험으로 잘 압니다.

수다원과를 성취한 수행자가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을 알기에,
구원에 이르는 도로 통하는 신에 대한 신앙이나 토속신앙,
고행과 같은 믿음과 수행에 대하여 전도된 인식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른 길을 모르는 사람은 그러한 전도된 인식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부모나 스승이나 친구의 영향으로 그런 전도된 인식을 가졌거나,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릇된 견해나 수행을 설하는 책을 통해서
호도되었을 것입니다.

범부는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윤회하면서 수많은 스승과 수행법을 쫒아 다녀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그릇된 스승이나 수행법에 빠지면 심한 괴로움을 겪을 뿐입니다.

고행은 단지 고난과 고통만을 가져오고,
동물을 공회제와 재물로 희생시키면 반드시 악처에 떨어질 것입니다.

색계 선정이나 선정이 완전한 구원임을 뜻한다고 믿는 것도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요컨대 심지어는 완벽한 계행이나 세간의 선정을 성취하는 것도 칭찬할 만하지만,
그것이 위빠사나의 성스러운 도를 벗어나고 있는,
또 그것 자체를 완전한 해탈로 여긴다면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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