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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 불자란 무엇인가?

불자란 무엇인가?

12연기와 위파사나 (묘원스승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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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931회 작성일 15-01-07 15:58

본문

안녕하십니까? 한국명상원의 묘원입니다.

오늘은 12연기에 대한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모곡 사야도 12연기 법문집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본문 제1장을 공부해 보겠습니다.
공부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드릴 당부는 이 내용이 어렵더라도 그냥 들으시기 바랍니다.

연기는 매우 심오한 법입니다.
아난다 존자께서 부처님께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세존이시여 12연기는 참으로 심오하고 또 심오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라고 아난다가 심오하다라고 말한 뜻을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의 참뜻은 ‘네가 심오하다고 한 수준의 심오함을 뛰어넘어서, 이것은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12연기는 인류역사의 모든 의문을 관통하는 내용으로서, 부처님께서 찾아내신 법이기 때문에
저희 범부로서는 처음부터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차츰 모르시더라도 공부를 해나가시면 언젠가 아시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연기(緣起)라고 말하는 연기는 빨리어로
빠띠짜사무빠다(Paticcasamuppāda)라고 합니다.
빨리어는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신 언어입니다.

이 빨리어 빠띠짜사무빠다(Paticcasamuppāda)라고 하는 이 말은
세 가지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빠띠짜(Paticca)는 ‘~로 인하여’, ‘~을 원인으로 하여’하는 뜻이고,
빠띠짜 삼이라고 말할 때 삼(Sam)은 ‘well’ ‘잘’, 분명하게, 정확하게, 바르게,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빠따라는 말이 있는데, 빠띠짜사무빠다에서 우빠따(Uppāda)라는 말은 ‘발생’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원인에 의존하여 결과가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의존적 발생의 법칙, 혹은 윤회,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는 연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윤회는 원인과 결과에 의한 순환, 생사, 상속, 흐름, 지속, 이런 것들을 말합니다.
이런 윤회는 사실 한 순간의 윤회가 있고, 한 인간의 한 일생의 윤회가 있습니다.
차츰 이런 공부를 앞으로 해 나가시겠습니다.
이 연기법 하면 12개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이 연결 고리들이 끝없는 윤회의 사슬 속에서 하나의 현상에서
또 다른 현상으로 의식체가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기가 무명(無明)으로부터 시작될지라도, 무명이 존재의 시원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이미 우리가 공부를 했습니다.

시원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단지 그냥 무명이라고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윤회를 거듭하는 존재의 시원은 무명에 가려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연기는 재생의 순환을 가르쳐주며, 원인은 원인이자 한편에는 결과라는 사실,
즉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시공의 우주 속에서 원인은 결과가 되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원이라는 것은 처음, 원시를 말합니다.
그래서 12연기의 시작은 시간적, 존재적 시원이 아니고, 윤회를 거듭하게 하는 근본 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근본 원인은 바로 정신적 현상입니다.

자, 12연기의 연결고리는 열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행(行)이 일어납니다.
이때 우리가 말하는 무명이라는 것은 보통 여덟 가지로 밝힐 수 있습니다.
첫째로 모른 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셋째는 괴로움의 소멸을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넷째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8정도, 중도를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다섯 번째는 출생이전의 과거 생을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여섯 번째는 죽음 이후의 미래 생을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일곱 번째는 과거 미래를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무명은 12연기의 성품인 원인과 결과를 모른다는 것을 우리가 무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12연기의 시작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무명을 원인으로 다음 단계인 행이 일어납니다.
이때 행은 업의 형성이라고 해서 업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행은 마음의 형성력, 의도 그런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명도 마음이고 행도 마음에 속합니다.

두 번째, 행을 원인으로 하여 식(識)이 일어납니다.
이때 행은 연생이고, 그것을 일으키게 한 무명은 연기입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난다 할 때, 무명은 연기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난 행은 연생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행을 원인으로 식이 일어난다고 할 때 이 식은 재생연결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환생이 아니고 재생이라고 아셔야 되겠습니다.

세 번째 식을 원인으로 하여 명색(名色)이 일어납니다.
이 때의 명색은 정신과 물질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몸과 마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경전에서는 오직 정신과 물질, 나마루빠 (Nāmarūpa)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이 식(識)에 의해서 결과로 일어납니다.

다시 이 결과가 원인이 되어서
네 번째, 명색을 원인으로 하여 육입(六入)이 일어납니다.
정신과 물질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문(六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신과 물질이 있고, 정신과 물질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 안이비설신의 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또 육입을 원인으로 하여 촉(觸)이 일어납니다.
이 촉은 부딪침을 말합니다.
안이비설신의 라는 감각기관이 색성향미촉법에 부딪칩니다.
그래서 감각기관을 원인으로 감각 대상이 일어난다 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촉을 원인으로 하여 느낌이 일어납니다.
감각기관이 감각 대상에 부딪쳤을 때 모든 것들은 느낌으로 우리들에게 인식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느낌입니다.

이런 느낌을 원인으로 인하여 다시 갈애(渴愛)가 일어납니다.
갈애는 욕망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반드시 느낌은 느낌으로 그치지 않고 갈애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집착(執着)이 일어납니다.
갈애는 반드시 갈애로 그치지 않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바라는 집착으로 발전합니다.
이 집착은 고기가 석쇠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더 많이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에 이런 집착을 원인으로 하여 업의 생성이 일어납니다.
업의 생성을 업유(業有)라고 하는데 어떤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가 앞서 말씀드린 행은 업의 형성이라고 하는데, 이때 유는 업의 생성입니다.
형성은 이미 과거의 것이지만, 생성은 지금 현재 내가 새로 시작하는 행위입니다.

다음에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하여 생(生)이 일어납니다.
이때 이 생을 태어남이라고 말합니다.

다음에 이 생을 원인으로 하여 노사(老死)가 일어납니다.
태어났으면 반드시 늙어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12연기의 열두 가지 순환이자 고리입니다.

이때 생과 노사만 있지 병(病)이 없습니다.
이 병(病)은 주석서에서 다룹니다.
사실은 태어나는 것 자체가 병을 가지고 있고, 또 늙는 다는 것이 병이고, 우리가 병으로 죽기 때문에
굳이 생과 노사에서 병을 부처님께서는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석서에서는 일반적으로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서 죽는 과정이 모두 병과 함께 있다고 해서
생노병사라고 표현합니다.

이때 우리가 말하는 병(病)이라는 것은 정신적 병과 육체적 병을 포함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병(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생을 원인으로 하여 노사가 일어난다는 이런 사실로 인하여
슬픔, 비탄, 육체적 괴로움, 정신적 괴로움, 고뇌가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12연기를 외워야 합니다.
아직 암기하지 못한 여러분들은 이것을 가능한 한이면 외우셔서
왜 우리가 어떤 순환의 고리로 현재를 살고 있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왜 이것을 외워야 하는가 하면
이것이 연기법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예불할 때 암송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도 좋지만,
연기법의 요지와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단순히 암송하는 것만으로는
사악도에 떨어질 위험의 원인이 되는 모든 종류의 사견(邪見)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기법을 알아야 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한다면, 연기의 과보를 안다면
결코 그 자는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4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지은 원인으로 인해서 결과를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때,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을 업자성정견이라고 하는데,
이 업자성정견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를 알면 4악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연기가 우리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밝은 미래까지도 예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기를 자세히 알아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연기법은 바로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오온으로, 정신과 물질적 현상이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됩니다.
단지 정신과 물질일 뿐이지, 이것이 나의 몸이고, 나의 소유라고 알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연기를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과보로, 자신의 원인과 결과로 지속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연기는 소위 자기라고 불리는 인과적 연속체인 정신과 물질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과정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끝없이 반복되는 슬픔과 괴로움의 연속입니다.
사실 사는 것은 괴로움이 반복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세 번째 시간으로 여러분과 함께 12연기에 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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