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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란 무엇인가?

12연기와 위파사나 (묘원스승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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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982회 작성일 15-01-07 16:01

본문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연기는 그 자체로서 법(法)입니다.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순환의 질서를 연기라고 합니다.

하나의 현상이 사라져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는 과정이
끝없이 연속되는 것을 윤회라고도 말하며 연기라고도 말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러한 현상을 연기(緣起) 또는 연생(緣生)이라고 하며,
그 작용은 어떠한 창조주나 신이라고 할지라도 시작하거나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용이 연기의 재연결입니다.

도(道)와 과(果)라고 하는 것은 연기의 연결고리를 부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더 이상 재연결이 없을 때 이를 우리는 열반(涅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연기라고 하는 것은 원인이 되는 법이며,
연생은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결과를 말합니다.
이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 또 다른 결과를 일으킵니다.

예를 들자면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난다’ 했을 때
무명은 연기이고, 무명에 의해서 일어난 행은 연생이 됩니다.

이때 연생은 결과이면서 새로운 원인이 되어 ‘행을 원인으로 식이 일어난다’고 할 때
다시 연기가 또 연생이라는 결과를 만듭니다.

이 과정은 오로지 오온인 정신과 물질의 일어나고 사라짐, 그것일 뿐입니다.
무엇에 의해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날까요?
그렇습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이러한 것을 인과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인과법의 과정에는
나, 나의 것, 자신 혹은 자아라고 여길 만한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오온, 정신과 물질, 6내처와 6외처, 혹은 인지작용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연기를 요약하자면 크게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세속적 진리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 사람, 존재 등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 진리에 있어서는 인간, 사람, 존재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무명과 갈애가 윤회의 시작이라고 하는 법으로 거슬러 올라갈 뿐입니다.
연기법은 무명과 갈애가 윤회의 시작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 또는 인습의 시초, 혹은 제1의 원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속적 진리는 출세간의 진리 혹은 궁극적 진리와 구별되는 말입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진리를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세속적 진리입니다.
세속적 진리를 빨리어로는 빤냐띠, 우리말로는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이 빤냐띠는 개념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 뜻은 표면, 명칭, 서술, 가정,
또는 실재하지 않는 것의 방편적 설정이라는 뜻으로 시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세속의 진리는 인간, 사람, 남자, 여자 등등 개념적인 명칭으로
사마타 수행의 대상입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이라는 표현은 몸과 마음의 실재하는 현상을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서
우리는 이런 것을 관념적 진리라고 말합니다.

이것과 다른 궁극적 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궁극적 진리는 빨리어로 빠라마타 담마라고도 하고, 진제(眞諦)라고도 합니다.

세속적 진리를 속제라고 하는 반면 궁극적 진리를 진제라고 말합니다.
이 궁극적 진리는 명칭이나 개념이 아닌 실재하는 진리를 말합니다.
이 궁극적 진리를 빨리어로 빠라마타 담마(Paramattha dhamma)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최승의법, 최상의 법, 최고의 의미를 가진 법이라고 말합니다.

궁극적 진리는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열반이라고 하는 네 가지의 진리를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의 ‘손’은 명칭으로, 모양 개념으로는 세속적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손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고, 손의 실재하는 것은 따뜻함, 축축함,
무거움, 진동 등 이런 실재하는 느낌을 궁극적 진리하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마타 수행은 세속적 진리이고,
위빠사나 수행은 궁극적 진리인 느낌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을 먼저 전제해야 되겠습니다.

12연기를 요약하자면
두 번째는 연기는 세속적 진리로서 남자 여자 등으로 알고 있는 소위 지각(知覺)이 있는
존재의 오온이 연속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시원, 최초의 시작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깨달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언제다, 또는 어디서다 하는 것들은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 그것만이 수행자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오온은 세속적 관념에서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기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궁극적 진리에서는 남자, 여자 혹은 존재라고 부를만한 것이
실제로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것이 존재하면 저것이 존재한다.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저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남자 여자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처럼 원인이 있어 생긴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알 때만이 출세간의 진리를 알아서 윤회를 끊는 해탈의 세계로 갑니다.

네 번째는 행(行) 그리고 식(識), 그리고 업의 생성과 생(生)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행과 식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고 업의 생성과 생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두 가지가 있는데,
현재 오온을 받은 한 일생의 태어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지속되어서 순간순간의 태어남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나 원인에 의한 결과가 연속된다는 것이 연기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태어나게 하는가요?
원인과 결과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다 업으로 인해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다섯 번째로 연기법에서는 태어남, 늙음, 병듦
그리고 죽음의 끝없는 순환을 보여줍니다.
즉 열매를 맺고, 동일한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는 나무와 같이,
재생, 병듦, 늙음, 죽음이 끝없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고 열매가 다시 씨앗이 되고, 씨앗이 또 열매가 되는
이런 동일한 과정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슬픔과 고통이 연속되는 과정일 뿐임을 보여줍니다.
사실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은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들의 즐거움은 그 실체를 벗겨보면 감각적 욕망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즐거움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무상은 변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고통을 수반합니다.
이것은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일곱 번째, 이것은 마치 한 무더기의 불과 연료와 같아서
연료가 들어가면 불꽃이 일어납니다.
연료가 다시 들어가면 불은 계속하여 타올라 끝없이 지속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연료는 갈애이며, 불이라고 하는 것은 업의 생성입니다.
업의 생성이 약해지면 다시 갈애라는 연료를 부어서 또 업의 생성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순환하는 것을 연기라고 합니다.

여덟 번째, 성스런 진리로 보면 집제(集諦)와 고제(苦諦)가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연기입니다.
고집멸도 사성제 중에서 멸제와 도제는 세속이 아닌 출세간의 법입니다.
원래 이 세상에는 집제와 고제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멸제와 도제를 발견하셔서
그 길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세속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 그렇게 둘로 나눈 것입니다.

자, 연기를 요약하면 아홉 번째는
끝없이 반복되는 세 가지의 굴레, 회전이 있습니다.
이때 굴레라고 하는 것은 순환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전개되다, 윤회 상속되다, 회전하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회전이 바로 연기입니다.

그런데 이 회전은 세 가지에 의해서 회전합니다.
첫째는 번뇌의 회전에 의해서 일어나서 다시 업의 회전으로 가고,
그 업의 회전은 반드시 과보의 회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번뇌의 굴레가 굴러가서 업의 굴레를 일으키고,
업의 굴레가 굴러가서 과보의 굴레를 일으키고
다시 과보의 굴레가 번뇌의 굴레를 새롭게 일으킵니다.
이러한 순환을 연기라고 말합니다.
번뇌의 굴레로 인하여 업의 굴레가 일어나며
업의 굴레로 인하여 과보의 굴레가 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공간의 순환적 질서가 있을 뿐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께서는 현재는 미래의 과거가 되며
미래는 다시 현재가 된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이리하여 끝없이 윤회의 과정은 무한히 지속됩니다.

이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 열반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만, 수행자는 오직 현재에만 머물러야합니다.
그것을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현재에 머물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을 주시해야합니다.
이것을 알아차림이라고도 말합니다.

과거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시간입니다.
실재하는 시간에 있을 때만이 깨어서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과거는 거의는 우리들에게 회한입니다.
아쉬움, 회한 그것만 남깁니다.
추억은 마치 깨진 도자기의 파편과 같은,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이 과거와 함께 우리들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이 미래는 두려움입니다.
오지 않은 미래는 우리들에게 불안을 줍니다.
그래서 두렵고 공포에 떨게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단지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므로
존재한다는 것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를
현재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오직 현재에 머물 때만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연기를 알아서, 원인과 결과를 알아서,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과거는 현재의 원인이고, 현재는 다시 미래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서
오직 현재에만 머물러서 행복을 찾는 것,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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