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와 禪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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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유대인뿐만이 아니다. 지금 유럽에는 신 중심의 기독교가 점점 약화되어 가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2015.1.3)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 지난 10년간 문 닫은 가톨릭교회 건물은 전체 1600곳 가운데 3분의 2로 집계되며, 영국은 연평균 20여 곳의 성공회 교회가 폐쇄되고 있고, 덴마크에서는 지금까지 200곳 안팎의 교회에 신도의 걸음이 끊겼다고 한다. 유럽연합(EU)의 심장이라는 독일도 지난 10년 동안 515곳의 가톨릭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유대인과 유럽에서 신 중심의 종교는 쇠퇴하고 있으나 반대로 인본주의적인 불교는 성장세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결정해 나간다는 불교사상이 신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과학 기술의 발달과도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지 2600년이 지났으나, 그 가치는 더욱 더 빛나고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는 빈부 양극화가 날로 첨예화돼 가는 현대 자본주의경제에서도 대안으로도 부각되고 있다. 특히 한반도의 분단 상황으로 조성된 남과 북의 대결과 진보와 보수, 노와 사, 갑과 을, 동과 서의 사회 갈등 상황에서도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사상도 말과 논리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노라’ 말씀하시고 그것을 일상에서 일관되게 실천하면서 승가(僧伽)라는 대안의 공동체를 만드셨다.
부처님은 영원한 행복의 길인 중도를 발견하고는 온갖 부귀영화가 보장된 왕자로 돌아가지 않고 평생 걸식하며 무소유로 그 길을 가셨다. 이 길이 바로 중도다.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를 체험하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선(禪)이다.
2. 어떤 게 자유자재한 삶인가?
부처님께서는 첫 설법 뒤에도 당신의 깨달음을 팔정도, 사성제, 삼법인, 연기, 무아, 공, 불성 등등 다양하게 말씀하여 팔만대장경이 성립되었지만, 이것이 모두 중도를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는 중도를 ‘양변에 집착을 떠나고 가운데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양변(兩邊)이란 ‘고-락’, ‘선-악’, ‘나-너’ 등 대립하는 두 변견(邊見)을 말한다. 이것은 현실세계에서 ‘좌-우’, ‘빈-부’, ‘갑-을’, ‘남-북’ 등 대립하는 어떤 것도 해당한다.
서양 철학의 ‘신-인간’, ‘물질-정신’ 등의 이원론, 이분법적인 세계관도 양변이다. 이 양변에 생각이 머물러 집착하고 있으면 지혜가 나올 수 없다. 집착을 놓아야 지혜가 나온다. 아울러 양변에 집착하지 말라 하니 그 가운데를 중도로 착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가운데도 아니다. 그럼 어디를 말하는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평상심이고, 바로 선(禪)…
우리는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늘 나와 남을 비교하고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분별심으로 살아가니 단 하루도 편 한 날이 없다. 나보다 잘나고 많이 가지고 배운 사람을 만나면 위축되고 나보다 덜 배우고 가진 것이 부족한 사람을 마주하면 우월의식이 나온다. 이렇게 행복과 불행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양변에 집착하는 중생의 마음이다.
부처님은 이 양변에 집착을 떠나고 가운데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를 깨치라 한다. 예컨대 내 마음이 대립하는 양변의 어느 편이 옳다고 생각해서 집착하면 반대편은 그르다고 보게 된다. 이렇게 해서는 공존, 평화가 오지 않는다. 내 견해와 다른 사람과 늘 시비 갈등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내 마음 안에도 양변에 집착하는 마음이 오락가락해서 늘 초조하고 불안해서 행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견해를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으면, 상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나와 상대의 마음을 다 이해하는 지혜가 나와서 평화와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도가 영원한 자유와 행복의 길이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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