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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 불자란 무엇인가?

불자란 무엇인가?

12연기와 위파사나 (묘원스승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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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902회 작성일 15-01-26 07:42

본문

 


안녕하십니까? 한국 명상원의 묘원입니다.

오늘은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59쪽,
3장 오온의 연기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오온의 연기는 현재의 측면입니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러분들! 부처님께서는 오랜 세월동안
살아있는 생명 중에서 최고의 바라밀 공덕을 쌓은 과보로
인간으로 태어나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스승이 되셨습니다.

29세에 출가를 하신 후에
색계와 무색계 4선정을 이루신 뒤에 이것이 진리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색계와 무색계 선정을 얻고서도 답을 얻을 수가 없어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6년 동안 고행을 하신 그 끝에
과거 생의 원인으로 현재 생이 생겼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은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결과이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를 안 뒤에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하는 것들의 속성을 통찰하셔서, 모든 번뇌를 불태우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셨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셨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에게 해탈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법을 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누구나 자신과 똑같이,
이렇게 번뇌를 불태운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연기를 공부해야 되는 하나의 목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은 오직 스스로 만족하는 자, 진리를 들은 자,
그리고 진리를 본 자에 한정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은 집착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며,
감각적 욕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라고 하는 자만심의 억제는
실로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는 과거의 연기와 현재의 연기와 미래의 연기가 있습니다.
수행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연기를 모두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현재에 해당하는
오온의 연기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 물질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을 맺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더러 행복은 오직 여기 현재에만 있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여기에 있는 자신의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 책의 저자이신 고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수행자의 이익을 위해서 오온의 연기에 대해서 설하셨습니다.
이는 수행을 시작하려는 자에게 실 수행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단지 이론만 있어서는 우리가 해탈 할 수 없습니다.

연기적 바탕에 근거한 실천 수행이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오온의 연기를 통해서 수행자는 오온의 시작과 원인,
그리고 사라짐을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
보는 것들은 단순히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눈이라는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안식이 일어납니다.
이때 촉에 의해서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 느낌을 원인으로 또 갈애(渴愛)가 일어납니다.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執着)이 일어납니다.
집착을 원인으로 하여 업의 생성(業의 生成)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갈애라고 말하는 것은 탐욕, 바라는 마음, 그것들을 말합니다.
특히 욕망이라고 말하는 갈애는 범부가 목마르게 원하는 것들입니다.
보통 이 갈애를 크게 나누면 세 가지로 나누는데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가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에 부딪칠 때
반드시 그냥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보지 못하고 바이러스가 생깁니다.
볼 때 좋은 것을 탐착하고, 들을 때 좋은 것을 탐착하고,
볼 때 좋은 것을 탐착하면 좋지 않은 것은 또 싫어합니다.

그래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에 부딪칠 때마다
우리는 더 좋은 것을 바라는 갈애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라고 말합니다.

갈애는 세 가지가 있는데 두 번째로는 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우리가 오래 살고 싶다거나 더 좋은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것,
이런 것들은 욕망에 가까운 갈애에 속합니다.

모든 것들이 원인이 있어 생긴 결과인데,
우리는 원인은 만들지 않고 좋은 결과만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세 번째 갈애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그러니까 이 삶이 끝나기를 바라고,
또 죽고 싶다는 마음, 허무에 대한 갈망,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는 마음들입니다.

지혜가 나서 받을 것이 없어서 태어나지 않는 것과
그만 살고 싶다는 것은 또 다릅니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싫은 것을 좋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미워할 때도 좋아서 미워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괴로울 때도 괴로워하는 것을 좋아해서
바라기 때문에 괴로움이 그치지가 않습니다.
이처럼 갈애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처럼 눈이 대상을 볼 때 바로 눈을 원인으로 하여
눈에 보이는 물질이라는 결과가 일어납니다.
다시 눈과 물질을 원인으로 인하여
이것이 무엇이라고 아는 안식이라는 결과가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눈과 물질과 안식이 합쳐진 것을 촉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안식에 알아차림이라는 행이 있어서 이것을 원인으로 하여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아는 마음이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르고 사는 세상도 다 원인과 결과가 있어서 사는 것이고
아는 지혜도 다 원인과 결과가 있어서 지혜가 납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자면
생성을 원인으로 하여 생(生), 태어남이 일어납니다.
태어남을 원인으로 하여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절망이 일어납니다.

미래에 우리는 태어나서 늙어서 죽습니다.
이것을 연기적 구조로 보면 생과 노사라고 말합니다.
이때 병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생노병사라고 말하는데
연기에서는 병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태어나는 것, 늙는 것, 죽는 것들은
이미 물질적 정신적 병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
신체적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이와 같이 오직 고통스러운 오온의 집합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하여 이식이라고 해서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하여 비식이라고 해서 냄새를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혀와 맛을 조건으로 하여 설식이라고 해서 맛을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몸과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신식이 일어납니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여 의식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단순히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조건,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우리가 아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눈으로서의 안근(眼根)과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안경(眼境)이 있습니다.
이들 두 가지 현상이 부딪칠 때 안식(眼識)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안식의 일어남이 있을 뿐, 거기에 나는 없습니다.
대상을 보는 나는 없습니다.

눈이라는 물질과 대상이라는 물질과 그것을 아는 마음에는
단지 원인과 결과, 조건만 있지, 내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기관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각기관이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내가 본다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 너, 우리, 그녀, 그 사람, 이런 것들은 없습니다.
이처럼 보는 자가 없는 것은 여기에 조건, 원인과 결과만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나 보이는 대상 안에 나, 혹은 그녀가 없다는 것은
수행을 통해서 실재하는 느낌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라고 아는 마음은 다만 인식일 뿐,
그 인식이 나, 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나, 너라는 것은 명칭에 불과하고,
이것을 뛰어넘는 지혜가 나려면,
모든 것들은 원인과 결과, 조건이라고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을 볼 때는 보는 인격체가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조건으로 성숙되어서 보는 것이므로
나, 너,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고 알아야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눈은 물질이라는 대상이 있어서 빛에 의해서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어떤 것도 개입되지 않습니다.
눈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대상이 없어도 볼 수가 없습니다.
빛이 없어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마음이 없어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네 가지 조건을 원인과 결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조건에 의해서 태어나고
조건에 의해서 죽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 보이는 대상인 물질, 그리고 안식의 결합이 접촉을 일으키고,
이러한 접촉을 원인으로 하여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때 느낄 때에도 그 느낌을 느끼는 ‘나’는 없습니다.
단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괴로운 것은
나의 느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나의 느낌이라고 알기 때문에
이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渴愛)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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