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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세존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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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885회 작성일 13-11-07 12:27

본문

1. 샤아캬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
 

석가가 샤아캬족 출신의 성자(聖者)라는데 대해서는 오래된 경전이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왕사성(인도말로 라아쟈그리하)의 빔비사라아왕(頻婆娑羅王)이 출가한 태자에게 "어디 분이십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태자는 "히말라야산 기슭에 있는 나라의 사람인데, 씨(氏)로 말하면 아딧챠(?dicca)고, 성(姓)으로 말하면 사야캬(Sakya)족의 사람이노라"고 하였다 한다. (숫타니파아타 384-5면) 이 족속(族屬)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샤아캬(??kya), 사캬(Sakya), 사아캬(S?kya), 삭카아(Sakk?) 등의 인도음(印度音)이 있고, 그것을 중국에서는 석가(釋迦)라고 음사(音寫)했던 것이다. 이 종족은 히말라야산(山)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의 네팔 남쪽 국경에 나라를 세우고 있었다. 이 종족은 인도 아리얀 계통의 한 지족(支族)이었던 모양인데, 한편에서는 아리안이 아니라 스키타이족(族)에 속하는 것이라는 설(說)도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은 영국의 역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였는데, 아직 이에 대해서는 가부(可否)를 결정할 만큼 충분한 증거가 박약한 형편이다. 그러나 설사 인종적으로는 몽고 계통이었다 할지라도, 문화적으로는 다분히 인도 아리안적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불경(佛經)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샤아캬족은 자기에 종족의 계보(系譜)를 무척 자랑하고 있는데, 그러한 계보에 관한 신화(神話)를 믿는다면, 샤아캬족은 아리안이어야 하는 것이다. 석가를 앙기랏사(??girassa, 신 또는 옛날 선인(仙人)의 이름인데, 사지(四肢)에서 빛을 발한다는 뜻이 있다)라고 불렀던 사실이 경전에 나타나 있고, 또 그 씨족의 이름이 아아딧챠(?dicca, 태양을 의미한다)였던 것을 관련 지워 생각해 보면, 샤아캬족은 아리안인(人)들 중의 태양씨족(太陽氏族, 수우리야 밤사)임을 자부(自負)했던 사실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아리안족의 태양 씨족은 간지스강 북안(北岸)에 위치해 있었고, 달 씨족(月種系)이 그 남안(南岸)을 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으므로 위의 추측은 있음직한 일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이크슈바아쿠(漢譯, 甘蔗王)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아리안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인데, 그에게는 사남오녀(四男五女)가 있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젊은 왕비가 왕자를 낳자, 이 왕비는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싶은 생각으로 왕의 환심(歡心)을 사서, 그 네 왕자를 국외(國外)로 추방(追放)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네 왕자들은 다섯 왕녀(王女)들과 함께 북쪽 히말라야산 기슭까지 가서, 카필라(迦緋羅)라는 선인(仙人)이 수도하고 있던 근처에까지 가서 정착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혈통을 존중하는 생각에서 장녀를 어머니로 삼고, 사왕자(四王子), 사왕녀(四王女)가 서로 혼인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크슈바아쿠왕(王)은 뒤에 왕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잘 시작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잘 했다'는 뜻을 가진 '샤아카' 또는 '사아카'란 말이 이 네 왕자의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서울이 카필라 선인의 암자(庵子)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 서울을 카필라바스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설은 {장아함(長阿含)} 제20경 <아마주경(阿摩晝經)>을 비롯해서 불전(佛傳) 관계의 경전에서는 거의 다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실여부는 아직 해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하여튼 샤아캬족은 스스로 이웃 나라 코살라(?薩羅)나 마가다(摩褐陀) 등에 비해 오랜 전통 있는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진 왕국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2. 샤아카족의 정체(政體)와 도시(都市)
 

샤아카족의 나라는 전 인구 백만 정도의 작은 나라였다. 이 종족의 일부는 로히니강을 사이에 두고, 딴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콜리야(拘利)족이라고 부른다. 샤아캬족은 서울을 카필라성(城)에 두었었고, 이 콜리야족은 그들의 서울을 천비성(天臂城)이라고 했다. 이 두 종족 사이에서는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샤아카족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귀족적(貴族的) 공화정체(共和正體)고, 소수의 지배계급의 합의(合議)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불전(佛典)에 공회당(公會堂)의 건설 및 낙성식(落成式) 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사정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정세는 점차 강력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대두되는 기운이 농후하였다. 석가 당시에는 이미 네 개의 대전제왕국(大專制王國)이 그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가다왕국은 빔비사라왕의 영도 아래 앙가(鴦伽, A?ga)를 비롯한 밧지(跋耆), 말라(末羅, Mall?)의 군소국가(群小國家)를 정복해 가는 기세였으며, 코살라 왕국은 카시(迦尸)국을 점령하고, 샤아캬족의 나라를 보호령(保護領)으로 하고 있었다. 샤아캬족은 그러한 상태에서 마가다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은 덕택에 간신히 평화를 유지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 마가다와 코살라, 두 나라 외에 두 강국(强國)은 우전왕(于顚王, Udy?na) 치하의 방사(跋蹉)국과 챤다 팟죠오타왕(王) 치하의 아반티(阿盤提)국이었다. 석가의 말 가운데에 "정복하고 정복당하고, 그런 일없이 나라를 다스려 갈 수는 없는 일일까?"라는 것이 있는데, 이 말로 미루어 당시의 사회는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콜리야족의 기원에 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샤아캬족의 조상(祖上)이 된 사왕자(四王子), 오왕녀(五王女) 중 제1위의 왕녀이름을 피야아(숫다아 공주라고 한 곳도 있다)라고 하는데, 나병(癩病)을 앓고 혼자 쓸쓸히 살고 있던 테에, 같은 병을 앓고 있던 베나레스의 왕 라마가 유랑(流浪)해와 서로 도우면서 같이 살게 된 것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그 때 이곳에는 호랑이가 많고 그 해(害)가 심했으므로 이 호랑이들을 막기 위해, 대추나무(콜라 나무)를 쭉 줄지어 심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추나무의 마을이라고 하여 그 종족을 콜리야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샤아캬족과 콜리야족이 살던 지대는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으로 로히니강(江)을 비롯해 하천(河川)이 많고, 지미(地味)도 비옥(肥沃)하고, 목축(牧畜)에도 적당하여 사람들이 참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석가 일가(一家)의 가문(家門)의 이름을 고타마(喬答摩)라고 했는데, 그 뜻은 '가장 훌륭한 소' 또는 '소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 자'란 의미이므로 이 이름도 역시 샤아캬족이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는 종족이었다는 것을 가리켜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샤아캬족의 나라에 관해서 후대(後代)의 중국 순례승(巡禮僧) 현장(玄濱)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며, 농사를 짓되, (적당한) 시기에 파종(播種)을 한다. 사계(四季)의 운행(運行)은 규칙적이며 (주민의) 풍속은 화창(和暢)하다.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석가 당시에도 논농사를 지을 줄 알고 있었다. 석가의 부왕(父王)의 이름을 숫도다나(깨끗한 쌀밥, 淨飯)라고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그 사정은 짐작이 간다.
 

카필라바스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샤아캬족의 서울이다. 슈라아바스티(舍衛城)에서 동남쪽으로 약 5, 60리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때로는 카필라푸라(迦維羅弗羅)라고 적혀 있고, 또 카필라흐바야라고 한 곳도 있다. 모두 카필라 선인(仙人)과 관련 지워서 말한 이름이다. 그러나 이 카필라 선인은 전설적 인물이지 그 역사성을 알 수는 없다. 카필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한두 개가 아니고, 또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느 설명이 꼭 맞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여튼 카필라성(城) 근처에는 '로히니'라는 강이 흐르고 있은 것은 사실이며, 이 로히니라는 이름이 '빨갛다'(로히타)는 인도 말과 비슷하므로 그 강물이 빨갛다는 등의 설명이 있으나 그것은 말의 수식상(修飾上) 그렇게 이야기한 정도로 알아두어야 될 것이다. 이 도시의 성 밖에 니그롯다라마(尼拘律陀園)와 마하바나(大林)란 숲이 있었다. 이곳은 석가가 나중에 즐겨 머무른 곳이다.
 

학자들은 이 서울을 현재 네팔의 탈라이 지방의 틸라우아 콧(Tilau? Kot)으로 비정(比定)하고 있다.
 
 
 
3. 석가(釋迦)의 탄생(誕生)
 

석가의 아버지를 숫도다나(淨飯王)라고 한다. 그는 샤아캬족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 부왕(父王) 즉 석가의 할아버지를 신하라누(師子頰王)라고 한다. 경전(經典)에서는 숫도다나를 왕(王)이라고 부르기는 하나, 결코 대왕(大王)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아마 이 지방의 지배자(支配者)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대국(大國)의 왕(王)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반대왕(淨飯大王)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후세(後世) 사람들이 그를 이상화(理想化)한 데서 생긴 호칭(呼稱)인 것 같다.
 

어머니의 이름을 마야 부인(摩耶夫人)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같은 샤아캬족의 한 별계(別系)인 콜리야족의 공주였던 것이 틀림없다. 때로는 마하마야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존칭(尊稱)일 것이다.
 

정반왕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석가를 낳은 것은 아마 왕이 마흔을 넘었을 때의 일인 것 같다. 석가의 탄생이 이 가문의 얼마나 큰 경사(慶事)였을까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마야부인이 임신을 했을 때 흰 코끼리가 배속으로 들어가는 길징(吉徵)의 꿈을 꾸었다는 등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마야부인은 임기가 차서 고향인 천비성(天臂城)으로 돌아가는 도중 룸비니라는 꽃동산에 이르러, 갑자기 산기(産氣)가 있어 사방에 만막(?幕)을 둘렀다. 부인이 꽃이 만발한 무우수(無憂樹)의 가지를 쥐려고 하는 순간에 아기를 해산(解産)했다고 한다.
 
 
 
4. 룸비니
 

석가의 탄생지가 룸비니인 것은 여러 가지 사실이 확실하게 증거 함으로 틀림없는 사실로 판명되었다. 오랜 시구(詩句)에는 석가가 "샤아캬족의 마을 룸비니의 지방에서" 태어났다고 쓰고 있다. 또 지금 바스티 지방의 둘하 동북방 8킬로미터로 네팔 국경에 가까운 곳에는 파다리아라는 마을이 있고, 거기에 룸민디라는 사원이 있다. 그곳을 발굴한 결과 한 석주(石柱)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석가가 죽은 뒤 백 년 후에 그곳을 순례한 아쇼카왕이 세운 것이 틀림없음이 판명되었다. 그 비문(碑文)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신들로부터 사랑 받는 온용(溫容)있는 왕(아쇼카)은, 즉위 관정(灌頂) 후 20년에 스스로 여기에 와서 제사를 드렸다. 여기서 붓다 샤아캬무니가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담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게 했다. 세존께서 여기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고, 또 (생산의) 팔 분의 일만을 지불하게 된다.
 

다소 편찬시대가 내려가는 경전들 속에서 우리는 룸비니로 순례(巡禮)하는 것을 권장하는 말들을 볼 수 있는데 아쇼카왕도 고승(高僧) 우파굽타의 권고(勸告)로 이곳을 찾은 것이라고 전설은 말하고 있다.
 

중국 당(唐)나라의 현장(玄濱)도 이곳을 찾았는데 그는 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안에 이렇게 쓰고 있다.
 

전천(箭泉)의 동북으로 8, 90리를 가면 룸비니 숲에 다다른다. 샤아캬족의 연못이 있다. 맑고 깨끗하기 거울과 같으며, 여러 가지 화초가 만발해 있다. 그 북으로 스물 다섯 걸음쯤 가면, 무화(無憂華)나무가 있는데, 지금은 말라죽어 있다. 보살(미래의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다. …… 사천왕(四天王)이 받드는 태자의 탑 옆 멀지 않은 곳에 큰 석주(石柱)가 있는데, 그 위에 말의 상(像)을 만들어 놓았다. 무왕(無憂王, 즉 아쇼카왕)이 세운 것이다. 뒤에 악용(惡用)의 벽력(霹靂) 때문에 그 기둥의 중간이 부러져 땅에 넘어져 있다.
 

이 아쇼카왕의 석주가 발견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휴우레르씨(氏)에 의해서다.
 
 
 
5. 탄생 연대
 

석가의 탄생 연대에 관해서는 아직 확실히 단정할만한 연대 확정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자료들 사이에 공통된 사실은 석가가 80년 동안 생존해 있었다는 것인데, 그 연대 산출(算出)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근거 자료가 되고 있는 것은 아쇼카왕의 즉위연대다. 아쇼카왕의 즉위연대는 물적 증거로 남은 그 비명(碑銘)의 검토로써 대개 서력기원 전 268, 267년으로 추정(推定)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중에는 석가의 열반(入滅이라고도 한다)이 아쇼카왕 즉위 전 218년이라는 설과, 100년이라는 설의 두 가지로 나눈다. 전자에 속하는 문헌에는 <디이파밤사>(島史) <마하아밤사>(大史) <선견율(善見律)>(梵本) 등이 있고, 후자에 속하는 문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잡아함경(雜阿含經)> <아육왕전(阿育王傳)> <승가라찰소집경(僧伽羅刹所集經)> <중경찬집비유(衆經撰雜譬喩)> <현우경(賢愚經)>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 <대지도론(大智度論)> 그 밖에 몇몇 산스크리트 경전이 있다.
 

전자에 의하면 불멸(佛滅) 연대는 서기 전 486년이 되고 후자에 의하면 불멸 연대가 서기 전 368년이 된다. 따라서 전자에 의하면 석가 탄생 연대가 566년이 되고, 또 후자에 의하면 석가 탄생 연대가 448년이 되는 셈이다. 최근 1956년에서 1957년에 걸쳐서 실론(스리랑카), 타일랜드(태국), 버어마(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 남방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석존 2500년 기념식전을 성대히 거행한 바 있다. 그것은 남방불교의 전설에 따라 석존의 입멸(入滅)을 서기전 543년으로 잡고, 그 입멸 2500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연대는 서양이나 인도의 역사가들로부터는 한결같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아쇼카왕 즉위의 사실과 많은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인도승(僧) 상가바드라는 서기 489년 경 중국 광동(廣東)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때까지 그가 서사본(書寫本) 위에다 찍어 온 석존 열반 후의 햇수를 기록한 점(店)이 975년에 달했다 한다. 이것에 기초해서 석존 입멸의 시기를 환산하면 불멸(佛滅) 연대가 서기 전 486년이 된다. 이 서사본을 <중성점기(衆聖點記)>라고 하며, 일본의 불교학 개척자 다까구스 쥰지로오(高楠順次郞)는 이에 근거하여 석가의 탄생 연대를 서기 전 566년으로 정했다. 이것은 앞서 말한 파알리어(語) 경전들의 연대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각기 여러 가지 자료들을 검토하고 불멸(佛滅) 연대에 관하여 서기 전 544년, 484년, 483년, 482년, 478년 477년, 388년, 386년, 383년, 380년, 370년, 368년 등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독특한 전통적 견지를 지켜 금년(1965년)에 불탄(佛誕) 2991년 축제(祝祭)를 지냈다. 이와 같은 계산법에 의하면 불탄(佛誕) 연대는 서기 전 1026년이 된다.
 
 
 
6. 탄생(誕生)에 관한 옛 전설(傳說)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경전 <숫타니파아타>에 의하면 석가는 '투시타'천(兜率天, 기쁨의 천상계)에서 내려와 마야부인의 태중에 잉태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존자(尊者, 부처님의 제자를 존칭해서 하는 말), 사아리풋타(舍利弗)는 말했다. 그와 같이 말씀이 아름답고, 뭇 사람들의 주(主)이신 스승이 투시타천에서부터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나는 일찍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이 경전은 내려오신 석가를 보디삿타(파알리語, 산스크리트語로는 보딧사트바, 菩薩이라고 음역,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자라는 뜻)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보디삿타는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코끼리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석가가 탄생하자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은 이 어린 태자(太子)의 장래에 관한 예언(豫言)을 하였는데, 이 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즐거이, 깨끗한 옷을 입은 서른 명(서른 셋이어야 함)의 신(神)들이 옷을 붙잡고, 공손히 제석천(帝釋天)을 극구 찬양하고 있는 모습을 아시타 선인(仙人)은 식후(食後)의 휴식 중에 보았다.
 

기쁨에 뛰노는 신들을 보고 선인은 공손히 이렇게 물었다.
 

"신들께서 몹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째서 옷을 붙잡고, 흔들며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아수라(阿修羅)와의 싸움이 있어 신들이 이기고 아수라가 졌다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기뻐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희귀(稀貴)한 일을 보시고 신들은 (그렇게) 기뻐하시는 겁니까? (중략)
 

이에 대하여 신들은 대답해 말했다.
 

"비할 수 없이 훌륭한 보배이신 그 보디삿타가 모든 사람의 이익안락(利益安樂)을 위해 인간세계에 태어나신 겁니다. 샤아캬족의 마을에, 룸비니의 지방에, 그래서 우리는 만족하고,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衆生, 생명 있는 모든 것)의 가장 윗자리에 계신 분, 가장 높으신 분, 황소와 같으신 분, 살아있는 모든 것 중의 훌륭하신 분은 머지 않아 선인(仙人의 집합소)이라는 이름의 숲에서 법륜(法輪)을 돌리실 겁니다. -- 사나운 사자(獅子)가 백 가지 야수(野獸)를 물리치고 으르렁대는 것과 같이."
 

선인은 (신들의) 그 소리를 듣고 급히 (인간세계로) 내려왔다. 그때 정반왕(淨飯王)의 궁전에 가까이 가 거기에 앉아서 선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자가 어디 계십니까? 저도 뵈옵기를 원하옵니다."
 

그래서 여러 샤아캬족 사람들은 재간 좋은 대장장이가 용로(鎔爐)에서 단련한 황금(黃金)과 같이 빛나고, 행복한 빛을 발하는 귀한 얼굴을 가진 아기를 아시타 선인에게 보여주었다.
 

화염(火炎)과 같이 빛나고, 하늘을 가는 별들의 왕(달)과 같이 맑고, 그름 찬점 없는 가을 하늘의 태양처럼 빛나는 아기를 보고, 저절로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신들은 많은 살로 바쳐진, 그리고 천 개나 되는 원륜(圓輪)이 있는 산개(傘蓋)를 공중에 바쳤다. 그리고 또 황금의 손잡이로 된 불자(拂子)로써 아래위로 부채질을 하였다. 그러나 불자나 산개를 붙들고 있는 신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칸하시리'란 결발(結髮)의 선인은, 머리 위로 흰 양산이 덮여 있어 마치 불그스레한 모포(毛布) 속에 있는 황금의 장신구(裝身具)와도 같은 이 아기를 그냥 기쁨에 넘쳐 안았다.
 

상호(相好, 훌륭한 얼굴 특징)와 신주(神呪)에 통요(通曜)한 그 선인은 샤아캬족의 황소처럼 (훌륭한 아기를) 받아 안고, (인상을) 보더니 마음으로부터 환성(歡聲)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비할 바 없이 높으신 분입니다. 사람 중에 제일 높으신 분입니다."
 

그 때에 선인은 자기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며, 슬픈 마음이 생겨 눈물을 흘렸다. 선인이 우는 것을 보자 샤아캬족의 사람은 말했다.
 

"우리 왕자님께 무슨 지장(支障)이 있는 것일까요?"
 

샤아캬족이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본 선인은 말했다.
 

"저는 왕자님께 불길(不吉)한 상(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님께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이 분은 범용(凡庸)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의시켜 주십시오.
 

이 왕자님은 정각(正覺, 부처님이 되는 것)의 절정(絶頂)에 이를 것입니다. 이 분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한 청정(淸淨)을 보시고,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들을) 불쌍히 생각하는 까닭에 법륜(法輪, 진리의 수레바퀴)을 돌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뜻과 행동이 널리 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제 여명(餘命)은 길지 않습니다. 중도(中途)에 저에게 죽음이 찾아 올 겁니다. 저는 이 비할 바 없이 강한 힘을 가진 분의 교법(敎法)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스스로 한탄(恨歎)하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 청정행(淸淨行)의 소유자(아시타 선인)은 샤아카족에게 커다란 기쁨을 불러일으키고 궁정(宮廷)에서 물러갔다.
 

그는 자기의 조카(나아라카 또는 나라닷타)를 불쌍히 여겨 이 무비(無比)의 힘있는 분의 교법(敎法)에 따를 것을 종용(慫慂)하였다.
 

"만일 네가 나중에 '부처님이 있어, 정각(正覺)을 이룩하고 진리의 길을 걷고 계시다' 이런 소리를 듣거든, 그때 거기에 가서 그의 가르침을 받고, 그 세존 밑에서 청정행(淸淨行)을 행하라."
 

이 이야기에도 적지 않은 신화적 수식이 있기는 하나 후세의 불전(佛傳)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극단적인 분식(粉飾)은 없다. 일본의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는 그런 관점에서 <숫타니파아타>의 이 전설이 후대의 불전(佛傳)에 보이는 많은 전설의 원형(原型)이거나 선구(先驅)가 되는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후세의 전설들에 의하면 특히 한역 경전들에 의하면 태자가 탄생하자, 많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손으로 태자를 받들었다고 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두 줄기의 온수(溫水)가 쏟아져 태자의 몸을 씻어드렸고, 그러자 태자는 선뜻 대지(大地)에 일어서서 사방(四方)을 둘러보며,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내디디고서 오른 손으로는 위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사자후(獅子吼)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말귀가 이른바 '탄생게(誕生偈)'라는 것으로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있으므로 갑자기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라도 상징(象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류의 스승 석가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흠모(欽慕)의 정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전설에는 태자의 장래에 관한 점복(占卜)에 있어서도, 두 가지 복상(卜相)을 드는 일이 있다. 이 갓난 태자가 곡 부처님이 되리라 하는 것은 앞서 인용한 <숫타니파아타>의 설이고, 또 하나는 왕자가 속세(俗世)에 그대로 머무른다면, 전륜왕(轉輪王, 강력한 대군주)이 될 것이고, 출가(出家)한다면 부처님이 될 것이란 설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와 같은 예언이 다분히 후세의 착색(着色)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로는 '붓다' 즉 '각자(覺者)'란 개념이 석가의 성도(成道) 전에 어떻게 알려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예언(觀相豫言)이란 사실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구체적이었을가 하는 것은 의문으로 남는 셈이다.
 

위에 언급한 것과 다른 다음과 같은 몇몇 이설(異說)이 있다. 보디삿타가 육아(六牙)의 흰 코끼리 모양으로 어머니 태중에 들어왔다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흰 코끼리가 아니라 여섯 달 된 유아의 모습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고, 또 보디삿타가 태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보석함(寶石函) 속에 들어 있었고, 연꽃 속에서 생긴 선약(仙藥)의 물방울로 키워졌는데 이 선약의 물방울은 범천(梵天) 자신이 받아서 주었다는 것이다. 또 불전(佛傳)에 따라서는 열 달 동안 계속된 잉태 기간 중 어머니 마야 부인에게는 도덕적으로나 육신상으로나 일체의 결함이 없었고, 따라서 부정(不淨)한 욕정(欲情)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리고 석가가 탄생한 바로 그 날, 보디삿타의 미래의 배필(配匹)과 미래의 마부(馬夫), 미래에 그가 쓸 말, 그리고 그와 동시대인(同時代人)인 많은 왕들이 똑같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관상예언을 한 선인의 이름은 다른 파알리어(語) 경전에서는 '카알라데발라'라고 하고 있어 그 점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해명이 필요하다.
 

태자가 탄생한지 닷새만에 그 아버지는 싯다르타(悉達多)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 뜻은 '목적을 달성한' '일체의 의(義), 미덕(美德), 성격(性格)이 성취된'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원시경전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후대 사람의 가탁(假託)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어 볼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다른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 전설을 부정할만한 적극적인 자료도 적은 것이다.
 

또 후세의 불전(佛傳)에 의하면 그의 생모(生母) 마야 부인은 산후(産後) 이레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도 원시경전에는 적혀 있지 않으므로 확실치는 않으나 다른 부정적인 근거도 없으므로 사실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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