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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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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열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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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474회 작성일 13-11-0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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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 |추천 0 |2008.05.24. 18:17 http://cafe.daum.net/chungyoungsa/5dpJ/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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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걸어도 그대 세상 끝에 이를 수 없으니
그대 거기 이를 수 없기에 고(苦)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
그러나
지혜가 깊고 세상을 바로 보는 이
진실로 그 끝을 보도다
청정한 삶을 살아온 이
평온한 마음으로
윤회의 끝남을 알게 되리
이 세상도 저 세상도 가려 들지 않으리
 
+++
 
언젠가는 대양이 메말라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날이 오고
이 거대한 대지도 불에 타 사그라져 흔적이 없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무명의 족쇄에 묶이고 갈애의 덫에 잡혀서 윤회를 서두르고
재촉하는 존재들의 고(苦)에는 끝이 없으리라
 
{상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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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론섬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연기되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나니. 그처럼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연기되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과 같은 어떤 상태가 없다면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연기되고, 형성된 것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실로 이처럼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연기되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과 같은 어떤 상태가 있기에 태어났고, 만들어졌고, 시작된 것이며 형성된 것으로부터의 탈출이 진실로 있는 것이다. (감흥어(Udana) 중에서) 
 
불교의 절대적인 진리는 말이나 글로 표현되고 씌여지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사유하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苦 를 벗어난다는 것은 윤회를 멈춘다는 것이며 윤회를 멈춘다는 것은 열반 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윤회가 있느냐 없느냐 또는 열반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논쟁은 한마디로 말씀드려서 대꾸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불교라는 이름하에서 붓다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논쟁이 논쟁의 가치가 없는것과 조금도 다름 없습니다. 
 
무명에 휩싸여 있는 우리 중생들이 윤회니 열반이니 인과의 법칙이니 하는 것을 완벽하게 알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합니다. 10무기를 굳이 예를 들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거북이와 물고기처럼 .. 물고기에게 육지의 이야기는 절대로 이해가 안되는 것 입니다. 그것은 물고기가 가지고 있는 이해의 영역밖에 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진리를 제대로 볼려면 불혜(불교적인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나.  
 
 또한 윤회를 하게 하는 조건지워짐의 12연기는 흔히들 둥그런 원으로 표현을 합니다. 원은 처음도 끝도 없습니다. 인과의 논리 속에는 그 어떤 원인도 그 이전 원인의 결과로 보기 때문에 절대적 시초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멈추는 곳이 어디인가 하고 물으면 바로 시작된 그곳에서 멈추게 된다고 대답을 하게 됩니다. 
 
사념처수행이나 위파사나 수행은 분명코 붓다의 오리지널 음성이며 가르침 입니다. 그리고 사성제란 고를 벗어나 윤회를 멈추고 열반에 드는 올바른 가르침 입니다. 윤회가 있다 없다 또는 열반이 있다 없다라는 논쟁은 우리같은 무명에 휩쌓여 있는 존재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아무리 물밖의 이야기를 물고기에 해주어도 물고기가 가지고 있는 이해력의 한계로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진리를 제대로 볼려면 불혜(불교적인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사물을 올바르게 볼수 있는 지혜를 증장하는게 최우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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