붇다의 위대한 가르침 계율 (근본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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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가나 사회는 그 사회의 성격에 적합한 도덕적 행위이라고 생각되는 규범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규범들은 그 사회의 이익과 법률에 관련을 가지고 있다. 행위가 법률을 위반하지 않고 일반사람들이나 개인의 감정을 어기지 않으면 정당하다고 인정된다.
사람이 만든 규범은 탄력성이 있고 환경변화에 맞도록 때때로 수정한다. 이러한 인위적인 기준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도덕적 원리로서의 믿을만한 지침이 될 수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불교의 도덕률은 인간이 제정한 것이 아니다. 또한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인도적 규범이 된 부족공동체의 윤리도 아니다. 그것은 카르마의 인과율이라는 보편적인 법칙에 기초하고 있고 자타에 영향을 주는 행위와 관련된 '선' 과 '악'을 고려하고 있다. 행위가 비록 자신에게 유익할지라도 남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면 선행으로 인정되지 못한다.
불교의 도덕률은 아주 평범한 그러나 준엄한 질문을 한다. 행위가 선하고 착한 것을 어떻게 판단 할 것인가? 불교에 의하면 대답은 간단하다. 행위의 질은 행위가 시발된 생각이나 의도(detana)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탐욕, 증오, 망상으로 행위가 이루어졌다면 그 행위는 악행으로 인정된다.
반면 사랑과 자비, 지혜로 이루어진 행위라면 이 행위는 선행이 된다. 탐욕, 증오, 망상은 '악의 세 뿌리(三毒)' 라고 알려지고 있으며 사랑,자비,지혜는 '선의 세 뿌리'로 알려져 있다.
뿌리는 행동이 원천인 의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저지른 행위를 아무리 위장하여도 행위를 일어나게 한 생각을 조사하면 진실은 밝혀진다. 그래서 마음은 말과 행위의 근원이다.
불교에서 우선적으로 첫째 해야 할 일은 탐욕과 증오, 무지로 더렵혀진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이 이유는 신성한 존재를 즐겁게 할 생각이나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도 지혜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버릇없는 행동을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에 불과하다.
불교도는 분별과 지혜로서 행동을 한다. 불교도는 선행으로 정신적 성장의 기초가 되고 해탈로 인도 되는 도덕적 우월성을 함양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선행을 한다. 나아가 자기의 행복과 불행은 카르마의 법칙의 작용을 통하여 자기가 만든 것임을 알며 생활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문제를 감소하려고 악행을 피한다.
선행이 평화와 행복을 가져옴을 알기에 이를 실천한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고 또 행복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므로 선행을 하며 악행을 피하는 모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아가 반사회적 행동의 근원인 정신의 더러움을 뿌리 뽑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이익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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