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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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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에 관한 흥미로운 주제 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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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374회 작성일 13-09-0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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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선정중심 수행체계 비판 
 
집중을 통해 선정을 이루어 세상을 초월하려는 선정수행은 인도의 수행법에 바탕을 둔 것으로 사유를 통해 지혜를 계발하는 불교의 수행법과는 크게 구별되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불교수행법과 인도수행법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돌이켜 보고자 한다. 인도의 수행은 사선팔정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이를 살펴보면. 제1선부터 제4선 까지를 색계선정이라 한다. 색계선정이라 칭하는 이유는 이 선정에는 나도 보이고 사물도 보이기 때문이다. 즉 무색계선정인 제5선부터 제8선까지의 선정에서는 나도 보이지 않고 사물도 보이지 않는 것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색계라는 명칭부터 살펴보면, 색이라는 것은 사물이다,
 
즉 사물이 보인다는 듯이다. 이는 무색계에서는 사물이 보이지 않는 것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둘의 명확한 구분을 위해서 사물이 보이는 색계와 사물이 보이지 않는 무색계로 나누다 보니까 이러한 용어들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 색계선정을 살펴보자, 이선정은 무색계선정 보다 낮은 선정에 속한다,
 
독서삼매와 같이 하나의 대상에 깊이 몰두하다 보면 주위의 소리도 듣지 못하고, 또는 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눈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잘 인식하지 못하듯이, 하나의 세상에 깊이 몰입된 상태로서, 이 선정에서는 천상의 세계도 볼 수 있고 영혼도 볼 수 있으며 신통도 생겨,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 지, 볼 수도 있고, 또 타심통 등이 생겨 사람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알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선정에서는 사람과 사물과, ‘나’도 보이고 또 나의 생각도 느껴진다, 그래서 사물과 마음이 모두 나타난다고 해서 색계선정이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무엇이냐 하면, 욕계라 한다, 욕심을 가지고 사는 세계이므로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욕계선정이란 단어는 없다. 왜냐하면 일단 선정에 들면 특별한 정신세계가 되기 때문에 욕계인 현재 우리의 의식세계와는 다른 차원이 되므로, 비록 욕계에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선정에 들 땐 그곳에 나타나는 세계는 색계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엔 무색계선정을 말해보자, 제5선이 공무변처정이고 제6선정이 식무변처정이요 제7선정이 무소유처정이고 제8선정이 비상비비상처정이다. 무색계의 첫 번째가 제5공무변처정인데 이 선정에 들면, 첫째 몸이 사라지고 둘째 대상이 사라진다. 그래서 모든 것이 텅 비어 끝없는 허공만 펼쳐진다,
 
그래서 명칭이 허공이 끝없이 펼쳐진다는 뜻의 공무변처정이다. 이 상태에서는 ‘나’가 없기 때문에 기준 할 기준대가 사라진다, 사물의 거리를 계산 할 때 첫째 기준대가 있어야, 그 기준대로부터 앞에 있는 대상까지 거리를 계산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준이 될 기준대가 없어지면 나와 상대와의 거리를 잴 수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선정에선 ‘나’ 라는 기준대가 없어지면 나와 상대와의 거리를 잴 수가 없다. 그처럼 이 선정에선 ‘나’라는 기준대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나’로부터 앞에 있는 사물까지의 거리를 잴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사라진다. 전, 후, 좌, 우, 상, 하의 개념이 사라진다.
 
보통 앞과 뒤를 볼 때 앞은 잘 보이지만 뒤를 보려고 하면 뒤가 잘 안 보인다. 그것은 습관적으로 앞만 봐 왔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있으면 눈알로 사물을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뒤가 불편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눈을 감아도 뒤가 잘 안 보인다. 그 이유는 앞만 봐 왔던 습관이 남아서 그렇다. 그러나 이 선정에 들면 뒤가 앞처럼 잘 보인다. 뒤를 볼 때 고개를 뒤로 돌리지 않아도 저절로 뒤에 눈이 있는 것처럼 앞을 보듯이 뒤도 동시에 보인다. 평소에는 절대 이렇게 될 수 없지만, 이 선정에선 이것이 자연스럽게 된다. 그러니까 통으로 전체가 하나로 보인다.
 
그 다음은 제6선정인 식무변처정이다. 이 선정의 특징은 의식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의식이 무변하다고 말 하는 것이다. 이 뜻은 앞의 제5공무변처정에서 펼쳐졌던 허공이 끝없는 이 상태를 의식이 바라보는 형태다, 그러니까 텅 빈 끝없는 허공을 의식하는 이 의식이, 이 텅 빈 허공을 바라보고는 이것이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 텅 빈 우주 보다 더 넓다는 뜻이다. 즉 우주만큼 넓은 이 허공자체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 의식은 당연히 그 허공보다 더 넓은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이 의식을 식무변처정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식이 곧 우주의식 이라고 여긴다. 여태까지 자신의 의식은 이 몸 안에 갇혀 있는 작은 의식이라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것을 경험하면서, 나의 의식이 우주만큼 크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라는 이 몸과 마음을 고집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 몸의 한계를 벗어나서 생각 해 본적이 없다.
 
그래서 항상 이 몸을 기준으로 삼고 세상을 판단하는 습관이 몸에 베여있다, 그러나 이 몸 이라는 좁은 관점을 벗어나면 이 마음은 끝없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제7무소유처정이다. 이 선정에 들면 자기의 소유라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앞의 제5공무변처정과 제6선정을 거치면서 그 텅 빈곳에선 ‘나’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다.
 
여태까진 내 몸이 있다는 생각에서, 나의 소유가 있다고 여겼지만 그것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단계가 제7무소유처정이다. 그 다음은 마지막 선정인 제8비상비비상처정이다. 이 선정은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한다, 제5 제6 제7선정은 비록 시간과 공간의식은 없지만 그래도 제한적이지만 생각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선 생각 자체를 일으킬 수 없다. 단지 의식이 깨어있을 뿐 전혀 생각을 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선정에 들면 시간이 얼마가 흘렀는지 스스로 자각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다음 날 깨어나서야 비로소 내가 여태까지 선정상태에 있었구나, 하고 알 뿐이다,그리고 현실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생각이 일어나고, 그때에야 자신이 여태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사유 해 볼 수가 있는 것이지, 그 선정상태 속에 있을 땐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상태는 숙면일여의 상태가 된다.
 
숙면일여란 깊은 숙면상태에도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다. 사람이 과도하게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깊은 잠속에 빠져있어도 의식이 지나치게 각성되어 있으면 잠속에서도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가 유지된다, 이 상태에서는 비록 의식이 있지만 평상시처럼 생각을 굴리거나 할 수가 없다. 단지 의식이 깨어있을 뿐이다.
 
그래서 제8비상비비상처정 에서는 의식이 깨어 있지만 생각을 굴릴 수 없는 숙면일여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모두 사선팔정의 전체과정이다. 이 선정에 들면 일체가 끊어져있기 때문에 번뇌 자체가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고요하고 편안하며, 은은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선팔정의 모습들이다.  
 
 
(ㄱ) 선정중심 수행체계의 문제들 
 
그러나 이 선정들에는 결점이 있다. 이 선정에 들었을 땐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지만, 일단 여기에서 깨어나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또다시 번뇌가 일어난다는 점이 그것이다.
 
선정 속에 잠겨 있을 땐 일체의 모든 것이 딱 끊어져 있어서 온 우주 삼라만상 자체와 하나가 되는 특이한 상태에 잠겨있지만, 이 상태가 영원히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또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세계는 그 상태가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다시 일어나는 이 번뇌를 감당 할 수 없기 때문에, 또다시 이 선정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수행하기 전에는 번뇌가 일어나면 당연히 싸워서 견디면서 살아왔지만 이젠 그것이 잘 안되다. 너무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를 맛봤기 때문에 오탁악세의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 그래서 점차 은둔자가 되는 것이다. 선정이라는 것은 번뇌의 뿌리를 뽑을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번뇌의 뿌리를 뽑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묻어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번뇌의 뿌리를 제거하려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서 그 원인을 해소시켜야 해방이 온다. 그렇지 않고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단지 한쪽에 밀어놓고, 다른 쪽인 집중을 통해 정신을 몰입하는 방식으로 문제로부터 도망가버리면, 끝내 그 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 이 선정이라는 것이 바로 그와 같다. 마치 풀을 돌로 눌러놓은 것 같다, 비록 지금은 돌에 눌려 꼼짝 않고 죽은 듯이 있지만 언젠가 그 돌을 들어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풀은 파릇파릇 자라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 출가하셔서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제7선정을 터득한 스승이었다. 그 스승으로부터 3일 만에 제7무소유처정을 완전히 터득하고는, 이보다 더 깊은 선정은 없느냐고 물으니, 그 스승이 말하길, 나의 스승님이 계신데 그 분은 제8비상비비상처정을 알고 계신다고 하므로, 그 분이 계시는 곳을 찾아가셨고 그곳에서 또 3일 만에 제8선을 완전히 터득하셨던 것이다.
 
그러자 그 스승이 석가모니의 대단한 능력을 보시고는 감탄하여 말하길 이 선정보다 더 깊은 정신세계는 없다. 이것이 마지막 이라고 말하고는, 그대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나와 함께 교단을 만들어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때 석가모니께선 그 제안을 거절 하셨는데 이 선정에 들었을 땐, 마음이 고요하고 편하지만 이 상태가 끝나고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엄연히 번뇌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에 만족 할 수 없다 하고, 그 스승으로부터 떠나, 육년고행길에 접어든다. 이 번뇌를 해결하기 위해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년고행후 이러한 것들이 결코 올바르지 않은 줄 아시고는 모든 수행을 청산하고 보리수나무 밑에서 오직 사유를 통해, ‘나라는 주체가 없는 줄’ 깨우치신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결국 선정(삼매)만 가지고는 번뇌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석가모니께서 몸소 체험하시고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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