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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세상과 싸우지않는다" 붓다의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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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155회 작성일 12-09-1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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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빠질~”도올 김용옥의 어퍼컷,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붓다의 선언
 
 
 
이 세상은 변화하잖아요?”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오마이뉴스의 오마이TV에서 강의한 것을 인터넷으로 들었는데 모두 귀가 확 트이는 듯한 내용이었다. 도올 선생에 대한 강의는 유튜브에 모두 올려져 있다. 그 중 인상깊었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은 변화하잖아요? 자연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습니까? , 여름, 가을, 겨울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 변화하는 그 모습을 그대로 사랑할 수 없느냐. 왜 기독교는 이 변화를 저주하고 불변의 하나님이라든가 천당이라든가 이념이라든가 이런 불변의 로고스를 사랑한다. 그것이 지금 데리다 같은 사람이 해체주의를 설명하면서 데리다가 로고스엔티리즘이라는 말을 쓰지만 뭐든지 서구적 가치는 이천년동안 항상 그 불변의 센터를 가지고 살아 온 것이어요.  제가 추구 하고 있는 세계라는 것이 동양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세계와 너무 달라. 변화를 왜 저주 하냐는 말이야. 왜 불변의 무엇에 매달려야 하느냐.
 
 
 
도올 선생은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한신대 강의에서 한말이라 한다. 그리고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말하였다.
 
얼어 빠질~”김용옥의 어퍼컷
 
세상은 변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적 가치관 때문이라 한다. 어떤 고정 불변한 것을 가정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강의에서 도올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부간에도 사랑을 할 적에 변하는대로 사랑을 하면 되지 왜 당신이 마음이 변했다고 불변의 마음을 유지해 달라고 왜 쌈박질을 하느냐 이말이야. 변하면 변한대로 쳐다보면 되는 거거덩. 부부사이에서도 기독교식 불변의 사랑을 제발 하지 말라는 거에요.
 
역사를 보는 눈도 변화를 사랑해야 하는데, 모든 불변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말이에요. ‘미국하고 한국의 관계는 이건 불변의 동맹입니다얼어 빠질 불변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래야 되는 겁니다얼어빠질 불변의 민주주의가 어디있냐 이말에요!
 
 
 
 
 
 
 
부부간의 사랑에도 변화가 있다고 말한다. 불변하는 사랑은 없다는 말이다. 한미관계도 마찬가지라 한다. 한번 동맹국이면 영원한 동맹국이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도올 선생은 흥분하여 얼어 빠질 불변이에요!”라고 말하면서 두 손으로 어퍼컷을 치는 듯한 행위를 보여 주었다.
 
항상 절대자를 머리에 놓고 사니까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근원적 문제이에요. 우리가 사고를 서구적 사고라는 것은 우리가 기독교를 받아 들이는 신앙인들이 범하기 쉬운 것들이 항상 절대자를 머리에 놓고 사니까 민주도 절대, 자유도 절대, 사랑도 절대, 모든 것이 절대화 되어 가지고 현실을 못 보는 거에요. 그 기준에 의해서 모든 것을 평가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은 나쁘다그러니까 자연히 보수가 되는 거에요. 기독교인이 되면 다 보수가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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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거부하는 듯한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꼬집어 말한 것이다. 모든 것을 절대자 위주로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사고방식 또한 절대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절대화 하여 생각하는데 그러다 보니 변화를 거부 하게 되고 그 결과 보수화 되었다는 것이다.
 
엔트로피(Entropy) 법칙
 
불교에서는 변화를 받아 들인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인다. 그래서 변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Sabbe sakhārā aniccā)”라고 하였다. 이를 한자어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한다. 무상한 것이 우주의 근본법칙이라는 것이다.
 
이런 법칙은 물리적으로도 이미 증명되었다.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불리우는 엔트로피법칙이 그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닫혀진 계 내에서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잉크방울을 비이커에 떨어 뜨리면 잉크 방울이 골고루 퍼지는 이치와 같다. 이렇게 한번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하면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가역적이라 한다. 시계바늘을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엔트로피법칙은 변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불교의 제행무상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자연의 법칙과 불교의 진리는 잘 들어 맞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불교를 철학 또는 과학이라고도 말한다.
 
존재의 영원성을 부정하는 불교
 
이처럼 철학으로서 또는 과학으로서 불교는 존재의 영원성을 부정한다. 동시에 단멸성 또한 부정한다. 이 세상에 절대 고정 불변의 실체는 있을 수 없고 또한 절대적으로 소멸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모두 배격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어떤 진리를 주장하는가.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성과 단멸성은 모두 부정된다.
 
그런 예를 초기경에서 볼 수 있다.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나 비존재의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 Venerable Kacchānagotta, 상윳따니까야 S12.1.5, 전재성님역)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비존재에 의존한다고 하였다. 이때 존재와 비존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존재는 존재의 영원성을 뜻한다. 어떤 고정 불변하여 영생하는 영혼같은 것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를 아뜨만이라 하였다. 오늘날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영혼과도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를 전면 부정하였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경에서 부처님은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연기법으로 설명된다.
 
자아와 세상이 영원하다고?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생성과 소멸이다. 따라서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끊임없이 무상하게 소멸해 가는 것을 관찰하면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적 상주론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이 무상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영원주의는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영원주의를 신봉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취착, 주착을 통해 얽매여 있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접근하고 취착하고 마음으로 욕구하여 유입되고 잠재되는 것에 다다르지 않고 붙잡지 않고 주착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면 일어난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사라진다'고 의심하지 않고 혼란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에게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지식이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가 생겨난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 Venerable Kacchānagotta, 상윳따니까야 S12.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자아와 세상이 영원하다고 보는 영원주의가 집착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것은 이 몸과 마음이 내 것, 나의 자아라고 보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이다. 그래서 몸과 색, , , , 식 다섯가지로 나누어 내 것, 나의 자아가 없음을 설명하였다.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생각
 
대표적으로 빤짜왁기야경을 들 수 있다. 오온 중 의식에 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의식이 나라면 이 의식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의식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빤짜왁기야경-Pañcavaggiya sutta- The Five –다섯경-무아상경, 상윳따니까야 S21.1.2.1.7, 전재성님역)
 
 
 
 
의식()이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해야 될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나도 모르게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내가 의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물질(), 감수(), 지각(), 형성() 등 어느 것 하나 내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 영원히!”
 
이렇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내것이 아니고 아니고 단지 조건에 따라 연기하는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와 상주론은 거짓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원주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생각한다. 도올 선생의 지적대로 사랑도 변치 않아야 하기 때문에 절대적 사랑을 꿈꾼다. 한번 맺은 동맹관계도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 역시 절대주주의, 영원주의에 기인한다. 이는 결국 변화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이처럼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주의자들은 기득권층이다. 그래서 변화를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불온시 한다. 특히 많이 가진 자들일수록 심하다. “지금 이대로 영원히!”하며 계속 되기를 바리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도들은 창조주를 믿는 영원주의자들로서 기득권세력이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그들이 믿는 영원주의가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연기법으로 부수었다. 그래서 신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준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브라만교도들과 싸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자세로 영원주의를 배격하였을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
 
(뿝파경-Puppha sutta The Flower –, 상윳따니까야 S21.2.5.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진리를 설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자신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아니다' 라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아니다' 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이다' 라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이다'
 
수행승들이여, 왜 세상에서 현자들이 '아니다' 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나도 그것을 '아니다' 라고 말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현자들은 물질에 대하여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 '아니다' 라고 여기는데 나도 그것을 '아니다' 라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현자들은 감수에 대하여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 '아니다' 라고 여기는데 나도 그것을 '아니다' 라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현자들은 지각에 대하여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 '아니다' 라고 여기는데 나도 그것을 '아니다' 라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현자들은 형성에 대하여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 '아니다' 라고 여기는데 나도 그것을 '아니다' 라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현자들은 의식에 대하여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 '아니다' 라고 여기는데 나도 그것을 '아니다' 라고 말한다.
 
(뿝파경-Puppha sutta The Flower –, 상윳따니까야 S21.2.5.2,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세상과 싸우지 않는 이유는 진리를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진리는 현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현자들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우기지 않는다. 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 등이 영원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한 것 일뿐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남을 귀찮게 하거나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은 청한자에게만
 
이렇게 진리를 설해도 여전히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삿된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수행승들이여,
여래가 완전히 깨닫고 현관한 세상에서 세상의 법은 감수이다. 여래는 그것을 완전히 깨닫고 현관하여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정의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천명한다.
 
수행승들이여,
여래가 완전히 깨닫고 현관하여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정의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천명한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고, 어둡고, 눈이 없는 범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뿝파경-Puppha sutta The Flower –, 상윳따니까야 S21.2.5.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현명하게 관찰하여 법을 설하였음도 불구하고 이것을 알아 보지 못하는 범부들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강제로 알려 줄 수 없는 것이다.
 
법은 청한자에게만 설법할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법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법을 설한다면 듣는 이만 피곤할 뿐이다. 이런 현상을 도처에서 본다. 길거리에서 전철에서 예천불지를 외치는 자들이다.
 
중생계(sattaloka)에서
 
진리가 있어도 이를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한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이미 설해져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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