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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를죽이고 부처를 죽이는 물벼락" 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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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674회 작성일 12-08-13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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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한겨레> 뉴스> 사회> 종교> 2010. 2. 5.기사
 
‘나’를 죽이고 ‘부처’를 죽이는 ‘물벼락 독설’
22년째 티베트밀교 수행 청전 스님
신부(神父) 수업하다가 출가…달라이라마를 스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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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만난 것은 6~7년 전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가 머물고 있는 히말라야 산간도시 다람살라의 한 골방에서였다. 신문사를 1년 쉬고 히말라야와 인도 천하를 주유하던 그해 10월께였다. 마날리에서 라닥으로 넘어가려다 길이 얼어 도로가 폐쇄됐다고 해 오도가도 못한 채 망연자실해있다가 폐쇄 직전 라닥을 빠져나오던 한 스님을 만났다. 그와 다람살라까지 동행했다가 만난 이가 바로 청전 스님이었다.
 
한 번 안된다면 안되는 그가 어쩐지 동행을 허락했다
 
달라이라마의 지도로 15년째 수행중이던 청전 스님의 빼빼 마른 몸에선 청정한 기운이 돌았다. 하지만 마른 체구가 여간 깐깐해 보이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다람살라에 머물며 몇 차례 그의 방을 찾게 되었다. 그는 두 노승과 함께 살고 있었다. 라닥에 있는 티베트사찰 스님들이었는데, 난방시설조차 없이 노승들이 라닥의 혹한을 견디기쉽지 않기에 그나마 여건이 좀 나은 다람살라로 모셔와 인근에 방을 하나 얻어 모시고 있었다.
 
스님은 며칠 뒤 그 노승들을 모시고, 히마첼주 오지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지프차 하나를 빌려서가는데, 이미 운전수를 포함해 정원은 차있었다. 가보고 싶던 라닥행이 좌절된 터라 라닥 못지 않은 오지인 히마첼 여행길에 동행하고 싶었다. 그런 오지는 차편도 거의 없어 안내자나 지프차가 없이는 홀로 여행할 엄두를 내기 어려운 때문이었다. 그 여행에 동행을 청했다. 그는 이미 정원이 차서 안된다고 했다.
 
그는 호불호(好不好)가 선명했다. 스님들의 황소고집은 다 아는 바지만 그는 특히 한번 안된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한 번 더 찾아가 짐칸에라도 타고 갈테니 태워만 달라고 떼를 썼다. 그랬더니 깐깐하기 그지없는 그가 어쩐 일인지, 그러면 어떻게든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여행을 떠났다. 사미 때 법정 스님이 해준 승복을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입고 다닐만큼 사치와는 거리가 멀고, 자신을 위해선 식당 출입조차 거의 안하는 그가 숙박비를 넉넉히 쓸 리는 없었다. 우린 늘 한침대였다. 히말라야 오지에서 그와 한달간의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죽을 쒀온 처녀유학생에게 “죽 쒔네, 죽 쒔어!”하면서 숟가락 탁!
 
송광사로 출가해 방장 구산 스님 등 노스님들을 2년 동안 시봉하고, 다람살라에서만 15년째 홀로 공양을 해결하고 있던 그는 요리솜씨가 탁월했다. 완벽주의자는 다른 이의 허물을 쉽게 보아주지 못한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람살라엔 티베트불교를 공부하러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몇 있었다. 지금은 한국인이 많이 늘어나 상황이 달라졌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유학생이고, 여행객이고 터줏대감인 그에게 김치 한보시기나 된장국 한그릇 얻어먹지 않은 이들이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온 여자 유학생들도 비구인 그에게 신세를 지긴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자란 젊은이들이야 그저 옥이야 금이야 귀여움만 받았지 20대가 되어도 김치 하나 제대로 담글 줄 아는 이들이 별로 없으니 집 떠나 이국 타향에 오래 머물다 보면 김치 생각이 간절할 수 밖에 없었다. 청전 스님은 청년 유학생들만이 아니라 처녀 유학생들에게도 자신이 직접 담근 김치를 나눠주곤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아플 때는 누구 하나 그를 돌봐주는 이가 없었다. 그가 앓아누워있을 때 그동안 얻어먹기만 한 처녀유학생들이 미안했든지 죽을 쑤어왔다. 하지만 그가 누구던가. 20대 때 출가하자마자 노스님들을 시봉하며 새벽마다 죽을 쑤던 ‘죽 고수’가 아닌가. 그런 그에게 죽 한 번 쑤어본 적이 없는 초보자의 죽이 눈에 찰 리 만무했다. 처녀 유학생이 쑤어온 죽을 한 입 먹고는 이내 숟가락을 놓은 그가 말했다.
 
“죽 쒔네. 죽 쒔어!”
 
그에게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김치를 얻어먹기만 한 처녀 유학생들이 작정하고 김치를 담가 가져와도 그의 깐깐한 입에 맞을 리 없었다. 한번은 처녀 유학생이 김치를 담가왔는데, 너무나 달았다. 스님이 “김치에 뭘 넣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처녀유학생은 “아무리 김치를 정성껏 담가와도 스님이 맛있다는 말씀 한 마디 안해서 맛있으라고 꿀을 넣었다”고 했다. 도무지 ‘합격’이라곤 없는 그의 입맛에 맞추려다 ‘꿀김치’까지 출현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다람살라에서 회자 될 정도로 그의 기준은 엄격하기만 했다.
 
“어느 여자가 비위 맞추고 살겠소”라며 천년총각 딱지
 
그만큼 그는 자신의 처신에서도 완벽에 가까웠다. 다람살라에선 ‘코리안 갤롱’(한국 스님)으로 통하는 그에 대해 달라이라마는 “신라에서 천축(인도)으로 유학온 역경사(불경 번역승)”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계율에 철저한 그를 두고 누군가는 ‘천년 총각’이라고 칭했다. 아마도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천년 동안 여성을 접한 적이 없는 ‘1천년 동안의 청정 비구’라는 것이다. 음식을 만들어도 설거지를 해도 도무지 합격점을 주지않은 채 구박하는 그에게 이렇게 대거리하곤 했다.
 
“그러면 그렇지. 천년 총각엔 다 이유가 있지. 어느 여자가 스님 같은 사람 비위 맞추고 살겠소. 앞으로도 스님한테 시집올 여자는 없을테니 그렇게 비구로 잘 살아보시오. 세세생생. 쭉~.”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토라질 그가 아니었다. 깐깐한 완벽주의적인 성격 탓에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식의 빈말을 못해서 그렇지 그에겐 성직자로서 젖기 쉽상인 ‘권위 의식’같은 게 없다. 누구에게나 거리감을 갖지 않은 그의 탈권위가 아니고선 ‘일반인들이 쉽게 가까이하려 하지않은’ 기자와 쉽게 동침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세납으로도 10년이 연상이었지만 청전스님은 동거인을 늘 벗으로 허심탄회하게 대했다. 불경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전부터 현대서까지 무궁무진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 속에 빠져들곤 했다.
 
더구나 여행길에 모시고 다니던 라닥의 두 노승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꼭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았다. 전생을 본다는 어떤 사람은 롭상 쬔뒤(83) 스님과 툽텐 왕걀(75) 스님이 전생부터 부부였고, 청전 스님과는 부모자식 관계였다고 했다는데, 한달 동안 함께 살아보니, 두 노승은 영락 없는 부부였고, 청전 스님은 어리광 부리는 어린 자식이었다.
 
어려서 동진출가해 오직 염불 독경과 오체투지로 평생을 순일하게 살아온 두 노승의 모습은 천진불 자체였다. 청전 스님이 부모가 어린 아들과 몸짓놀이를 하듯 몸동작을 하면 노승들은 청전 스님을 따라 어눌한 동작으로 코를 잡고 귀를 잡다가는 동작이 엉켜 수줍은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히말라야 오지인들에겐 둘도 없는 ‘산타스님’으로 불려
 
용돈을 많이 드리거나 끼니마다 진수성찬을 올리는 자식보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재롱을 떠는 자식이 진짜 효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00살인 부모를 위해 80살 자식이 재롱을 떨었다는 옛이야기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청전 스님은 두 노승들에게 더할나위 없는 효자였다.
 
그렇다고 청전 스님이 효도를 하는 대상을 두 노승으로만 한정 짓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해진 루트만을 다니는 등산가들과 달리 길잡이도 없이 걸어서 히말라야 산맥을 몇개씩 넘어다니던 그야말로 ‘진짜백이 히말라야 산사나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런 난행 고행 당시 보았던 라닥 오지인들의 어려운 삶을 보고 십년 넘게 매년 여름이면 한달씩 의약품과 생필품을 말과 지프차에 싣고 가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며칠 동안 걸어야 겨우 찻길을 만날 수 있는 오지에 사는 사람들은 약 한첩이면 나을 병에도 눈과 귀가 멀고, 팔 다리를 못쓰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을 보고, 그가 몸소 그들을 돕고 나선 것이다. 오지 라닥인들에겐 구세주나 다름 없는 그는 그곳에서 “산타 몽크”(산타클로스 스님)로 불린다.
 
함께 여행중에도 그는 오지 마을에 갈 때면 늘 짐칸에 감춰 두었던 선물보따리를 풀곤 했다. 호텔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값싼 게스트하우스에서 숙박하기 일쑤고, 간혹 끼니를 사먹어야할 때라도, 10루피짜리 감자 몇개로 해결하는 짠돌이였지만 그의 선물보따리에선 화수분처럼 비타민과 영양제와 약과 안경과 시계와 속옷 등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한국에 갈 때마다 모아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오지에서 선물을 하는 것을 봐도 그의 철저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냥 아무거나 던져주어 보시 자체로 만족하는 그런 보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한 명 한 명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물어 그것을 준비해왔다가 그것을 주어서 병을 낫게 하거나 추위를 면하게 해주니 그가 구세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짓 못하는 1차원적 순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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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전스님(왼쪽)과 달라이라마.
그렇게 뭐든 대충 대충 넘어갈 수 없는 성격이 그를 달라이라마에게까지 오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애초 가톨릭 신부가 되려던 예비신부였다. 광주 대건신학대 3학년에 재학중에 송광사의 방장 구산 스님을 만난 그는 가톨릭 예비신부에서 불교 승려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시도한다. 엄격한 가톨릭의 규율과 교육 안에 있던 예비신부가 불교로 출가한 것은 신학교쪽과 가톨릭으로서도 큰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같았으면 가톨릭에 몸 담은 채 자신의 내면의 도를 구하는 정도로 타협했을 터였지만, 그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짓을 못하는 ‘1차원’이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다른 차원으로의 세속화는 여전히 더뎌 보이긴 마찬가지지만.
 
그는 출가 이후 노스님들 시봉살이를 마치고, 1979년 그가 존경하던 월인 스님과 초삼 스님을 모시고 지리산 백장암에서 첫 안거를 난 이래 10년 동안 국내 선방에 다니며 실참했다. 안거가 끝나면 전국의 산하와 오지를 다람쥐처럼 다녔다. 남지심씨가 <우담바라>라는 소설에서 그를 모델로 쓸 만큼 그는 신참 수좌 시절부터 고행난행을 두려워하지않은 구도열정을 보였다. 그가 최근 펴낸 <나는 걷는다. 붓다와 함께>를 보더라도 대충대충이라곤 없는 그의 남다른 구도열정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러던 그가 믿었던 큰스님 몇 분이 의식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허망하게 가버리는 열반 모습을 지켜보고는 또다른 코페르니쿠스적인 모험을 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세상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느냐’며 불완전하고 부정의한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성숙해가는냥 얼러대는 게 세속 논리지만, 그 말에 동화될 수 없는 ‘순진남’은 결국 스승을 찾아 한국을 떠났다.
 
남방불교의 위파사나 고승들을 친견한 뒤 인도로 들어가 테레사 수녀와 라즈니쉬 등 당대의 유명인들을 찾기도 했던 그가 마지막으로 만난 인물이 달라이라마였다. 그는 풀지 못해 가슴 속에 응어리져있던 10여개의 질문을 달라이라마에게 던졌고, 달라이라마는 이에 모두 답해주었다. 속 시원한 답변보다도 그를 더욱 매료시킨 것은 안팎이 다르지않은 달라이라마의 솔직함이었다. 
 
“왜 부처같은 큰 소리는 많은데 부처같은 행동은 없느냐” 질타
 
이를 인연으로 다람살라에 눌러앉았지만 그가 처음부터 평생을 티베트불교에 귀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역시 의심많은 회의론자이자 학구파였다. 그런 면에서 ‘보지않고 믿는자는 복되다’고 했던 크리스찬은 애초 될 수 없는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던 중 다람살라에 6년째 머물던 중 우리가 수미산으로 아는 티베트의 성산(聖山) 카일라쉬 도보 순례에 나선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꿈에서 달라이라마를 친견하며 순례를 마쳤다. 카일라쉬에서 돌아와 달라이라마를 만난 순간 그의 순례과정의 중요 행적과 꿈 내용까지 훤히 알고 있던 달라이라마를 보고서야 그는 티베트 밀교의 신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때 티베트 밀교 의식인 ‘관정’(灌頂)을 받고 비로소 밀교 수행에 들어갔다.
 
한국의 대승불교와 남방의 위파사나와 함께 불교계의 3대 흐름의 주요 맥인 티베트불교 수행자인 그는 한국불교가 우리 전통에선 사라져버린 밀교 전통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는 귀한 존재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그의 밀교 공부의 성취는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한국불교에서도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인 달라이라마는 매년 ‘한국인을 위한 법회’를 따로 열 정도로 한국불교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달라이라마는 청전 스님에게도 “한국불교를 깎아내리지 말고, 서로 부족한 것을 메우고 도울 수 있도록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 스님을 만나는 그의 입에선 독설이 그치지 않는다. “왜 부처같은 큰 소리는 많은데 부처같은 행동은 없느냐”거나 “말만 있고, 행동이 없고, 말만 있고, 힘이 없다”는 질타가 쏟아진다. 그는 “한국불교는 부처가 된 뒤 계율도 제쳐놓고 마음대로 누리는 것만 있지 부처가 되기까지의 난행고행은 모두 잊어버렸다”면서 “자기 좋을대로의 자기 편의를 위한 오역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대로 따르기 힘든 중생에게 듣기 고역이 될만한 독설뿐이다.
 
이제 나이 60을 앞두어 꼬장꼬장한 모습이 많이 순화되어 부드럽고 온화한 기운에 온 몸을 감싸게 되었지만 가시 돋힌 독설은 여전하다.
 
“제발 그렇게 쏘다니지 말고, 공부 좀 하라”며 일갈
 
인간은 경험을 절대화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자기에겐 전부다. 오랜 구도역정 끝에 찾은 스승이고, 22년째 수행을 하고 있는 티베트불교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믿음은 절대적이다. 티베트불교에 대한 확신을 넘어 상대적 우월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불교에 대한 독설이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다.
 
티베트불교에 대해서도 독설을 퍼붓긴 마찬가지다. 그는 티베트가 나라를 잃어버린 것보다 승려들의 타락이 더 염려스럽다는 달라이라마의 우려에 그대로 동감한다. 잃어버린 나라와 사찰은 시절이 오면 다시 찾을 수 있지만 한번 잃어버린 법(진리)는 다시 되돌이키기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의 한국인들은 린포체라면 그저 불보살을 대하듯 하지만, 그는 어린시절부터 한국에 수없이 오가는 티베트불교 고승의 환생자 링 린포체에게도 “제발 그렇게 쏘다니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입바른 소리를 한다.
 
이렇게 깐깐한 모습과 독설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삶이 얼마나 강팍할 지 우려한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이다. 키는 멀대만한데 몸무게는 50kg대의 영양실조형 몸으로, 씹기도 쉽지않은 티베트 보리짬바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그는 늘 행복해 한다. “아마 세상에 나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늘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어떤 마약을 먹어야 약효가 저렇게 오래가나라는 농담이 나오곤 한다.
 
그처럼 행복한 사람의 입에서 독설이라니. 그것이 청전 스님의 아이러니다. 최근 방한한 그가 필자의 서재인 환희당에 들러 6년 전처럼 동침을 할 때였다. 티베트밀교 만다라와 탕카라가 그려진 달력을 네팔에서 사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만다라 그림이 영 형편 없다”고 말했다.
 
“영험이 있어보인다고 축복을 해줘야 없는 영험도 생길 터인데 왜 돈 안드는 ‘말보시’에 저리 인색한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그러니 (가톨릭)신부가 되려다 신부도 못 되고, 신부가 못된 사람들은 다 신랑이 되던데, 저러니 신랑도 못됐지!”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줘도, 빈말하지 못하는 그의 입은 독설을 그치지 못한다.
 
누군가는 “성질 한 번 더럽다”고 고개를 돌릴 지 모르지만, 아니다. 오직 인사치레의 허례허식만이 팽배한 속세의 관계에서 이를 격파해버리는 그의 독설은 그래서 신선하기만 하다. 빈말만이 난무하는 세간에서 그의 독설이야말로 가뭄 속 물벼락이다. 그래서 그의 독설이 때때론 영험이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출간 즉시 인터넷서점 베스트셀러가 된 <나는 걷는다, 붓다와 함께>
 
지리산에서 히말라야까지 ‘민중’ 속으로 걷고 또 걷고
만행 중 만난 ‘눈물나게 하는’ 민초들, 그가 낳은 ‘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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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걷는다 붓다와 함께 청전스님
히말라야에서 사는 청전 스님(57)은 많이 걸었다. 히말라야 고봉을 오르는 유명 산악인들의 대부분은 정해진 루트만을 다니지만 그에게 정해진 길은 없다. 히말라야는 넓다. 같은 히말라야지만 그가 사는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접경 라닥까지는 비행기와 차를 갈아타고도 꼬박 3일이 걸리는 거리다. 그 길을 산맥 6개를 넘어서 걸었던 그다. 티베트에 있는 성산 카일라쉬를 순례할 때도, 석 달 동안 걸어서 도달할 만큼 그는 걷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다.
 
한국서 보낸 물품 싣고 오지 누비며 나눠줘
 
티베트의 망명 지도자 달라이라마에게 꽂혀 달라이라마를 스승으로 모시며 인도 히말라야에 산 지 22년. 그는 티베트 밀교를 수행한다지만 그가 한 진정한 수행은 순례이자 만행인지 모른다. 인도와 네팔, 부탄, 파키스탄, 티베트, 중국에 걸쳐 있는 히말라야의 곳곳을 아마도 그처럼 많이 누빈 사람도 세상엔 흔치 않을 것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한국의 지인들이 보내준 의약품과 안경, 내의를 지프차와 말에 번갈아 싣고 가서 나눠주기 위해 한 달 동안 라닥의 오지를 누비는 것 말고도 그는 틈만 나면 히말라야 구석구석을 누빈다.
 
그런 역마살이 인도에 가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는 만행을 좋아했다. 언제부턴가 한국에선 머리 깎은 출가승이 절 문 밖을 나서면 동냥중이나 걸인 취급을 받아 탁발이 사라졌지만 그는 국내에 머물던 1980년대까지도 절집만이 아니라 민가에 깊숙히 파고들곤 했다. 그렇게 화전민촌에서, 또는 길에서 만난 인연들이야말로 그의 삶이 낳은 ‘사리’였다.
 
그가 쓴 <나는 걷는다, 붓다와 함께>는 ‘지리산에서 히말라야까지, 청전 스님의 만행’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국내와 히말라야에 걸친 만행기다. 광주대건신학대 3학년에 재학하면서 (가톨릭) 신부수업을 받다가 어느날 갑자기 학교 도서관에서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을 발견하고 전기에 감전된 듯 송광사행을 감행했던 그는 당대의 선지식이던 송광사 방장 구산 선사로부터 “너는 천축국(인도)의 고행승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부터 잠 못 이루던 그는 15일 만에 머리를 깎았다.
 
그의 옷은 승복으로 바뀌었지만 실은 바뀐 것이 없었다. 유신 시절 전주교대 재학 때 긴급조치 위반자로 걸려들었을 때도, 대건신학대에 다닐 때 정의구현에 앞장서던 선배 신부들에게 열광하던 때도, 불가에 귀의한 뒤에도 그의 종교는 ‘오직 민중’이었다. 승속이 섞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출가자의 권위의식 같은 것은 일찍이 벗어던지고 민중들 속에서 살아가려는 그의 열정은 만행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묵주 갖는 게 소원이라던 할머니한테 선물
 
1984년. 여름 안거를 마치고 강원도 오대산 적멸보궁에 참배하고 화전민촌락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내린천을 따라 내려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살둔골에 이르렀다. 쓰러지지 않은 게 신기할 만큼 너와집 아래서 그을린 냄비 몇 개로 살아가는 당시 84살의 송로사 할머니로부터 그의 만행기는 시작된다. 6·25 때 월남해 화전을 일구고 살다가 남편과 자식마저 앞세운 할머니는 죽지 못해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불쌍해 5리 길을 내려가 구멍가게에서 ‘청자’ 담배 한 보루를 사다주자 할머니는 “이거는 싱거워서 못 피운다”며 봉초 담배로 바꾸어왔다.
 
길을 나서며 무언가를 주고 싶었지만 줄 게 없어 염주를 드리려 하자 “난 천주교도래요”했다. “꼭 갖고 싶은 게 뭐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묵주가 있으면 평생 묵주 세고 기도하며 살아가겠다”고 했다. 청전 스님은 라면 몇 박스를 사다 놓고 5000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고 돌아섰다. 그 뒤 고3이던 속가 조카에게 편지를 써 묵주 한벌을 보내 달라고 했다. 훗날 그가 히말라야에 있을 때 살둔골에 살던 한 청년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불교 스님이 선물한 ‘가톨릭 묵주’로 평생 묵주기도를 하던 할머니가 아흔 넘게 사시다가 올 봄에 평안하게 돌아가셨다”는 편지였다.
 
그의 만행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렇게 평범하다 못해 ‘눈물 나게 하는’ 민초들이다. 그들이 불교도이든, 기독교도든, 무교도이든 그에겐 다 같은 ‘대비 동체’일 뿐이었다. 사회적인 지위나 재산이 없으면 스님들과 마주 앉기도 힘든 세상에서 산골 노인들과 함께하는 한 청정한 비구의 모습은 가슴 한켠에 군고구마 같은 따스한 기운을 전해준다. 그리고 그가 걸었던 붓다가 2500년 전 석가모니라기보다는 거리에서 또는 집에서, 일터에서 늘상 만나거나 그곳에서조차 밀려난 사람들임을 알게 된다. 그에게 붓다는 우리의 눈물샘을 솟구치게 하는 민초이며 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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