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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과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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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386회 작성일 14-02-20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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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6)

  세계는 오늘날 지속적인 공포와 의혹 그리고  긴장 속에 살고 있다. 과학은 상상할 수도 없는 파괴력을 지닌 무기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이 새로운 죽음의 도구를 휘둘러대면서 엄청난  힘으로 다른 여러 나라에게 협박을 가하고 도전하고 있다. 세상의 다른  나라보다 더 큰 파괴와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떠벌리고 있다.

  세계는 인간성을 깡그리 파괴시킨  가운데, 서로 박살내기에 불과한 이 미친 길을 가고  있다. 이제 그 방향으로 한 발짝만  더 나아간다면 인류 전체를 멸망시키는 지점에 서있다.

  인류는 자기네가 지어낸 처지에  두려워하며, 탈출구를 찾으려고 몇 가지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러나 부처가 전해준 것, 그 이외의 방법은 없다. 즉, 비폭력과 평화, 사랑과 자비, 너그러움과 이해, 진실과 지혜,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경, 이기심과 증오와 폭력에서 벗어나라는 그의 메시지이다.

  부처는 말했다.
 
'증오에 의해서는  증오가 가라앉지 않는다. 그것은 친절하여서 가라앉는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  '친절하여서 노여움을 이겨야 한다. 착하여서 못됨을, 자비로써 이기심을, 그리고 진실 되어서 거짓을 이겨야 한다.'

  이웃을 정복하고 짓밟으려 갈망하는  한, 사람에게 평화와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부처가 말했듯이,
 
'승리자는 미움을 길러내고, 패배자는 비참속에 빠진다. 승리와 패배, 모두를 포기하는 이는 행복하고 평화롭다.'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유일한 정복은 자기를 정복하는 것이다. '전투에서 백만 명을 정복한 이 보다도, 오직 한  사람 자기를 정복한 이가 가장 위대한 정복자이다.'

  당신은 이들이 모두 아름답고 고상하고 숭고하지만, 비현실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증오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서로 죽이는 것이 현실적인가? 정글 속에 야수같이 그치지 않는 두려움과 의심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인가? 이것이 더  현실적이고 편안한 것인가? 증오가 증오에 의해서 진정되는 일이 있었던가? 해악으로 해악을 이긴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개인적인 경우일지라도 증오가 사랑과 친절로 진정되고, 착하여서 못됨을 이긴 예가 있다. 당신은 이것이 개인적인 경우에는 사실이고
현실인지 몰라도 국가적인 일,  국제적인 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대중들은 최면술에 결려있다. '국가적'이니 '국제화'니 '국가'니하는 정치적, 선전적 용어에  심리적으로 혼란되고, 눈멀었으며, 속고 있다. 한 나라가 개인들의  거대한 모임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나라나 국가가 행위하는 것은 아니다. 행위하는 것은 개인이다. 개개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결국 나라나 국가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된다.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나라나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증오가 사랑과 친절로 누그러질 수 있다면 한 나라나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분명히 실현될 수 있다. 한 개인의 경우에서도 증오를 친절로 대하려면 도덕적 힘에 있어서 엄청난 용기와 대담성 그리고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국제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욱 그러해야되지 않겠는가? 당신이 '비현실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옳다.  분명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노력해야만 한다. 당신은 그것이 위험한 시도라고 말할지 모르나 분명히 그것이 핵전쟁을 시도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그런 위대한  통치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는 것이 위안이 되며, 오늘날에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는 광대한 제국을 안팎으로 다스리는 데에 이 비폭력과 평화와 사랑의 가르침을 적용하려는 용기와  신념과 선견을 가졌었다. 그가  바로 "신들의 은총이 나린 이"라 불려지는  인도의 위대한 불교황제 아쇼카(기원전 3세기)이다.

  처음에는 자기 할아버지(챤드라굽따Chandragupta)와 아버지(빈두사라Bindusara)를 본받아 인도반도를 완전히 정복하려고 하였다. 그는 깔링가Kalinga에 쳐들어가서 정복하고 깔링가를 복속시켰다. 이 전쟁에서 수십만이 죽고 다치고 불구가 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불제자가 되었을 때, 부처의 가르침으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바위에 새겨둔 그의 유명한 칙령중의 하나(현재 '비문칙령 13장'(Rock Edict XIII)이라고 부른다)를 오늘날에도 읽어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황제는 깔링가의
정복을 언급하며 자기의 '뉘우침'을  공표하고, 그 학살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기 그지없는지'를 말하였다. 그는 다시는 절대로 어떤 정복을 위해서도 칼을 뽑지 않겠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폭력을 버리고, 자기를 제어하며, 청정함을 닦고,  온화하기를' 바랐다. 이는 물론 "신들의 은총이 나린 이"(즉, 아쇼카)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정복이라고 여겨진다. 즉, 경건을 통해 정복한 것(dhamma-vijaya;法勝)이다. 그는 전쟁을 자기 스스로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손들이 새로운 정복을 성취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경건을 통해 정복하는 그런 정복만을 생각해야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유익한 것이다'라고 자기 희망을 표현하였다.

  이는 인류역사상 권력의 최 전성기에  있는 승리한 정복자가 여전히 영토의 정복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였으면서도 전쟁과 폭력을 포기하고 평화와 비폭력으로 돌아선 유일한 예이다.

  여기에 오늘날의 세계를 위한 교훈이 있다. 한 제국의 통치자가 전쟁과 폭력을 공식적으로  등지고 평화와 비폭력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어떤 이웃의 왕이 아쇼카의 경건함을 군사 공격을 하는데 유리점으로 삼았다던가, 그의 일생 동안 제국 안에서 어떤 반란이나 모반 사건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그 어느 것도 없다.  오히려 온 나라가 평화로웠고, 제국 밖의 다른 나라들도 그의 온화한 지도력을 받아들인 것 같다.

  힘의 균형이나 핵 억제력의 협박을 통해서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무기의 힘은 공포를 낳을 수 있을 뿐이고 평화를 낳지 못한다. 공포를 통해서는 진정한 평화, 계속되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공포를 통해서는 오직 증오와 악의와 적개심만이 올 수 밖에 없다. 그 당시만은 억누를 수 있지만 폭발할 준비를  하는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사나와지게 된다. 진실되고  진정한 평화는 자비롭고(metta;慈), 우호적이며, 공포와 위험에서 벗어난 분위기에서만이 득세할 뿐이다.

  불교는 파괴적인 권력 투쟁이 포기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정복과 패배를 떠나 고요함과 평화가 득세하는 사회, 죄 없는 사람이 박해받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는 사회, 군사전쟁이나 경제전쟁으로 백만 인을 정복한 사람보다 자기자신을 정복한  이를 더 존경하는 사회, 친절하여서 증오가 정복되며,  유익한 것으로 해로운 것을  정복하는 사회, 적의, 시기심, 악의, 그리고 탐욕이 사람의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 사회, 자비가 행위의 추진력인 사회,  미물까지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공정하게, 사려 깊게 그리고 사랑으로 다루어지는 사회, 물질적으로 만족을 누리는 가운데 평화롭고 조화를  이룬 삶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하고 거룩하기 그지없는 목표인 '궁극적 진리', 즉 열반의 깨달음을 지향하
는 사회가 불교의 목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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