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가야에 있는 보리수 아래 앉아서 명상하는 동안 사성제(四聖諦)를 깨달았다. 그리고 바라나시 부근에 있는 이시파타나(현재의 사르나트)의 사슴동산(녹야원)에서 한 첫 설법에서 그의 옛 동료들인 다섯 고행자들에게 이것을 설했다. 이 사성제가 불교의 중심 개념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서러운 고의 진리(苦聖諦. 고성제. Dukkha Ariya Sacca) 2. 성서러운 고 발생의 진리 (集聖諦. 집성제. Dukkha Samudaya Ariya Sacca) 3. 성서러운 고 소멸의 진리 (滅聖諦. 멸성제. Dukkha Niroda Ariya Sacca) 4. 성서러운 고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 (道聖諦. 도성제. Dukkha Norodha Gamini
Patipada Airya Sacca)
둑카(Dukkha.苦)는 한 단어로 번역할 수 없는 팔리어(Pali)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말에는 팔리어의 둑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의미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괴로움, 병, 고통, 불만족 들이 그래도 원어에 가까운 번역이고 고통, 비참, 슬픔, 대립 따위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둑카라는 단어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또한 그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번역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를 바라지만, 편의상 가능한 곳에서는 괴로움과 둑카라는 두 단어가 모두 사용될 것이다. 이 장을 읽고 나면 독자들은 붓다의 가르침 속에서 둑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지로부터 완전한 지혜에 이르게 되는 깨달음은 항상 사성제를 이해했다는 의미로 쓰인다. 깨달은 사람은 단지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했다는 이유 때문에 붓다라고 불린다. 붓다는 첫번째 설법 전체를, 이 사성제를 간단하게 설하는 데에 할애했다. 그것은 사성제가 그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땅 위를 걸어 다니는 모든 동물들은 발자국이 가장 큰 코끼리의 발자국 안에 들어 가듯이, 사성제의 교리는 모든 훌륭한 법(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포함한다." (중부 28)
팔리어 경전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경장(經藏)속에서, 이 사성제는 상세하고도 다양하게 설명되어 있다. 사성제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45년 동안 붓다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바로 모든 현상적인 존재가 가지고 있는 불만족스러운 성질, 즉 괴로움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심지어 붓다 당시의 수행자들과 바라문들은 이렇게 붓다를 비난했다.
"사문 고타마는 존재의 파괴와 소멸을 알리는 허무주의자이다."
그러나 붓다는 분개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단호히 말했다.
"비구들아, 지금뿐만 아니라 과거(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법을 선포했을 때)에도 나는 단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쳤을 뿐이다. (중부 22)
이 명료한 말을 이해해야 불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이 한가지 원리를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붓다가 발견한 것은 바로 사성제이며 나머지는 이 사성제의 논리적 발전과 사성제에 대한 좀더 상헤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붓다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그들의 전형적인 가르침이다(Viyaya, Maha-vagga). 붓다의 가르침에서 사성제가 가장 우월하다는 것은 녹야원에서 설했던 싱사파 숲에 대한 설법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어느때 붓다는 코삼비(알리하바드 근처)의 싱사파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붓다는 나뭇잎을 손에 조금 쥐고서 비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모은 이 한 줌의 싱사파 잎들이 더 많으냐, 아니면 저 숲에 있는 잎들이 더 많으냐?"
"세존이시여, 세존의 손에 있는 잎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저 숲에 있는 잎들이 더 많습니다."
"바로 그렇다. 비구들아, 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지만 너희들에게 그것을 다 밝히지는 않았다. 내가 너희들에게 밝힌 것은 아주 적다. 비구들아, 그러면 왜 내가 밝히지 않았겠느냐? 그것들은 유용하지 않고, 청정한 삶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며, 싫어함, 냉정, 소멸, 적정, 완전한 이해, 깨달음, 열반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 비구들아, 내가 밝힌 것들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비구들아, 그러면 왜 나는 이러한 진리들(사성제)을 밝혔는가? 실로 그것들은 유용하고, 청정한 삶에 필수적이고, 싫어함, 냉정, 소멸, 적정, 완전한 이해, 깨달음,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들을 밝힌 것이다." (상응부 437)
붓다는 비할데 없는 의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뛰어난 의사이다. 붓다가 사성제를 설하는 방법은 의사의 치료 방법과 비교할 수 있다. 의사는 먼저 병을 진단하고 병의 원인을 찾아 낸다. 그리고 나서 병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지 생각한 뒤에 치료한다. 괴로움이 병이고 욕망이 병의 근본 원인이다.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병이 제거되어 그 병이 치유된다.
환자는 자신의 병을 알아차리고 병이 심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병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는 병을 진단하고 처방을 써 줄 의사를 찾아가야 한다. 치료를 통해서 환자는 병에서 벗어나 치유된다. 괴로움은 무서운 병이기 때문에 무시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 갈애은 제거되고 버려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수행하고 계발해야 한다. 팔정도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치료법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알고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 갈애를 제거하면 열반의 실현은 보장된다. 열반의 실현은 병이 치유된 상태이며, 완전한 초월이며,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붓다의 깨달음이 흥미를 끌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있던 셀라(Sela)라는 바라문에게 붓다는 말했다.
나는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 그러므로 바라문아, 나는 붓다, 깨달은 사람이다. (중부 92.경집 558)
이것은 그가 붓다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는 스스로 말한다.
"비구들아,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여래는 아라한,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불린다." (상응부 433)
초기 경전에서 둑카라는 단어는 한 가지 이상의 의미로 쓰였다. 문맥에 따라서 심리적, 물리적, 철학적 의미로 쓰인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사람에게 괴로움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불교 사상의 근본 원리이다. 사성제의 근본 개념인 '괴로움'을 무시하는 것은 나머지 세 가지 진리도 무시하는 것이 된다. 괴로움을 알아야 할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괴로움을 아는 자는 또한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안다 ." (상응부 437).
이 사성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적이기 때문에, 네 가지 진리 가운데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을 안다는 것은 나머지 것들도 또한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상응부 437). '괴로움'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간단히 말해서 사어제 가운데 단지 하나의 진리만 부정해도 나머지 세 가지 진리 또한 부정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붓다의 가르침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나는 이 모든 무의미한 것들을 받아 들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철저한 유물론자에게는 이 가르침이 상당히 무미건조하고 당황스럽고 부적절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참모습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이 가르침이 신화나 상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바른 시각으로 중생 세계를 조망하는 사람에게, 즉 냉철한 통찰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유이랗 눔제는 바로 괴로움의 문제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알려져 있든 그렇지 않든 모든 문제는 보편적인 이 괴로움 속에 포함된다. 그래서 붓다는 "이 세계는 괴로움 위에 세워져 있다 (상응부 40)." 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라도 문제가 되면 거기에는 괴로움, 불만족이 따르게 마련이고 우리가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욕구와 현실 사이에는 갈등이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인간은 그 문제를 풀려고 모든 노력을 다한다. 다시 말해서 불만족을 제거하고 갈등을 조절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한가지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심지어는 종교적 문제라는 다양한 명칭을 부여한다. 이 모든 것들이 괴로움 즉 불만족이라는 한 가지 문제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불만이 없다면 왜 우리가 정치, 경제등의 문제를 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겠는가? 문제 해결이 불만족의 감소를 의미하지는 않는가? 모든 문제들은 불만을 일으키고 노력에 의해서 불만들은 해소되겠지만 그것들은 그렇게 서로 생멸(生滅)을 거듭한다. 원인은 종종 외적인 것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속에 포함된 주관적인 데에 있다.
종종 우리는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다른 형태로,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나타난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들과 직면하고 있는 듯이 보이고 그래서 그 문제들을 풀기 위해 새로운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문제와 문제에 대한 해결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성질 즉 중생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특성이다. 괴로움은 일어났다가 사라져 다시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문제들은 육체적.정신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심리적인 문제보다 육체적인 문제를 더 잘 견뎌 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불교에 따르면 인생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이 모든 인생을 압도한다. 괴로움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세상은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고, 아무도 이 괴로움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올바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분별력 있는 사람으로서는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즐거움이나 행복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괴로움을 초월한 붓다는 괴로움의 보편성에 대해서 설할 때 결코 인생의 행복을 부정하지 않았다. 팔리어로 쓰여진 근본 다섯 니카야(Nikaya)가운데 하나인 앙굿타라 니카야(Anguttara-nikaya)에는 중생들이 즐기는 행복에 대한 긴 일람표가 있다 (증지부 80).
마할리 릿차비(Mahali Licchavi)의 질문에 대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마할리야, 만약 볼 수 있는 형상(色.색), 소리(聲.성), 냄새(香.향), 맛(味.미), 감촉(觸.촉) 들이 (감각 기능을 통해서 경험하는 감각 대상들) 모두 괴로움에 시달리고 괴로움을 가져오고 모든 즐거움과 희망을 빼앗는다면, 중생들은 이 감각 대상들에 대해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할리야, 이 감각 대상들 속에 즐거움이나 행복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은 거기서 기쁨을 느끼고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이러한 집착 때문에 중생들은 스스로 더럽힌다." (상응부 69).
인간은 감각 기능(기관)을 통해 감각 대상과 감각 대상이 주는 기쁨에 집착하게 되고 쾌락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즐거운 대상도 쾌락도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변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즐거움을 유지할 수 없거나 빼앗겼을 때 종종 슬퍼지고 쓸쓸해진다. 다양하지 못하면 불행을 느끼기 때문에 인간은 단조로움을 싫어한다. 그래서 소들이 싱싱한 풀을 찾듯이 신선한 즐거움을 찾는다.
그러나 이 즐거움도 한 순간의 것이기에 스쳐 지나가는 볼거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모든 즐거움은 고통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전주곡이 된다.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은 우리를 속여서 해를 가져다 주는 설탕 발린 독약처럼 어느듯 사라져 버리고 만다.
마음에 들지 않는 요리, 불쾌한 음주, 추한 태도,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사소한 일들은 그가 불교도건 아니건,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지위가 높건 낮건, 학식이 있건 없건 우리들에게 고통과 불만을 가져다 준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붓다의 말과 동일한 말을 한다.
"슬픔이 다가올 때 그것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큰 부대를 이끌고 온다."
인간이 인생의 이러한 측면, 즉 즐거움은 변하기 쉽다는 것을 알지 못할 때, 그는 실망하고 좌절한 나머지 지각이나 판단력도 없이 마음의 균형을 잃은채 어리석은 짓을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위험하며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은 빈번히 인생의 이러한 두 가지 문제, 즉 쾌락과 그 나쁜 결과에 직면해 왔다.
반면에 생물과 무생물에 대한 깊은 애착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초연한 사고 방식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은, 올바른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그가 받은 문화적인 훈련 덕분에 인생의 어떤 흥망성쇠를 만나더라도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힌다. 그래서 그는 일이 잘 안 될 때에도 미소지을 수 있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들을 떠나 마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는 결코 걱정하지 않으며 해방되어 있다. 쾌락, 쾌락의 나쁜 결과, 해방 이 세가지는 사실적인 경험들로 이른바 '인생의 진정한 모습'이다.
붓다는 마할리의 질문에 계속해서 이렇게 답한다.
"마할리야, 만약 볼 수 있는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들이 모두 즐거움에 속하고 즐거움을 가져다 주고 고통을 남기지 않는다면, 중생들은 감각 대상들에 싫증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할리야, 이 감각 대상에는 괴로움이 있고 즐거움은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중생들은 감각 대상에 싫증을 낸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 대상들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음으로 해서 스스로를 청정하게 한다." (상응부 69).
괴로움에는 세 가지 모습이 있다. 첫째 가장 분명하고 일반적인 형태의 괴로움(苦苦性.고고성), 둘째 조건 지어진 상태에서 오는 괴로움, 즉 불만족(行苦性.행고성), 셋째 변화로 인해서 오는 괴로움(壞庫性.괴고성)이 그것이다 (장부 33. Samyutta Jambukhadaka-sutta).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모든 정신적.육체적인 괴로움(상응부 421)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괴로움이고 이것들을 고고성(苦苦性)이라 한다. 인생의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하는데 과학이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조건지어진 상태에서 오는 괴로움, 불만족인 행고성(行苦性)은 철학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행(行)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처럼 고와 관계된 문맥 속에서는 다섯 가지 집합체(五蘊.오온)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물질의 집합체 (色蘊.색온. 이 경우에는 볼 수 있고 만져서 알 수 있는 형체를 가진 육체), 감각의 집합체(受蘊.수온), 지각의 집합체(想蘊.상온), 의지적인 형성력의 집합체(行蘊.행온), 의식의 집합체(識蘊.식온)를 말한다.
이것을 또한 간단히 명색(名色), 즉 정신적.육체적인 복합체라 하기도 한다. 색(色)은 물질적인 집합체를 포함하고, 명(名)은 나머지 네 가지 정신적인 집합체를 포함한다. 중생은 이 오온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와 경험의 세계는 둘 다 끊임없이 변한다. 그것들은 존재했다가 사라진다. 모든 것은 빙글빙글 돌아간다. 아무것도 이 무정하고 끊임없는 변화를 필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무상한 성질 때문에 아무것도 진정으로 즐거울 수 없다. 행복이 존재하지만 단지 순간적일 뿐이다. 행복은 눈송이 처럼 사라지고 불만이 생긴다. 붓다는 괴로움이라는 고귀한 진리(고성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내린다.
"간단히 말해서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이상이 조건 지어진 것에 대한 불만족(行苦.행고), 괴로움이다.
괴고성(壞苦性)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만족의 범주에 속한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즐겁고 행복한 느낌은 곧 시들어 사라져 버린다. 붓다는 수행자들이 사선(四禪)을 얻고서 경험하는 느낌들조차 괴고성의 범주에 속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도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하기 쉬운 것들이기 때문이다(중부. Mahadukkhandha-sutta).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괴로움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참고 견디는 고통, 괴로움은 분명 아니다. 붓다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무상한 모든 것은 불만족스럽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은 매순간 변화를 겪고, 이 변화는 불만족을 낳는다. 무상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불만족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상응부 22). 그러므로 영원한 행복은 없다.
고성제(苦聖諦)를 공식화 하면서 붓다는 '간단히 말해서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한다(상응부 421). 이 가르침에 따르면 괴로움과 오온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괴로움은 오온으로부터 독립해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오온의 결합과 괴로움은 같은 것이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비구들아,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상응부 158)."
붓다는 다른곳에서 다음과 같이 설했다.
"세계와 세계의 생성, 세계의 소멸, 그리고 세계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은 의식과 자각을 갖고 있는 바로 이 몸 속에 있다고 나는 선언한다." (증지부 48)
여기서 세계란 말은 괴로움(苦.고)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바에 따르면 고성제와 나머지 세 가지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온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졌다. 그러므로 오온의 중요성을 인식하자. 불교에서는 세속적인 진리(俗諦.속제)와 궁극적인 진리(眞諦.진제)를 구별해서 말한다.
일반적으로 '존재'라는 말을 쓰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러한 존재란 없다.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육체적.정신적인 힘 또는 에너지라는 표현밖에 없다. 이 힘 또는 에너지가 오온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이 른바 '존재'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오온의 결합에 불과하다. 그러면 오온이란 무엇인가?
1. 첫번째는 물질(色.색)의 집합체이다. 물질은 전통적으로 견고성, 유동성, 열성, 운동성으로 알려져 있는 사대(四大)로 구성되어 있다(증지부 48). 보통 이것들은 땅(地), 물(水), 불(火), 풍(風)이라고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단순한 땅, 불, 물, 바람이 아니다. 불교 사상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진리에 대한 미묘한 문제들을 다룬 아비담마(Abhidhamma, 論)에서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견고성은 확장의 요소이다. 사물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이 확장의 요서에 기인한다. 사물을 볼 때 우리는 공간 속에 뻗어 있는 어떤 것을 보고 거기에 명칭을 부여한다. 확장의 요소는 고체뿐만 아니라 액체 속에도 존재한다.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볼 때조차 우리는 견고성을 보기 때문이다. 바위 딱딱한 성질, 풀의 부드러운 성질, 즉 사물 속에 내재한 무거운 성질과 가벼운 성질 또한 견고성에 속한다. 이것은 견고성의 고유한 특성이다.
유동성은 응집성의 요소이다. 이 요소 때문에 물질의 미립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쌓일 수 있다. 액체는 응집력이 대단히 강하다. 고체와 달리 액체는 분리된 뒤에도 달라붙는 성질이 있다. 고체는 일단 부서지거나 분리되고 나면 미립자들이 다시 달라붙지 않는다. 고체를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금속을 용접할 때처럼 온도를 높여 고체를 액체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물을 볼 때 우리는 단지 경계가 있는 확장된 형태만을 본다. 이 확장된 형태 즉 사물의 '형상'은 응집력 때문에 가능하다.
열성은 열(기)의 요소이다. 이 요소는 성숙 시키고 강해지도록 하는 성질이 있고 다른 삼대(三大)에 열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모든 중생들과 식물의 생명력은 이 요소에 의해 보존된다. 모든 사물의 형체에서 우리는 열기를 느낀다. 이것은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대상이 차다고 말할 때 이것은 이 특별한 대상의 열기가 우리 몸의 열기보다 낮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대상의 온도가 우리 몸의 온도보다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차가움'이라는 것도 또한 낮은 상태에 있는 여의 요소라는 것이 확실하다.
운동성은 운동의 요소이다. 이것은 위치의 이동이다. 이것 또한 상대적이다. 한 물체가 움직이느냐 아니냐를 알기 위해서는 고정된 한 점이 필요하다. 이 점에 의해서 운동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 속에서 움직임이 전혀 없는 대상은 없다. 그래서 '안정성'이라는 것도 운동의 요소가 된다. 운동은 열에 의존한다. 열이 전혀 없는 원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열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이론으로나 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원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물질적 대상은 사대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우세해 보일지라도 모두 사대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견고성의 요소가 우세하면 이 물질적 대상은 고체로 불린다.
항상 공존하는 이 사대로부터 24가지의 다른 물질적 현상과 성질들이 파생된다. 이 파생물들에는 다섯 가지 감각 기능인 눈(眼.안), 귀(耳.이), 코(鼻.비), 혀(舌.설), 몸(身.신)과 이들에 대응하는 감각 대상, 즉 볼 수 있는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이 포함된다. 물질의 집합체는 인간의 몸에 속하건 외부 세계에 속하건 모든 물질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2. 두 번째는 감각(受.수)의 집합체이다. 우리의 모든 감각은 이 집합체에 속한다. 감각에는 유쾌한 것, 불쾌한 것,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것 세 가지가 있다. 감각은 접촉에 의해서 일어난다. 형체를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물체를 만지고, 의식의 대상을 인식했을 때 인간은 감각을 느낀다(이 여섯 종류의 감각들은 각기 눈,귀,코,혀,몸, 마음을 통해서 일어난다. 불교 사상에서는 마음을 여섯 번째 기능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눈, 형체, 안식(眼識)이 함께 만나는 것, 이것이 바로 접촉이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화합 이다. 접촉이란 감각 기관(안이비설신의), 감각 대상(색성향미촉법), 감각에 대한 의식이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가 모두 함께 존재할 때 감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각과 접촉의 고유한 성질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들이 동일한 대상으로부터 똑같은 감각을 느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어떤 특별한 대상에서 유쾌한 느낌을 가지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불쾌한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람은 동일한 대상에서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의식의 작용들이 가지는 기능에 달려 있다. 게다가 어떤 사람에게 유쾌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던 감각 대상이 다른 환경에 처했을 때는 그에게 불쾌하거나 중성적인 느낌을 일으킬 수 도 있다. 그리고 한 감각 기능에는 유쾌한 것이 다른 감각 기능에는 불쾌할 수 도 있다. 예를 들면 과일이 볼품이 없어 보여도 맛있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감각이 어떻게 다양한 방식의 접촉에 의해 조건지어지는가를 알게 된다.
3. 세 번째는 지각(想.상)의 집합체이다. 지각 기능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대상 등 둘 다를 인식하는 것이다. 감각과 마찬가지로 지각에도 형상에 대한 지각, 소리, 냄새, 맛, 접촉, 의식의 대상에 대한 지각 등 여섯 가지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각은 단순한 감각 지각을 말한다.
자각(의식의 기능)과 인식(지각의 기능)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다. 의식이 대상을 자각하게 되면 동시에 지각의 정신적인 요소가 대상의 두드러진 특성을 파악해서 이 대상과 다른 대상을 구별하게 된다. 이 두르러진 특징 때문에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같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사실 매번 우리는 같은 대상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억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지각이다.
지각이 종종 우리를 속인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지각의 환상 또는 지각의 왜곡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은 예가 그 점을 잘 나타내 준다. 들판에 씨를 뿌린 농부는 그 씨앗을 보호하기 위하여 허수아비를 세운다. 그러면 당분간 새들이 허수아비를 사람으로 알고 덤벼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지각의 왜곡이다. 마찬가지로 감각과 의식의 대상들도 잘못된 인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들의 마음을 속인다. 그래서 붓다는 지각을 아지랭이에 비유한다.
왜곡된 지각이건 아니건 어떤 특별한 지각이 자주 일어나게 되면, 그 지각은 점점 강해져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그래서 그 지각을 제거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의 결과에 대해서는 [숫다니파타(Suttanipata)]의 다음 게송에 잘 설명되어 있다.
지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그에게는 더 이상 속박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통찰력을 얻은 사람은 모든 미혹을 멈춘다 그러나 지각에 매댤려 있고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이 세상과 다투면서 살아간다 (847)
4. 네 번째는 의지적인 형성력(行.행)의 집합체이다(의지적인 형성력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오온 중에서 행(行.Samkhara)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집합체에는 위에서 언급한 감각과 지각을 제외한 모든 정신적인 요소들이 포함된다. 아비달마에서 52가지의 정신적인 요소를 말하고 있다. 감각과 지각도 이 52가지 정신적인 요소에 속하지만 이것들은 의지적인 활동이 아니다. 나머지 50가지는 모두 의식적, 의지적 형성력에 속한다.
의지는 의식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한다. 불교에서는 어떤 행위에 의지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그 행위를 업(業)으로 여기지 않는다. 감각이나 지각과 마찬가지로 이 의지적인 형성력의 집합체에도 형상을 향한 의지, 소리, 냄새, 맛, 육체적 접촉, 의식을 대상을 향한 의지 등 6가지가 있다.
5. 다섯 번째는 의식(識)의 집합체 이다(일반적으로 심(心.citta), 의(意.mano), 식(識.vinnana)는 동일한 말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르게 작용한다). 이것은 오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 의식 없이는 의식의 부산물, 즉 의식의 작용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52가지의 모든 의식 작용의 저장소가 된다. 의식과 의식의 작용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상호 의존적이며 공존한다.
그러면 의식은 기능은 무엇인가? 감각, 지각, 의지적인 형성력과 마찬가지로 의식에도 여섯 종류가 있고 그 기능도 다양하다. 의식은 의식의 토대와 대상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모든 감각들은 감각 기능(기관)들과 외부 세계가 접촉함으로써 경험 된다.
정신적인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의 기능은 다른 다섯 가지 기능들처럼 만지거나 지각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눈은 색깔의 세계를, 즉 볼 수 있는 대상을 인식하고, 귀는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마음(의식)은 개념과 사고의 세계를 인식한다. 기능(indriya)은 문자 그대로 말하면 '장(長)', '주인'을 의미한다. 형상은 눈의 기능에 의해서만 볼 수 있지 귀로 볼수는 없다. 소리도 귀의 기능에 의해서만 들을 수 있다. 사고와 개념의 세계로 넘어오면 의식의 기능이 모두 의식계의 주인이 된다. 눈은 사고할 수도 없고 개념을 형성할 수도 없다. 그러나 눈은 볼 수 있는 형상, 즉 색깔의 세계를 보는 도구이다.
여기서 의식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눈과 형체, 귀와 소리 등 감각 기능과 감각 대상들 사이에 기능적인 관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자각은 의식을 통해서 온다. 바꾸어 말하면 적절한 의식이 없다면 감각 대상은 특별한 자극을 느낄 수 없다. 눈과 형상이 동시에 존재할 때 이 둘에 의지해서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귀와 소리가 동시에 존재할 때 이식(耳識)이 있고, 나아가 의식의 기능과 의식의 대상이 동시에 존재할 때 의식(意識)이 있게 된다(중부 148). 그리고 눈과 형상과 안식이 함께 있을 때, 이 동시 발생을 접촉이라 한다. 이 접촉으로 부터 감각등이 있게 된다.
의식은 다섯 가지 감각의 문과 의식의 문, 이 여섯 가지 문(六根.육근.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에서 일어나는 자극을 통해 발생한다. 감각 기능과 감각 대상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식이 일어나면 의식도 독립되지 못하고 조건지어지게 된다. 의식은 물질의 반대 개념인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다. 마음이라고 불리는 여섯 가지 기능의 영양분이 되는 사고와 생각 또한 의존적이고 조건 지어져 있다. 사고와 생각은 다섯 가지 다른 감각 기능들(五根.오근. 안이비설신)이 경험하는 외부 세계에 의존한다.
이 다섯 가지 기능들은 단지 현재에서만, 그것도 감각 대상들이 특별한 기능과 직접 접촉했을 때만 작용한다. 그러나 의식 기능은 이미 감각 기관에 의해 인식된 형상, 소리, 냄새, 맛, 또는 접촉이 있건 없건 간에 감각 대상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과거에 눈이 접촉했던 볼 수 있는 대상은 비록 대상이 눈 앞에 없다 하더라도 바로 이 순간 마음의 기능에 의해서 마음에 떠 올릴 수 있다. 다른 감각 대상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주관적이다. 그래서 이 감각들 중에 어떤 것은 경험하기 어렵다. 의식의 이러한 활동은 미묘해서 때때로 일반적인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그래서 온 우주는 단순한 감각 덩어리가 된다. 색깔 있는 천과 뭔가 견고한 것, 즉 펼쳐져 있는 어떤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하나의 실체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의식이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현상들을 단지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해석이 감각 통로를 통해 나타난 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물질 세계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화학적인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크기, 형태뿐만 아니라 부피도 없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다섯 가지 감각 기관에 의해 인식(분별)되는 것도 아니다. 의식은 다른 요소들(오근)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의 주인이다. 그리고 의식은 '자아', '영혼'의 형태로 영원히 지속되는 정신이 아님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의식은 물질에 반대되는 정신도 아니고 물질에서 파생되는 것도 아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자아 또는 영혼의 형태로 된 의식이 인간 내부에 존재해서 일생을 통해 지속되며 죽음에 이르러서는 한 생명체에서 다른 생명체로 윤회하여 현생과 다음생을 연결시켜 준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붓다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우리는 맛지마 니카야(Majjhima-nikaya)의 38번째 경에서 아주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사티(Sati) 라고 하는, 붓다의 한 제자가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세존께서 가려쳐 주신 법은 저의 의식이 재생하면서 윤회하고 떠돌아 다닌다고 이해 했습니다." 사티가 붓다에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자 붓다는 그에게 물었다. "사티야, 그 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저기서 행한 선하고 악한 행위의 결과를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의식이라고 합니다." "이 어리석은 사티야, 내가 그런 식으로 법을 가르친다고 누구한테 들었느냐? 의식은 조건이 있어야 일어나고 조건이 없으면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내가 여러 번 말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나서 붓다는 의식의 다양한 형태를 설하고 예를 들어 보임으로써 어떻게 의식이 조건에 의존 해서 일어나는지를 명확히 밝혔다.
이상이 오온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다. 오온 가운데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들은 변하기 마련이다. 철학은 제쳐두고 과학적인 견지에서 물질을 본다 하더라도, 조건지어지고 합성된 것은 어느것도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어느것이든지 고통을 담고 있고 슬픔을 내포하고 있다.
독자들이 이러한 괴로움에 대한 불교의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려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붓다가 지적했듯이, 모든 존재는 즐거움과 기쁨을 열망한다. 그들은 불쾌함과 기쁘지 않은 것을 몹시 싫어한다.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고 이미 행복한 사람들도 점점 더 많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불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암울하고 불교도들은 정신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인생을 살아간다. 삶의 진실한 본질을 이해한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사물의 무상함 때문에 당황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고 주관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늙음, 병듦, 죽음과 같은 인생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만나면 사람들은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그러나 용감하게 그것드로가 맞설 준비가 되어 있을 때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이렇게 인생을 바라보는 것은 염세적인 것도 아니고 낙천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사실적인 과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물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불안의 원리, 즉 괴로움이라는 고유한 성질을 무시하는 사람은 삶의 변화에 직면했을 때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마음을 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계속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대와 정반대로 일이 전개되면 더 많은 괴로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인생과, 인생에 관계된 일들에 대해 초연함을 닦을 필요가 있다. 초연함은 좌절, 실망, 정신적인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다. 한 가지 일이나 또 다른 일에 매달리지 않고, 그것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것이 마음을 통제하는 확실한 치료법이다. 집착하는 마음을 뿌리째 뽑지 않는다면 불만족이 항상 따라다닐 것이다.
붓다는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보고 행복을 행복으로 본다. 그래서 우주의 모든 즐거움도 다른 조건 지어진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덧없는 것이라고 설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덧없는 즐거움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즐거움도 조만간 불만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초연함이 염세주의 낙천주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해독제이다. 초연함은 평등한 마음이지 무뚝뚝한 무관심이 아니다. 이것으 녹요하고 집중된 마음의 결과이다. 인생의 변화에 직면했을 때 마음에 혼란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초연함을 닦는 사람은 당황하지 않는다.
한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자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녀는 달관에 이른 듯한 대답을 했다.
"그는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왔고, 초대 받지 않았는데도 떠났다. 그가 왔을 때 처럼 갈 때도 그렇게 갔다. 한탄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처럼 사람들은 초연함으로 불행을 이겨 낸다. 이것이 바로 초연함의 이점이다. 초연함은 이익과 손실,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역경에 동요되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는 올바른 견해로 이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생긴다. 이와 같이 고요하고 평등한 마음이 인간을 괴로움으로부터 깨달음과 해탈로 인도한다.
절대적인 행복이란 조건지어지고 합성된 사물들에서 생기지 않는다. 이 순간 대단한 기쁨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 다음 순간에는 실망의 원천으로 바뀐다. 즐거움은 금세 끝나 버리고 결코 지속되지 않는다. 감각 기능의 단순한 만족을 우리는 즐거움, 기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만족은 행복이 아니다. 기쁨 또한 괴로움이다. 기쁨도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견해로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는 내적인 눈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계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잃도록 하는 단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은 한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단지 고통만 안겨 줄 뿐이다. 그것들은 인생의 비참한 병폐에 일시적인 통증의 완화만 가져다 줄 뿐이다. 이것이 변화로 인해서 생긴 괴로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움이 결코 활동을 멈추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괴로움은 이런저런 형태로 작용하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의 형태로 항상 활동 중이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괴로움은 오온의 결합에서 생성되고 발달하고 소멸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오온의 결합을 제외한다면 기분 나쁜 괴로움이란 있을 수 없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모든 존재는 부조화와 불만족을 피하고 즐거움, 기쁨,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지만 행복이 계속 지속되지는 못한다. 즐거움은 마치 두 고통 사이의 틈새처럼 보인다. 오온의 결합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괴로움, 불만족이 있다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괴로움도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괴로움도 조건지어진 것이고 변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는 고통의 이러한 모습을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탄생의 아픔, 희망 없는 날들의 아픔, 피 끓는 청춘의 아픔과 중년의 아픔, 으스스한 황혼의 아픔과 숨막히는 죽음, 이러한 것들이 가련한 우리의 인생을 채우네.
붓다도 이렇게 설했다.
오온은 참으로 짐이네. 그 짐을 내려 놓는 것이 바로 행복이네. 이것은 열반, 절대적인 행복이다. (법구경 204)
제자들에게 괴로움의 의미를 설할 때, 괴로움을 극복한 붓다는 어두운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항상 행복해 보였고, 고요했으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음 게송은 만족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잘 보여 준다.
진실로 행복하게 살아간다네 짐이 없는 우리들은 항상 기쁨을 머금고 살아간다네 빛을 내는 신들(光音天)처럼 (법구경 200)
그는 제자들을 우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깨달음의 한 요소인 기쁨이라는 매우 중요한 자질을 계발하도록 고무했다. 붓다의 이러한 훈계를 [테라 가타(Thera-gatha)]와 [테리 가타(Theri-gata)]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비구.비구니들의 기쁨에 찬 노래들이 실려 있다. 불교를 냉정하게 연구 한다면 불교가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 주는 메시지이지 염세주의나 패배주의적인 철학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재차 강조 드리지만 ... 여기에 올려지는 글들은 불교를 알기위한 아주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교리들 입니다. 이러한 교리를 알고 불교를 공부하느냐 아니면 그냥 막연하게 불교를 공부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180도 달라진다고 생각 합니다. 불교도라믄 분들이 무상이나 오온도 제대로 설명치 못하고 나아가 사성제나 팔정도에 무지하다면 그것은 결코 자신 스스로를 올바른 믿음으로 끌고 가지 못할 것 입니다.
기본적인 교리도 모르면서 불교를 믿게되면 그것은 곧 맹목적인 믿음으로 흐르게 되고 맹목적인 믿음은 기복을 낳게 되고 기복은 무지한 중생들에게 업만 쌓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또한 붓다가 누구이고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것은 항로를 표시한 지도도 없이 망망대해 바다로 배를 몰고가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붓다의 진실되고 올바른 가르침도 모르면서 망망대해에서 몇천억겁을 헤메도 결고 붓다의 옷자락을 부여 잡을 수 없습니다
밀린다 왕문경에 보면...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중에서 어느것이 더 크냐는 왕의 질문에 나가세나 스님은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분명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왜 모르고 짓는죄가 더 큰지 한번 곰곰이 깊이 생각해 보십시요. 그리고 밀린다 왕문경에 그 이유가 나와 있으니 직접 찾아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공부 안해서 무식해서 짓는 죄를 불교에서는 결코 용서치 않습니다.
한국불교 수행승과 이곳 불교 수행승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곳 수행승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잘잘못을 분명히 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잘잘못을 알기에 참회도 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노력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 수행승들은 무식하고 무지하기에... 자신의 말과 행동이 과연 붓다의 가르침과 틀린지 맞는지 조차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맞는지 틀린지도 모르니 고칠수도 없고 올바르게 갈수도 없고 참회도 못하고...
계속하여 나쁜 업만 쌓입니다. 틀리는지 맞는지도 고칠 수도 없고... 나중에 죽어서 잘 몰라서 그랬다고 해봤자 헛일 입니다. 짓는대로 가는게 업인데 잘 몰라서 나쁜짓이인줄도 모르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그 업이 없어지겠는지요..?? 그래서 나가세나 스님은 무지해서 짓는죄가 더 무겁다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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