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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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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진리 율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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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805회 작성일 13-10-1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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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기본은 부처님이 법(진리)을 깨달았다는 것과 그 깨달은 법을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 - 즉 가르침이라는 법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체험이 말을 통해 전해졌다는 것에 있다.
이 깨달은 진리(所證의 법)를 말해진 가르침(所證의 법)의 관계와 그 내용을 불전에서는 부처님이 연기의 이치를 관해서 법을 깨닫고 초전법륜에서 4제8정도의 가르침을 설했다고 하는 형식으로 정식화하고 있다. 팔리성전의 《율장》에서는 보리수 아래서 부처님의 행동을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 세존은 처음 깨달음을 얻은 이래 칠일간 보리수 아래서 좌선하고 있었다. 칠일이 지난 뒤 초저녁에 세존은 연기를 순역의 순서로 생각했다....'무명(無名)에 의해 행이 있고, 행(行)에 의해 식이 있으며, 식(識)에 의해 명색이 있고, 명색(名色)에 의해 육입이 있으며, 육입(六入)에 의해 촉이 있고, 촉(觸)에 의해 수가 있으며, 수(受)에 의해 애(갈애)가 있고, 애(愛)에 의해 취가 있으며, 취(取)에 의해 유가 있고, 유(有)에 의해 생이 있으며, 생(生)에 의해 노사와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생긴다. 이와 같이 하여 이 고의 적취(積聚)가 모두 집기(集起)한다. 그러나 완전히 탐욕을 떠난 결과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한다.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한다. …생이 멸하면 노사와 우비고뇌가 지멸한다. 이와같이 하여 이 고의 적취가 모두 지멸(止滅)했다….'


그리고 세존은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열심히 명상하는 바라문에게
제법이 나타났을 때
그 의심은 모두 사라졌다
그것은 유인(有因)의 법을 알았기 때문――.

다음에 세존은 한밤중에 같은 연기를 순역의 순서로 생각하고 다시 즉흥의 시를 읊었다.

열심히 명상하는 바라문에게
제법이 나타났을 때
그 의심은 모두 소멸한다
그는 제연(諸緣)의 멸을 알았기 때문에.

또다시 세존은 새벽녘 무렵 연기의 순역을 순서에 따라 생각한 후 다음의 시를 읊었다.




열심히 명상하는 바라문에게
제법이 나타났을 때
그는 마군을 쫓아버리고 일어나서
태양이 하늘을 비치게 되었다.


《율장》은 다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부처님이 길을 따라서 다섯 비구가 있는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도착했다. …부처님은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비구들이여, 출가자로서 해서는 안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욕락에 빠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이다. 두 가지는 어느 것도 성스러운 것이 아니며 아무 소용이 없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가까이 하지 않고 중도를 깨달았다… 비구들이여,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이다. 즉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다. 이것이 여래가 깨달은 중도이며 적정·신통·정각·열반을 향하는 길이다.
비구들이여, 고라는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고이며,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죽는 것도 고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갖고자 해도 갖지 못하는 것, 싫은 사람과 만나는 것, 그리고 집착의 소재로서 오온(五蘊)이 치성(熾盛)한 것이 모두 괴로움이다.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윤회로의 재생을 가져오는 것, 기쁨과 탐착을 가져오는 것, 여기 저기서 기쁨을 구하는 것, 즉 갖고자 하는 갈애 생존에의 갈애, 모든 삶으로부터 떠나려는 갈애이다.

괴로움의 지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이미 말한 갈애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다. 즉사·방기·해탈·무집착이다.

괴로움의 지멸에 이르는 도라고 하는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이다…
고성제라는 것은 이것이다… 고성제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야 한다… 고성제는 널리 알려졌다. 고집성제라는 것은 이것이다… 고집성제라는 것은 반드시 끊어야 한다… 고집성제는 반드시 끊어졌다. 고집성제라는 것은 이것이다… 고집고집멸성제라는 것은 현증되어야 한다…고집멸성제는 현증되었다.고멸도성제라는 것은 이것이다… 고멸도성제라는 닦아야 한다… 고멸도성제는 닦아졌다.

비구들이여, 또 이 사성제를 이상과 같이 삼전(三轉)과 십이행상(十二行相)에 의해 여실히 지견하지 않을 때에는… 우리들은 무상정등각을 지금 현재에서 깨달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사성제를 삼전십이행상을 통해 깨닫게 될 때 우리들은 신들과 아수라와 브라흐만을 포함한 사문과 바라문, 인간과 중생들 중에서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다음의 지각이 생겼다….
"내 마음의 해탈은 부동이다. 이것이 윤회로서는 최후의 생존이다."




이 《율장》의 기록이 정리하고 있는 바를 요약하면 부처님이 깨달은 법은 연기(十二支)이며, 초전법륜에서는 고락의 두 변을 떠난 중도로서의 팔정도와 그것을 포함한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이같은 견해가 교단에서 정설화된 것은 물론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다음의 일이겠지만 '연기'의 이치와 '사성제'로 현실을 분석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팔리어 율장의 이러한 기술과 견해는 기본적으로 한역된 불전에 전해지고 있는 것과 같다.

사제의 교설을 보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부처님이 '사제를 깨달아' 위없는 정등각을 얻었다고 말한 일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제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의 제시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연기의 이법(理法)이 보다 포괄적으로 나타나 있음을 알 수가 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한다.
연기설은 십이지설이 나중에 연기설의 대표가 되지만 《율장》에서는 그것을 증득함으로써 부처가 되었다고는 확실히 말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정각자가 되어서 십이지연기를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제설과 마찬가지로 깨달은 진리에 대한 하나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사제와 십이연기가 서로 틀린 것은 4제는 교설로서 부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인데 반해 십이지연기는 부처님의 내관으로만 멈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십이지 연기에는 보다 오랜 형식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에 의하면 고찰의 출발점이 무명이 아니고 노사(老死)등의 고(苦)라는 사실이다. 즉 팔리어 성전《상응부경전》과 한역의 《잡아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비구들이여, 내가 아직 보살이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생노병사를 계속한다. 그뿐이랴. 그 고통에서 떠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노사가 있는 것인가. 태어남(생)을 인연해서 노사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태어나는가.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행이 있는가.
무명에 의해서 행이 있다."


여기에서는 고(苦)에서 소급하여 그 생기의 원인을 추구한 끝에 무명에 도달하고 있다. 이것은 4제설에서 고성제로 시작하여 고집성제→고집멸성제→고집멸도성제에 이르는 것과 같은 틀(형)이다. 이러한 틀은 부처님 사고방식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고 있다.
12지연기가 완성되기 이전에는 노사의 괴로움에서 시작하여 갈애로 끝나는 오지 연기, 식과 명색의 상호관계에서 끝나는 10지 연기, 또는 9지 연기설도 있었다. 더욱 간단하게는 고와 고의 원인을 갈애에서 찾는것도 있고 이밖에도 여러 가지로 고의 원인이 추구되고 있다, 앞에서 말한 4제설의 고집이제(苦集二諦)는 말하자면 이같은 여러 가지 종류의 연기설을 포함하는 가장 간단한 도식이라고 할 수 있다. 12지연기는 다만 그 한 유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 노사등의 고가 멸한다'는 관찰도 세 번째 고집멸성제를 추가함으로써 그 속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러나 4제설은 그 후에 12지연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고의 멸을 달성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을 도성제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고락 양극단을 떠나 중도의 가르침으로 구체적으로는 8정도가 그것이다. 이 실천방법을 가르침으로써 불교는 불도 즉 깨달음을 향한 도가 되었다.
'고를 알고 고의 원인을 알고 이것을 끊는 것' 즉 고의 멸은 도를 닦음으로써 현증된다. 고의 멸을 현증하는 것만이 목적이며(부처님은 이미 그 목적에 도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향하는 길(실천적 수단)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권하는 것이 부처님 설법의 목적이다.

이같이 4제의 가르침에는 불교에서 가르치는 독특한 방법론이 그속에 포함되어 있다. 동시에 그 전체가 연기의 이치를 나타내고 있다. 즉 부처님이 깨달은 법, 진리라는 것은 '고(苦)는 연생(緣生)'이라는 것이다.사제설이 가진 교리상의 무게는 그것이 최초의 설법(초전법륜)이며 '설하여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4제는 법의 틀이며 연기는 그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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