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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짠의 문(門) 위빠사나로 완전한 궁극에 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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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879회 작성일 13-01-1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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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위빠싸나로 완전한 궁극의 도달

아짠이 위대한 마음 챙김과 지혜로써 최대한의 힘을 쏟아 정진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밤늦게 그는 산 옆에 외롭게 홀로 서 있는 무성한 나무 아래, 크고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서 명상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무 주변은 깨끗하였고, 온화한 산들바람이 불어 고요한 경치에 시원함과 편안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곳은 아짠이 때때로 낮 동안 앉아 있곤 하던 장소였다.
필자는 그 지역이나 산 혹은 나무의 이름을 메모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정확한 장소는 알 수가 없다. 필자의 마음은 아짠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어서, 세세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도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의 경이로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필자도 ‘과연 나도 내 힘으로 그와 같은 도업을 달성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면서, 자기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당시에는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어느 날 문득 아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아짠은 12연기법1)에 대해서 관(觀)하였다. 경행과 좌선을 통하여 12연기를 순차적으로 관하기도 하고 역순으로 관하기도 했다. 무명과 욕망이 마음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갖가지 고통을 빚어내는 거대한 잠재의식 세계를, 앞으로 뒤로 왕래하기를 반복하면서 미세하게 관찰했다. 이것은 생사를 초월하는 위대한 마음 챙김과 위대한 지혜라는 무기로 무장한 아짠과 교활한 전술로 악명 높은 무명과의 싸움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무명은 방어는 물론 공격에서도 교활하다. 즉, 교묘하게 회피하는 방식으로 방어술책을 쓰며, 공격할 때에는 적에게 갑작스럽게 달려들어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무명은 지각 있는 존재(有情)의 마음을 자신의 손아귀에 움켜쥐고, 시작도 끝도 없는 영겁의 세월 동안 거대한 윤회의 왕국에서 군림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그날 밤 아짠과의 생사를 건 투쟁에서는, 강력하고 교활했던 삼계(三界)의 군주도 무력하게 물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위대한 마음 챙김과 위대한 지혜의 냉혹한 타격 앞에 무참히 쓰러졌다. 이제까지 어떤 세속인에게도 위협받지 않았던 그의 권위는 아짠의 도전을 받았고, 마침내 완전히 패배해 버렸다.
아짠은 그 당시에 모든 세계가 경외와 놀라움으로 요동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천상의 세계에서 여러 천사들은 붓다의 또 하나의 성스러운 제자가 탄생했다고 외치며, 진심으로 아짠의 승리를 기뻐하며 감탄했다. 하계의 인간들은 이 사실을 몰랐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향락에 탐닉하여 한 인간의 마음이 최상의 다르마를 실현시켰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후 우뢰와 같은 경탄의 함성이 사라졌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모든 세상을 감싼 다르마의 완벽한 청정이었다. 아짠은 경이로움에 숨이 막혀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명해 줄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가르침을 베풀고자 하는 자비로움도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 단계의 다르마가 너무나도 미묘하고 심원하며 위대해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이해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주저하며, 홀로 다르마의 경이로움을 체험하는데 만족하였다. 그는 모든 진리를 깨닫고 해탈을 위해 세상에 가르침을 편 붓다에게 더할 수 없는 감사를 느꼈다. 붓다의 메시지는 모든 면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으로 밤을 새워가면서, 붓다의 덕망과 탁월함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그 상태에 빠져있고 싶었다. 다르마는 너무도 심원하여서 그것을 설명하려 들면 오히려 적대적인 비판만을 불러일으키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궁극의 다르마를 발견하자마자 이러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그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는 시야를 확대하여 자신의 수행을 재음미하고 다른 사람들의 가능성을 탐지하게 되었다.
붓다의 길은 그처럼 의욕을 갖고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붓다가 법의 수레를 굴린 이후로, 동일한 다르마를 깨달을 수 있고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제자들이 셀 수 없이 늘어났다. 붓다가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다르마를 성취한 제자들은 무수히 많았다.
나중에 떠오른 이러한 생각으로, 그는 다시 한번 붓다의 메시지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를 들려주기로 결심하였다. 존경과 관심을 갖지 않고 건성으로 듣는 사람에게는 가르침의 핵심이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다르마를 당연하고 흔해빠진 이야기로만 취급할 것이다. 궁극의 다르마는 각고의 시련을 겪은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들은 지극히 귀한 다르마를 ‘대양’에 던져 버리고 만다. 마치 헌신짝을 버리듯.
다르마는 그것을 경청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해진다. 의사는 환자의 고통과 아픔을 치료하려는 목적으로 약을 처방한다. 환자들이 질병을 지닌 채로 살기를 꺼리지 않는 한, 그들은 의사의 충고를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르마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스스로에 의해 충족되므로, 모든 환경에서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위하여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다. 완벽하게 순수하고 확고부동한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방해하거나 혼란시킬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아짠은 대부분의 시간을 숲 속에서 머물기를 좋아한다. 그는 상황이 허락할 경우에만, 때때로 다른 사람들을 도왔다. 다르마가 있는 곳에는 평화와 행복이 있다. 마음이 곧 다르마가 될 때, 그 자체가 행복과 평화이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구하기 위하여 싸우는 것은 자신에게 고통을 부과할 뿐이다. 이런 까닭에 아짠은 다르마를 설법할 때, 매우 신중을 기한다. 절대로 마구잡이로 하지 않는다. 붓다가 채택한 방법과 수단을 항상 염두에 두고 따라야 한다. 이것은 아짠의 수행에 항상 지침이 되어 왔다. 또한 그것은 수행하는 다른 불교도들에게도 지침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 통제를 통해 붓다의 율법을 따라 현재와 미래에 충분한 공덕을 얻을 것이다.   
설법하고 수행하는 방법을 다시 곰곰이 생각한 후, 아짠은 자신의 마음에 나타났던 궁극의 다르마를 다시 관(觀)하였다. 그것은 충만하고 완전한 다르마의 드러남(顯現)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전혀 예상치 못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죽음과 탄생은 너무도 경이로워서 이제까지의 어떤 것과도 비견될 수 없었다. 이처럼 새롭고 경이로운 탄생과 함께 나타난 통찰은 본래 마음속에 내재해 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때까지 미처 알지 못한 것이었다. 그에게 밝게 비추기 시작한 통찰의 빛은 너무도 경이롭고 위대해서, 그토록 심원하고도 역설적인 다르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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