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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滿空)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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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284회 작성일 18-02-19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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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滿空)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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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선사는

 근대 한국 선의 중흥조인 경허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시킨 위대한 선지식이다.

  스님의 법호는 만공, 법명은 월면이다.


  1883년 13세 되던 해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주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경허스님을 따라

서산 천장사로 와서 태허스님을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받고 법명을 월면이라 하였다.


  경허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를 짓고

수 년 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들을 제접하며,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선학원의 설립과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조선총독 미나미에게 직접 일본의 한국 불교정책을 힐책하였다.


      이는 일제치하의 치욕스러운 불교정책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만공의 사상은

   생사를 초탈한 선사의 가풍이라 할 것이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전월사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입적하니, 1946년 10월 20일 그의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그 뒤 제자들이 정혜사 아래에 만공탑을 세우고 진영을 경허·혜월 스님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하였다.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한 그의 문하에는

   비구 보월·용음·고봉·금봉. 서경·혜암·전강·금오·춘성·벽초·원담등과 비구니 법희·만성·일엽등

   당대에 뛰어난 제자들이 있다.

  

     [만공 스님 일화]


     어느 날 제자와 함께 고갯길 산마루를 오르고 있었는데 제자가 다리가 아파 더는 못 가겠다고 하자,

   만공이 마침 길가 밭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던 아낙네를 와락 끌어안으니, 그 남편이 소리를 지르며

   좇아오는 바람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고개를 훌쩍 넘었다.

     나중에 제자가 "스님,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하자,

    "이 놈아, 네가 다리 아파 못 가겠다고 했지 않느냐?

   덕분에 여기까지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오지 않았느냐" 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스승 경허의 일화라고도 하는데,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며 마음을 중시한 경허와 만공의 선풍을 대변하는 이야기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1930년대 말, 만공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당시 만공 스님을 시봉하고 있던 어린 진성사미(오늘의 수덕사 원담 노스님 이라는 설도 있다)는

   어느 날 사하촌(寺下村)의 짓궂은 나뭇꾼들을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줄 것이니 따라 부르라는 나뭇꾼의 장난에 속아 시키는 대로 

   ‘딱따구리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 멍터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던 철없는 진성사미는 이 노랫말에 담긴 뜻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진성사미는 나중에 절 안을 왔다 갔다 하며 구성지게 목청을 올려 이 해괴한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성사미가 한창 신이 나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마침 만공 스님이 지나가시다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스님은 어린 사미를 불러 세웠다.


         “네가 부른 그 노래, 참 좋은 노래로구나, 잊어버리지 말거라.”

         “예, 큰스님.”


     진성사미는 큰스님의 칭찬에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서울에 있는 이왕가(李王家)의 상궁과 나인들이 노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청하였다.  만공 스님은 쾌히  승낙하고 마침 좋은 법문이 있은니 들어보라 하며

   진성사미를 불렀다.


          “네가 부르던 그 딱따구리 노래, 여기서 한 번 불러 보아라.”


       많은 여자 손님들 앞에서 느닷없이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라는 노스님의 분부에 어린 진성사미는

   그 전에 칭찬받은 적도 있고 해서 멋들어지게 딱따구리 노래를 불러 제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자알 뚫는데….”


      철없는 어린사미가 이 노래를 불러대는 동안 왕궁에서 내려온 청신녀(淸信女)들은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때 만공스님이 한 말씀했다.


     “바로 이 노래 속에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력의 직설 핵심 법문이 있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딱따구리 법문에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이 노래에서 한낱 추악한 잡념을 일으킬 것이오.

   원래 참법문은 맑고 아름답고 더럽고 추한 경지를 넘어선 것이오.

   범부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뚫린 부처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텅구리오.

   뚫린 이치을 찾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오.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이라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지극히 가까운데 있소.

      큰 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어 원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결국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 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 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이 것이오.”


       만공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그제서야 청신녀들은 합장 배례했다.


     서울 왕궁으로 돌아간 궁녀들이 이 딱따구리 법문을 윤비(尹妃)에게 소상히 전해 올리자

   윤비도 크게 감동하여 딱따구리 노래를 부른 어린 사미를 왕궁으로 초청,

   ‘딱따구리’노래가 또 한 번 왕궁에서 불려진 일도 있었다.


     만공 스님은 다른 한편으로는 천진무구한 소년 같은 분이었다.


       특히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린애처럼 손짓발짓으로 춤을 추며

   ‘누름갱이 노래’를 부를 때는 모두들 너무 웃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고 한다.


         오랑께루 강께루

         정지문뒤 성께루

         누름개를 중께루

         먹음께루 종께루


       한국 불교계에서 첫째 가는 선객,

    만공 스님은 타고난 풍류객의 끼도 지닌 분이셨다.


       1946년 어느 날 저녁, 공양을 들고 난 스님은 거울 앞에 앉아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을 동고동락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 동안 수고 했네"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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