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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지켜낸것 결국은 불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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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073회 작성일 12-08-21 08:55

본문

나라를 지켜낸 건결국 불교
......
불숭유했던 조선보다 더 나을거 없던 시절이 고려시대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특히 권부출신들이 승려가 정치에 끼어듬을 비판 할적에 극악한 대응이 역사날조라는 겁니다.
승려가 애초 정치에 끼어든게 아니라 사대부들의 무능을 타파하고자하는 뜻이였다는건 역사인식을
바로 알려는 사학자들한테는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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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병운동을 논의중인 서산대사와 승님들-
 
사학하면 다시 나오는 말이 있는데 이병도맥류의 사관과 정인보맥류의 사관이 있습니다.
정인보 맥류에는 신채호선생도 끼겠지마는 한국의 사학은 친일파였던 이병도와 그의 스승 일본인에
의한 만행의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님 또한 그들의 사학을 배우므로써 객관적이지 못한 사관을 드러내는 것이라 보고 있지요.
특히 묘청문제, 보우,신돈문제는 불교왜곡의 정수로 보이고 아시다 싶이 삼국사기를 진 김부식과
유학을 종교로 승화시키려한 안향등등 이러한 인물들이 바로 자기 자신만이 아는 권신들이였기에
그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님이 모르고 설을 푸는거라고 할수 있습니다.
 
승려가 정치에 끼어든 게 아니다
이들은 몸만 고려인이였지 명의 사대주의 물들어 명의 신하라 할 정도로 고려를 명에 넘기려
하던자들이였습니다. 이런류들이 사대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극성을 부릴때 왕은 이에
대한 근심을 왕사제도로 승려가 존속하고 있을 당시 고민에 찬 왕은 왕사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고갈 소지가 있는 겁니다.
승려가 정치에 낀것은 썩어빠진 권부들에 대한 개혁정치를 하려 뛰어 들었던거지 권부들처럼
개인영달을 위해 뛰어 들었다고 보지 않는거지요.
정치인들이 지금도 썩었지마는 전등이 없던 시절에 무슨 일들이 밤낮으로 일어 났겠습니까?
보다 더 추악한 사람들이 이전투구와 모리배들이 극성을 부렸을 시기에 승려들이 나라를 구해보고자
노력한 것이 무슨 욕 될 역사입니까.
 
결국, 나라를 구한 건 언제나 불교
고려 말고도 국난이 있을 때 불교도들이 어떠한 처신을 했는가요.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영조시대엔 사대문(도성)앞에 중들이 출입 하는것을 막았을뿐만 아니라
출입한 승려를 죽여도 살인이 아니라 할 정도로 극악 스럽게 행패로 일관했던 공자와 맹자왈 하던
패거리 유림들은 국난을 어떻게 대비 했습니까.
고려 때에는 다 쓰러져가는 명조를 붙들고 아우성치던 자들이 조선조에는 청조에 나라 바치자고
상주들 안 했습니까.
율곡 이이란자도 가능성도 없었던 조정에 택도없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애국자인체 했지만
이 자도 사대에 내노라하는자 아니였습니까?
이런 썩어빠진 유림들이 지 혼자 살자고 도망 다닐 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 적극적으로
목숨을 내던져 구국운동한 사람들이 누굽니까.
왕과 유림신하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강화니 남한산성이니 용갓 떨어진 임금 잡고 어딜 그렇게 끌고
도망다니면서 말이죠.
반면에 그 치욕스런 시절 그렇게 괄시받던 승려들이 팔도에서 들고 일어나 호국불교를 내세우며
얼마나 많은 승군들이 죽어갔습니까?
남한산성도 이들이 쌓다는거 알고는 계십니까.
님은 이런것은 하나 눈에 안 들어 오지요?
이 문제는 좀 더 아시고 평가하심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니 오늘은 그만 쉬어야 겠습니다.
  -제비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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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양의 강대국에서 들어온 서구 종교가 광신적 사대의식으로 민족 정체성 마져
부인하고 뒤흔들며 매국 행렬을 이루는 개탄스런 시대상과 비교하면 명나라에 나라를
자진해 굴복.심복시켰던 썩어빠진 대다수 유교 귀족들이나 유림들과 비교된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불교는 늘 불타는 호국 의식으로 나라가 위급에
처할 때마다 목숨을 스스럼 없이 내놓고 지켜왔던 전통이 오늘날에도 시퍼렇게 살아있구나
하는 확신을 여기저기서 확인하게 한다.
 
승군은 있었어도 유군은 없었으니....
(민족 정체성 재정립 운동과 문화재 발굴, 귀환 운동등에 불교계가 가장
  앞장서 활동하고 있음)
 
▤▤▤특별자료▤▤▤
승병 [僧兵]  
승려들로 조직된 조선시대의 비정규군대. 
승군(僧軍)이라고도 한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수도승이 많아짐에 따라 유사시에는 이들도 출전하였다.
원래 불교는 살생을 금하나 한국의 불교는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호국신앙과 결부,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발전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고려에 들어와서 외적의 침범이 빈번해지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따라서 《금강명경(金剛明經)》 《인왕경(仁王經)》 《약사경(藥師經)》 등을 존중하여 유사시에는
승려라도 군사로 출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승병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는데, 고구려 때 (唐)나라 태종(요즘 연개소문의 이세민)이
침입하자 고구려의 승려 3만 명이 승군으로 출전하였다는 내용이 《고려사》
<최영전(崔瑩傳)>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의 내외사원(內外寺院)에는 수원승도(隨院僧徒)라 하여 군현의 주민처럼 사원에 부속되어
항상 노역(勞役)에 종사하면서 항산(恒産)을 누리고 사는 자가 많아서 유사시에는 이러한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승병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들 수원승도로 조직된 승병을 항마군(降魔軍)이라 하였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승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영규(靈圭) ·처영(處英)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 때의 승병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지휘하에 왜군과의 싸움과 축성공사에 참여하였다. 
 출전:http://100.naver.com/100.nhn?docid=100034
 
승군(僧軍)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자 승려로 구성된 군인.
그 기원과 활동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에선 수나라 대군이 침입했을 때 살수의 강물을 막아 수공작전을 도모하였던
을지문덕 장군을 도와 7명의 승려들이 적을 유인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신라:에선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했을 때, 승려 도옥(道玉)이 결성한 결사대가 적을
공략하여 신라에 승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백제:에서는 나라가 멸망한 후 도침이 패잔병을 재조직하여 백제의 재건을 위해 투쟁하였다.
 
승군의 활동은 고려:시대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1010년(현종 1)에 거란이 수도인 서경을 침략할 때 승장 법언(法言)은 9천명의 승병을 이끌고
거란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1104년(숙종 9)엔 승군이 항마군(降馬軍)이라는 명칭으로 정규군에 편입되기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소환되었다.
(조선 유교국은 서울 4대문에 출입을 금지당한 승려들이었다.)
 
1174년(명종 4) 이의방(李義方)의 반란,
1176년 공주에서의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의 반란,
1182년 죽동(竹同)의 반란에서도 승군의 역할이 컸으며,
1216년(고종 3) 8월에 거란이 서북쪽 국경을 침범하였을 때 승군 수백명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승장(僧將) 김윤후(金允候)는 몽고 침입 때 몽고 장군 살례탑(Salistai)을 활로 쏘아 죽였고,
충주산성을 70일간 수호하여 적을 퇴각시켰다.
또 몽고의 5차 침입 때엔 승장 홍지(洪之)가 상주산성을 지키면서 적의 지휘관을
사살하고 적을 패배시켰다.
 
고려 말기:에는 승군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1359년(공민왕 8) 12월에 홍건적이 침입하자 전국의 사원이 말을 군용으로 징발시켰고,
승군이 전투에 참여하여 적을 막았다.
 
1378년 3월, 왜구가 수도 개경을 공략하자 수천명의 승군이 병선의 제조와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1388년 4월에도 승군들이 왜구의 침략을 막았다.
 
억불정책(불교탄압정책)을 시행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 초기엔 승군의 조직도 허용되지 않았으나,
무자격증의 승려(無度牒僧)를 환속시키는 방법으로서 승군의 조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자격증의 승려를 승군으로 동원하여 성곽이나 요새를 축조하게 한 뒤, 그 대가로 승려의
신분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1553년(명종 8)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무자격, 유자격 승려를 가리지 않고 모두 승군으로
동원하였으며, 왜변이 끝난 후에도 수년 동안 배를 만들거나 성을 축조하는 일에 동원하였다.
 
임진왜란의 눈부신 호국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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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휴정과 유정스님 관련 주석 참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승군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휴정(休靜)은 전국 사찰에 국토의 방호를 호소하는 격문(Manifesto)을 보냈고,
승병 천오백명을 조직하여 승군총사령관(8도 都總攝)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전투는 영규(靈圭)의 청주성 탈환,
처영(處英)의 행주산성 승리,
그리고 평양 탈환 때 유정(惟政)의 지휘 아래 수행된 모란봉 전투와 수도 수복 때의
수락산 전투, 노원평야 전투, 송교전투 등을 꼽을 수 있다.
 
휴정의 제자인 유정은 이해 7월 왕으로부터 도(都) 사령관의 임명장을 받았다.
(관군이 거의 다 패퇴할 때 승군의병이 승리를 거듭하자 왕이 내린 벼슬)
처음 강원도에서 출발할 때는 150명에 불과했던 승병이 황해도를 거쳐 평양성 동쪽에 이르렀을
때는 700명이 넘었고, 다시 법흥진(法興鎭)에 이르렀을 때는 총 병력이 5천명에 이르렀다.
(모두 철저하게 억압당하던 조선 불교 승려들의 불타는 애국심의 증거다.) 
 
법흥진 승군은 평양탈환 직전인 11월부터 평양과 중화지방의 적군을 차단하는 작전을 수행했으며,
평양탈환을 위한 전투에선 유정의 지휘 아래 난공 지점인 모란봉을 맡아 대승을 거두었다.
승병들은 평소 산악지대의 지리와 지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평양탈환 후에도
북관(北關)에서 적의 동태를 정찰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의병과 달리 승군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정부에 의해 해체되지 않았고, 군량미를 수송하거나
성을 쌓는 일을 담당하는 등 준-정부군의 형태로 바뀌었다.
일본과 7년의 전쟁기간 동안 전국 각지에서 승군이 활약했으며 대표적인 예로서는
전라도 무주지방에서의 전투와 경기도에서의 죽산전투를 들 수 있다.
유정은 수도가 수복된 후에도 영남지방에서 왜구와 싸웠고,
도산성(島山城) 공격과 예교총(曳橋總) 공격에도 참가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대표적인 승병장으로는
휴정스님, 유정스님, 영규스님, 처영스님 외에도 많은 승려들이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법견스님(法堅)은 무기를 만들고 성을 쌓는데 공헌했으며,
행사스님(行思)는 정보를 담당했고,
영주스님(靈珠)는 죽산성을 쌓았고 그 성의 수비대장을 맡았다.
견우스님(見牛)는 용진의 월계산성(月溪山城) 구축의 책임을 맡았고,
해안스님(海眼)은 경상도에서 봉기하여 전공을 많이 세웠으며,
인오스님(印悟)와 천연스님(天淵)은 평양 탈환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
법정스님(法正)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수비대장으로서 명성을 떨쳤고,
혜희스님는 여천 지방의 무기고 수비에 기여했으며,
의능스님(義能)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해군에 편입되어 작전에 참여했다.
의엄스님(義嚴)은 서산대사(휴정)의 뒤를 이어 승군 사령관이 되었고 파사성을 축조하였다.
설미스님(雪尾)는 의승(義僧)을 모집하여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신열스님(信悅)은 경상우도 승군 사령관(도총섭)이 되어 군량미의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짓고,
해인사에서 무기를 만들어 의승군에게 보급하였으며 첫번째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또 병자호란 때는 각성스님(覺性)과 명조스님(明照) 등의 의승군이 활약하였다.
1624년(인조 2)에 8도의 총사령관이 된 각성은 남한산성을 축조하였으며,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항마군이라고 이름하는 3천명의 의승을 모아 수도로 진군하였으나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1627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명조스님은 의승군 4천명을 이끌고 안주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때는 군량미를 모아 전선에 보급하기도 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 승군들은 산성의 축조와 방호에 힘썼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남한산성의 남한치영(緇營)과 북한산성의 북한치영이다.
각성의 감독하에 축조된 남한산성 내의 치영은 각 도에서 소집된 의승들이 초소를 지켰으며,
성 안의 9개 사찰의 승군들이 성을 지켰다.
1711년에 축조된 북한산성 내에는 중흥사를 중심으로
태고사, 노적사, 서암사, 경흥사, 국영사, 원각사, 부황사, 보광사, 보국사, 용암사, 봉암사
....등의 사찰이 있었으며, 이 사찰에 머물고 있는 승군들이 산성을 수호하였다.
 
이들 치영 외에도 역대의 왕조실록을 보관한 장소 가까이 있는 사찰인 강릉 월정사, 무주 적상산성,
봉화 각화사, 강화도 전등사에 승군을 두어 실록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이 승군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승군제도는 역사를 통해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려온 한국에서 불교가 국가와 민족의 수호·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한국불교의 특징의 하나인 호국의 이념의 발현이라고 평가된다. 
출전: http://www.koreandb.net/dictionaries/Viewframe.aspx?id=3153
 
 
서산대사 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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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軍을 指揮하는 休靜(승군을 지휘하는 휴정)/1976작품
  서산대사는 승병들을 규합해 1592년 12월 평양성을 공격했다.
  왜군들은 성에 불을 지르고 대동강을 건너 도망갔다.
  그림은 고려대박물관 소장 평양성 전투도.
  
임진왜란시 승병 봉기의 주역
조선중기의 고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은 임진왜란 당시 맹활약했던 승병장의
대표격으로, 보우의 뒤를 이어 봉은사 주지를 맡았던 명승이다.
호는 청허(淸虛)이고 자는 현응(玄應), 완산 최씨에 이름은 여신(汝信)이다.
법명이 휴정이고, 별호는 서산대사 외에 백화도인(白樺道人), 풍악산인(風岳山人),
두류산인(頭流山人) 등 주로 산 이름을 딴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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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최세창(崔世昌)이고 어머니는 김씨이다.
어릴 적 이름은 운학 소사문(雲鶴 小沙門)인데 이름과 관련한 유년기의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휴정이 세 살되던 해 사월 초파일 아버지 최씨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 스님을 보러 왔다.”며 어린 여신을 번쩍 안아들고는 이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에도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 놓고
탑이라 하는 등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가 10살 되던 해 부모를 여의고 안주 목사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입적하게 된다.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에서 3년 동안 학문을 익히고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친구들과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태고 보우(太古普愚)의 법통을 계승한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崇仁)스님을
스승으로 출가하였다.
 
그 뒤 1540년 수계사로 일선(一禪), 증계사로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그리고 전법사로
영관대사를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다시 영관대사로부터 인가를 받은 뒤 전국을 떠돌며 도를 닦는 운수(雲水) 행각을 하며 공부를 했다.
명종 4년(1549)에 승과에 급제하고, 이후 선교양종판사의 직을 맡게 된다.
이때 보우의 뒤를 이어 봉은사 주지를 맡지만, 1556년 판사 등의 직책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며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후금강산과 태백산, 두류산, 오대산, 묘향산 등지를 두루 행각하며 도를 닦는
한편 후학들을 지도했다. 그에게 산 이름을 딴 호가 많음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1589년, 전라도에 은거하고 있던 재사(才士) 정여립(鄭汝立)이 정감록(鄭鑑錄)의 미신에 따라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역모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제자
유정과 함께 잠시 투옥되었었다.
선조는 이들을 무죄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죽 한 폭을 선사했다고 한다.
이에 휴정은 그 자리에서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 올렸고, 이에 감탄한 선조도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들은 휴정의 문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 ]에 수록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란한 선조가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며 휴정을 불렀다. 휴정은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와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묻는
선조에게 승병을 제의했다.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들로 절을 지키며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가겠다고 하고는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의 휘하에서 활동하고, 유정은 금강산에서
1천여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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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대사 평양성 탈환대첩도-
 
선조가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휴정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는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가 환도할 때에는 700여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가 어가를 맞이하였고,
 
이후 승군장의 직을 물러나 열반을 준비하였다.
이때 선조는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직위를 내려 휴정의 나라에 바친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기도 했다.
 
1604년(선조 37년) 1월 23일 묘향산에 있는 원적암에서 입적하니, 그의 나이 85세였다.
입적 당시 설법을 마친 뒤, 자신의 영정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는 시를 적어 제자인 유정과 처영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제자 1천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 사명 유정편양 언기(鞭洋彦機),
소요 태능(消遙太能)과 정관 일선(靜觀一禪)이 가장 대표적인 제자로서
휴정 문하의 4대문파를 이루었다.
묘향산 안심사, 금강산 유점사에 부도가 세워졌고, 해남과 밀양의 표충사와 묘향산의 수충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청허당집 ]을 비롯해서, 
오늘날에도 필수 수행지침서인 유명한
[선가귀감(禪家龜鑑) ], 
[선교석(禪敎釋) ]과  [선교결(禪敎訣) ], 
[운수단(雲水壇) ], 
[설선의(說禪儀) ], 
[벽송행략 ], 
[회심곡(回心曲) ] 등 다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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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중요민속자료 명칭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
  지정번호: 29호 
  소유자: 표충사 
  관리자: 표충사 
  지정일: 1973/7/16 
  소재지: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표충사내 

이것은 자통홍제존자 사명당 유정이 착용하던 가사(袈娑)와 장삼(長衫)이다.
가사와 장삼은 승려의 법복이다.
승려는 저고리, 바지 위에 장삼을 입고 속대를 매며, 장삼 위에 가사를 왼쪽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 밑으로 걸쳐 입는다. 이 가사는 금란가사(錦欄袈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금색은 퇴색되었고 많이 훼손되었다.
장삼은 원래 웃옷인 편삼(偏衫)과 아랫매기인 군자를 위아래로 합쳐 꿰맨 것인데,
다소 훼손된 곳도 있으나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색은 자색(紫色)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흰색으로 퇴색되어 있다. 
 
 
밀양 표충사 유물관 건립 시급 
유물 등 700여점 빛 보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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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주지 청운스님이 사명대사 관련 목판을 들고 있다.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에 위치한 표충사에 국보급 유물로 추정되는 사명대사 관련 목판 등 상당수의
귀중한 자료가 소장돼 있어 유물관 신설이 시급하다고 표충사관계자는 밝히고 있다.
29일 밀양 표충사(주지 청운스님)에 따르면 사명대사의 시와 문집이 실린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94장과 난중일기인 ‘분충서난록’ 90장, 유생들의 축시를 모은
표충사’ 61장 등 300~400년 된 국보급 목판(52·5×28cm)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고 밝혔다.
또 표충사에는 보물급으로 추정되는 유물 등 700여점이 전시 공간이 없어 빛을 보지 못한 채
경내 수장고에 소장되어 있어 이들 귀중품에 대한 문화재청의 공인과 학예사 상주,
유물관 신설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특히 사명대사의 난중일기인 분충서난록은 사명대사가 임란 당시 쓴 난중일기와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 재상들과 주고 받은 서간(書簡)과 전별시, 왜장과 주고 받은 서찰 등 국난 극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사명대사의 마음과 행동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청운 주지스님은 “표충사내 이런 국보급 유물이 공인을 받아 세상에 빛을 보게 될 경우 사명대사
재조명에 일대 변화가 예고되는데다 표충사의 위상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한편 현재 표충사에 보관된 국보로는 ‘청동함은향완’(제75호)과 보물 제467호인 표충사 3층
석탑, 중요민속자료 제29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장삼 등이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밀양/안병관기자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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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승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정유재란 때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웠다.
일본과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본관  풍천
호  사명당 ·송운 ·종봉
별칭  자 이환, 시호 자통홍제존자, 속명은 임응규
활동분야  종교, 군사
출생지  경남 밀양
주요저서  《사명당대사집》,《분충서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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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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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홍제암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경남유형문화재 제156호. 해인사 부속 암자.
사명대사 유정이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이곳에서 수도하다 여생을 보낸 곳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승병장 서산, 사명,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였고
현종은 동 15년에 사명대사의 시호인 홍제존자에서 따 홍제암이란 이름을 내려 지금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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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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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마무리 외교에 중책을 맡고 왜에 가다. 
    사명대사 일본 행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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