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禪宗 六大 禪師를 만나다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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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 禪宗 六大 禪師를 만나다 -
중국 禪宗은 六祖 혜능(慧能:638~713)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웠으며, 慧能이 五祖 홍인(弘忍)으로부터 법을 받는 과정은 禪佛敎다운 파격의 drama다.
중국 남부 광둥성 출신으로 글도 모르는 가난뱅이 나무꾼 慧能은 法을 구하러 멀리 후베이(湖北)성까지 홍인(弘忍)을 찾아가지만 홍인에게는 이미 수제자 신수(神秀)가 있었으나, 그렇지만 弘忍의 선택은 神秀가 아닌 慧能이었다.
또한 弘忍의 법맥을 놓고 大사형격인 神秀와 벌인 게송(偈頌) 싸움도 禪界의 고전으로,
神秀가‘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이다. 때때로 털고 닦아,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는 게송으로 자신의 공부를 드러냈을 때, 弘忍은 칭찬하면서도‘아직 門 밖에 있다’고 평했으나,
弘忍은 慧能이 지은‘보리는 나무가 아니요, 명경도 경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먼지가 끼랴’는 게송을 보고 그의 경지를 인정했었다 한다.’
그래서 弘忍은 불교의 정수(精髓)인‘空’의 원리를 단숨에 깨친 慧能을 알아본 弘忍선사는, 다른 제자들의 질투를 우려하여 그날 밤 慧能을 절 뒷산 대나무 숲사이 작은 동굴로 불러내어, 達磨로부터 계승된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물려줬다고 하는데, 그곳이 五祖寺 受法洞이다.
그리고 五祖寺에서부터 중국 선종(禪宗)의 양대 산맥인 慧能의 南宗禪과 神秀의 北宗禪이 갈라졌다.
慧能이 귀향한 남부 광둥 지방엔 그의 유적이 곳곳에 펼쳐져 있는데, 10여 년간 숨어 지내다 나타나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광효사(光孝寺),‘六祖壇經을 설법한 대감사(大鑑寺), 자신의 生家 터에 세운 국은사(國恩寺)등 慧能의 많은 족적(足跡)을 볼 수 있다.
또한 慧能의 유적 중 백미는 역시 30여 년간 머물렀다는 남화선사(南華禪寺)이며. 國恩寺에서 앉은 채로 열반에 드는 해탈의 최고경지인 좌탈입망(坐脫立亡)한 慧能의 法身을 옮겨 모셔놓은 곳으로,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눈을 지긋하게 감은 慧能의 모습은 1300년 세월을 건너 그대로 坐禪 중인 것처럼 보이며, 입적을 앞두고 제자들이 슬퍼하자‘너희는 내가 가는 곳을 몰라서 우는 것이다’고 타일렀다는 선사의 지신상(眞身像)은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님을 無言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한국 曹溪宗의 명칭은 慧能선사가 법문을 했었던 南華禪寺의 뒷산인 조계산(曹溪山)에서 유래하였으며, 그만큼 동북아시아 禪佛敎에서 慧能이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獨步的) 존재이다.
그리고 慧能에서 시작된 南宗禪은 임제 의현(臨濟 義玄 ?~867). 조주 종심(趙州 從諶 778~897). 운문 문언(雲門 文偃·864~949).동산 양개(洞山 良价·807∼869)등 걸출한 선사들을 배출하였으며, 禪의 黃金時代를 활짝 열었다.‘덕산의 방망이’와 함께‘臨濟의 할(喝)’로 유명한 臨濟는 요즘 유행어로 치면‘버럭 선사’이며, 제자들에게‘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고함을 치며 그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참사람, 즉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지향했으며 어디서든 주인이 되라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가르침을 내렸으며, 雲門 스님은‘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법어로 유명하다.
특히 臨濟선사는 慧能선사의 南宗禪과 함께 한국 불교에 가장 깊은 영향을 준 臨濟宗의 개조(開祖)이며,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 普愚·1301∼1382)는 임제종의 법맥을 우리나라에 전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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