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의믿음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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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처음 불교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불교란 어떤 종교인가? 불교에서 가르침이란
어떤 것인가? 등등의 자연스러운 의문을 갖게 된다.
불교에 대한 이러한 의문을 해소해 줄 가르침으로 크게 두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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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부처님께서 칼라마인들(Kaalaamas)에게 주신 교훈인 칼라마경(Kaalaama Sutta) 은
의문이 일어날 때는 자유롭게 탐구해 보도록 권장하신 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경의 참뜻은
광신, 완고함, 독단, 편협함을 벗어난 가르침을 드러내 보이는데 있다.
모든 현상은 불법의 영역 속에서 바르게 이해되어야 하므로 통찰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 경에서 통찰력은 나쁜 방법은 버리고 좋은 방법은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담당
한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이 따라야 할 원칙을 제시해주고 사물판단의 기준을 담고 있는 이
칼라마경은 부처님 가르침의 뼈대부분에 속한다.
두번째는 苦(고) 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해탈과는 전혀 상관없는 불필요한 철학적/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서 붓다가 "말룽꺄 뿟따" 에게 가르침을 주신 경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의심은 "다섯 장애"의 하나이다. "다섯 장애"(⑴감각적인 애욕⑵악의,
⑶정신적, 육체적 마비와 권태, ⑷근심과 걱정, ⑸의심)란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고 정신적 진보를
하는 데 있어서 (또는 어떤 진보에 있어서도)장애가 된다.
그러나 의심은 '죄'가 아니다. 불교에는 믿음이라는 계명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불교에
'죄'라는 것 자체가 없다. 몇몇 종교에서 가르치는 원죄같은 것이 불교에는 없다. 모든 해악의
뿌리는 무명과 그릇된 견해(邪見)이다. 의혹, 혼란, 흔들림이 있는 한 진보가 가능치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해거나 명확히 보지 않은 이상, 의심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진일보하기 위해선 의심을 제거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의심을 제거하려는 이는 명확히 보아야 한다. 의심이 없어야만 한다든지, 믿어야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냥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고 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한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 어떤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풀어나갈지 모를 경우가
닥친다. 그 학생이 의혹을 가지고 있는 이상 문제를 풀어 나갈 수 없다. 풀어 나가기를 바란다면
닥친다. 그 학생이 의혹을 가지고 있는 이상 문제를 풀어 나갈 수 없다. 풀어 나가기를 바란다면
의혹을 해결해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 의혹을 해결하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그냥 '믿습니다'라던가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라고 말해서는 문제가 풀릴 리 없다. 억지로 믿고, 이해도 못하면서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른 정신적이거나 지성적인 것이 아니다.
부처님는 항상 의심을 쫓아 버리는 일에 열심이었다. 심지어 열반에 드시기 바로 전까지도 제자들에게
자기 가르침에 의심나는 데가 있으면 나중에 의심을 씻어낼 수 없었다고 후회하지 말고 질문하라고
몇 번씩이나 당부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부처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너희들이 스승이 어려워서 질문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사람은 친구에게 알리도록 하여.
'(즉, 질문할 것이 있는 사람이 친구에게 말하여, 친구가 그를 위해 대신 질문토록 하라.)
한역경전에는 '너희가 만일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감히 묻지 못하겠으면 마땅히 친한 벗을 통해
빨리 와서 물으라'(汝等若自참愧不 敢問者 當因知識速來諮問) [{遊行經},長阿含2,大正藏1.26b]
로 되어 있다.
거의 모든 종교가 믿음으로 건설되었다. 다시 말해서 '눈먼' 믿음으로 건설된 것 같다. 그러나
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보는 것', 즉 알고 이해하는 것이지 신앙이나 믿음이 아니다.
불경에는 보통 '믿음'이나 '신앙'이라고 번역되는 삿다saddha(범어.쉬랏다sraddha;信)란 단어가
있다. 그러나 삿다란 단어는 맹목적인 믿음등의 그런 류의 신앙이 아니며, 납득에서 탄생되는
'확신'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해시키거나 강요하는 믿음이나 신앙은 불교와 인연이
멀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믿음에 대한 의문은 보지 못 하였을 때 일어난다. 여기서 본다(see)는 말은 그 단어의 모든 의미를
말한다. 당신이 보는 순간 믿음에 대한 의문은 사라진다. 만약 내 손에 보석을 쥐어 감추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그것을 보지못했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손을 펴서 보석을
보여준다면 당신 스스로 그것을 보게 되어 의문이 일지 않을 것이다.
see(본다. 觀. 볼 관) 관련된 주요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눈으로)보다
2. 쳐다보다, 주의하다
3. 이해 인식하다
4. 알아내다
5. 경험하다, 겪다
6. 방문하다, 만나다
진리는 언제나 알고 보는 것이 관건이지 믿는 것이 관건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ehi-passika)고 당신에게 권하는데 한정될 뿐이고 와서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불경에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언급할 때 언제나 사용하는 표현은 '때와 더러움이 없는
"진리의 눈"(法眼)이 뜨였다', '그는 진리를 보았다. 진리를 얻었다. 진리를 알았다.
진리를 꿰뚫었다. 의심을 극복하였다. 흔들림이 없게 되었다',
진리를 꿰뚫었다. 의심을 극복하였다. 흔들림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바른 지혜를 가지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如實) 본다'이다. 불교의 진리란 항상 앎
또는 지혜(nana-dassana;智見)로써 보는 것이지 신앙으로써 믿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경전에서 일반적인 용법으로 쓰이는 삿다(믿음)이란 단어는 마땅히 긍정적으로
인정되고 그리고 부처(佛)와 가르침 (法), 그리고 승가(僧家)에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신앙'이 란 요소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바른 이해와 바른 견해가 실종된 맹목적인
인정되고 그리고 부처(佛)와 가르침 (法), 그리고 승가(僧家)에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신앙'이 란 요소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바른 이해와 바른 견해가 실종된 맹목적인
신앙이나 믿음은 불교의 가르침과 떨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 信(신) 에 대한 용수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용수의 대지도론에 보면 " 불법의 大海(대해)는 信(신)을 能入(능입)으로 하고 智(지)를
能度(능도)로 한다" 는 유명한 가르침이 있다.
불교는 얼마쯤의 지혜나 노력으로 건널 수 있는 작은 냇물이나 강이 아닌 까닭에 大海에 비유를
했으며 대해에 비유를 했기 때문에 들어간다(入)했고 건넌다(度) 했다
즉 믿음이 없으면 불교라는 대해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용수가 말하는 믿음이란
무조건적이고 맹신적인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佛道 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전도되지 않을려면 마음이 淸淨(청정. 맑을 청. 깨끗할 정) 해야 한다. 또한 청정한
마음이란 절대자에 대한 절대의존의 마음(타종교 처럼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청정한 마음과 믿음이란 佛道 에 대해서 진실, 진심, 성실, 순수, 신뢰 등등의 뜻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信淸淨(신청정) 이라고 한다. 즉 이러한 청정한 마음으로 信 을 가슴에 품고 불법을 접하면
반드시 불도를 철저하게 믿게 되고 어떠한 외부나 내부의 소리에도 미혹되지 않게 되며
전도된 마음을 가지게 되지도 않게 된다.
전도된 마음을 가지게 되지도 않게 된다.
우리는 불법를 진실되고 순수한 마음에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게 어떤 순수하지 못한 목적을
가지고 믿거나 아니면 내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기복적인 자세로 믿는다면 불법이라는
가지고 믿거나 아니면 내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기복적인 자세로 믿는다면 불법이라는
대해에는 제대로 들어설 수 없다는 가르침 입니다. 즉 그러한 믿음이란 불교에서 존재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절대신은 없다. 자신을 구원해 줄 절대자는 없다. 자신의 구원자는 자신일 뿐이다.
법이란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엄격하게 말하면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
붓다가 말을 했다고 해서 믿는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붓다가 출현을 했건 안했건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붓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지 발명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오직 길을
가르키는 사람일 뿐이다. 그길을 따라서 걷느냐 안 걷느냐는 오직 각자의 몫일 뿐이다.
우리가 이기적이고 기복적인 갈애(욕망)에 바탕을 둔 절대 의존적인 믿음을 떠나서 바른 이해와
바른 정견을 가지고 불교를 믿는다면 모든 부처님이나 불보살님들의 가르침이 새롭게 다가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승경전의 모든 부처님과 불보살님들이 중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타종교 처럼 기복적이거나 절대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나 믿음(信)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모든 부처님과 불보살님들은 한결같이 불자들에게 신청정을 바탕으로 한 믿음을
요구하고 그리고 그러한 신청정에 의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 불법이라는 대해에 들어서면 모두가 스스로
부처나 불보살처럼 살아 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화엄경에 보면 "초발심이 곧 성불" 이란 말이 있다. 이말의 의미는 우리가 처음으로 불교의
가르침(佛道)에 흥미를 가지고 또 배우기 위해서 마음을 내어(발심 하는 것) 경전을 보거나 사찰을
찾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숨어 있던 부처님의 음성이 들려 왔고 또한 나를 깨웠기
때문이다. 이는 중생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佛性(부처님이 될 수 있는 성품)이 과거 몇십억겁의
시간 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현생에 와서 비로소 부처님의 마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나왔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래서 발심을 하게 되고 내 마음이 움직이고 부처님을 찾게 되고 공부를 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무당집이나 점집에 찾아가야 할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찰을 찾는다든가 또는
불보살님에게 오직 내 이기적인 갈애(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잘못된 믿음(信)의 가식적인
허울을 쓰고 그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스스로를 함몰 시켜 버린다면, 몇십억겁의 세월을
윤회속에서 방황 하더라도 결코 불법이란 대해의 기슭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한 뗏목을 만들
나무 조각을 발견치 못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모두다 불성의 씨앗을 현생에서 발아 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올바른
불법을 만나지 못한 인연으로 앞으로 얼마나 더 고통의 육도윤회를 방황 할지 모른다.
부디 내 마음속에 싹을 틔운 불성의 씨앗을 볼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으로 잘 키우시길
합장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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