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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五蘊)의 온(蘊:skandha)은 ‘모임’[集合]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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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4,064회 작성일 14-01-0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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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五蘊)의 온(蘊:skandha)은 ‘모임’[集合]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음(陰)’이라고도 번역했다. 5온은 좁은 의미로는 인간존재를 가리킨다. 인간은 물질적인 요소인 색(色=육체)과  정신적인 요소인 수(受),상(想),행(行),식(識)등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5온이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존재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색은 물질전체를, 그리고 수.상.행.식은 정신 일반을 말한다.  인간 존재만을 특별히 구별해서 말할 때는 5온이라는 말 대신에 5취온(五取蘊)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5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를 고정적인  자아[自我: atman]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取: upadana]한다는 의미에서이다.   

1.색온(色蘊: rupa)
색이란 육체를 가리킨다. 육체는  물질적인 4가지 기본 요소인 4대(四大: mahabhuta)와 이 4대에서 파생된 물질인 4대소조색(四大所造色)으로 이루어져 있다. 4대란 지,수,화,풍으로서, 지(地)는 뼈, 손톱, 머리카락등 육체의 딱딱한 부분이고, 수(水)는 침,혈액, 오줌등 액체부분이다. 화(火)는 체온이고 풍(風)은 몸속의 기체, 즉 위장 속의 가스 같은 것을 가리킨다. 4대소조색이란 4대로 이루어진 5종의 감각 기관[五根]인 눈(眼),귀(耳).코(鼻), 혀(舌), 몸(身)등이다.
 
2.수온(受蘊: vedana)
수란 감수(感受=감정)와 그 작용이다. 수(受)는 내적인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수에는 성질 상 3종이 있다. 즉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그리고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이다. 고수란 즐거운 감정이고, 낙수란 괴로운 감정이다. 그리고 불고불낙수란 사수(捨受)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가리킨다.
   
3.상온(想蘊 : samjna)
상은 개념(槪念) 또는 표상(表象)과 그 작용을 말한다.  상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상은 대상들을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 이름을 부여한다. 붉은 꽃을 볼 경우 먼저 지각(知覺)에 의해 인식 작용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붉은 꽃’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작용이 일나게 된다. 이때 ‘붉은’, 또는 ‘꽃’이라는 개념 또는 그 작용이 상(想)이다. 

4.행온(行蘊 :samskara)
 행, 즉 samskara란 ‘형성하는 힘’[形成力]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여기서는 특히 의지작용(意志作用: cetana)을 가리킨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윤리 생활을 할 수있고 업(業: karma)을 짓게 되는 것은
이 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서의 행은 수,상,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과 그 현상이다.
예를 들면 기억,상상, 추리등이 여기에 속한다. 
  
5.식온(識?: vijnana)
식은 일반적으로  분별(分別), 인식(認識) 및 그 작용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식(識)의 영역은 대상을 인식하는데 까지 가지 않는다. 그 전 단계인 주의작용(注意作用)일 뿐이다. 예를 들면 붉은 꽃을 볼 때  안식(眼識)이 일어나게 되는데 안식은 눈앞에 ‘무엇이’ 나타난 것만을 알뿐이다. ‘붉다’ ‘꽃이다’라고 아는 것은 식이  아니고 상(想)의 작용이다. 식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5온이론은, 인간 존재란 색, 수, 상, 행, 식 등 5 가지 요소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마치 여러 가지 목재(材木)를 한데 모아 세상에서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모든 온(蘊=要素)이 모인 것을 거짓으로 존재[衆生]라 부른다.”라고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수레는 바퀴, 차체(車體), 축(軸)등 여러 요소가 모였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일 뿐, 이 요소들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색,수,상,행,식등 5 요소가 모일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도 성립할 수 있게 된다. 
   
5온이론에 의하면 다른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영혼같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수,상,행,식과 같은 정신현상은 영혼과 같은 존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기관과 그 기관에 관계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생긴 된다.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마음[意:생각을 맡은 기관]등과 여기에 상응하는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할 수 있는 것[觸], 생각[法]이 서로 만날 때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등의 여러 가지 정신현상이 발생한다.

즉 6 가지 감각기관[육근.六根]과 그것에 관계하는 6가지 대상[육경.六境]이 합칠 때  6가지 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수성유경(手聲喩經)에서는 “비유하면 두 손이 서로 마주쳐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눈[眼]과 물질[色: 對象]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다른 5식도 동일하다)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만나서 식이 발생하면, 식 이외의 다른 정신 현상들, 즉 수, 상 ,행등도 함께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아함경의 여러 곳에서는 “눈과 물질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3가지[眼.色.識]가 합친 것이 촉(觸=여기서는 접촉)이다.  촉과 함께 수,상,행[思]이 생긴다. (이,비,설,신,의도 동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잡아함 273; 305)
 
5온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非實體)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 진 인간 존재 역시 비실체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여러 경전에서는 비유를 들어 색(色)은 거품덩어리 같고, 수(受)는 거품 방울 같고, 상(想)은 신기루 같고, 행(行)은 바바나줄기 같고, 식(識)은 허깨비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품덩어리, 거품방울, 신기루, 바바나 줄기, 허깨비들은 어느것 하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 실체적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 진 존재가 실체적인 것일 수 없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아(無我:anatman)라고 표현한다. 이 ‘무아(無我)’라는 말에서 ‘아(我)’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實體的)인 아’(我;atman)를 의미한다. 인간 존재에는 그와 같은 ‘아(我)’는 없다는 것이고, 역시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非我]. 결국 인간은 “무아적 존재”인 것이다. 
  
이 5온이론, 즉 무아이론는 초기불교에서 후기불교까지  전 불교사상사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시 불교를 다른 종교 및 사상과 구별짓게 하는 가장 독특한 교리이기도 하다. 경전에서 붓다는 이 무아이론을 수없이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고(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다.

붓다에 의하면 고는 욕망 때문에 생기고 욕망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고의 근본 원인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제거되지 않는 한 고는 계속해서 발생하게 된다.  “마치 뿌리가 다치지 않으면 나무는 설사 (윗 부분이)  잘리더라도 원기 왕성하게 다시 싹이 돋아 나오는 것처럼”  고(苦)도 계속 발생하게 된다고 법구경(法句經)에서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리 존재 속에 소위 말하는 영혼과 같은 고정불변하고 실체적인 내’(atman)가 있다고 믿는데서 생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그 믿음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5온-무아(五蘊-無我) 교리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우리 존재가 ‘무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우리들은 무엇에 집착할 것이며,  누구에게 분노를 품을 것이며, 무엇에 두려움을 느끼겠는가.
 
이것은 붓다와 팃사(Tissa)비구 사이에 있었던 문답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붓다는 팃사비구에게 “만일 색(色:육체)에 대해서 탐냄을 떠나고 욕망을 떠나고 생각을 떠났는데도 그 색이 변하거나 달라지면 그때 너는 근심, 슬픔, 번민, 괴로움이 생기겠느냐.”  라고 묻는다. 팃사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수, 상, 행, 식등 다른 4온에 대해서도 같은 문답을 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깨트려지면 우리는 우리 존재가 변해도, 외부세계가 변해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숲속의 나무들을 베어서 가져가도 우리들이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무들은 ‘아(我)도 아니고 아소(我所:나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함경에서는 무아이론을 불에 비유하고 있다. 불이 모든 초목을 태워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무아이론은 욕망과 고(苦)를 사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무아이론을 실천하라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때로 그것을 과격한 표현을 사용해서 나타내기도 한다. 붓다의 가장 큰 제자였던 샤리푸트라(Sariputra)는  야마카(Yamaka)비구에게 오온[인간존재]에 대해서 “그것은 병(病)과 같고 종기(腫氣)와 같으며 가시와 같고 죽음과 같으며 무상하고 괴로우며 공(空)이요 내[我]가 아니며 내것[我所]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그래서 거기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고 그 결과 욕망을 없엘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고(苦)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아이론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해서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나’ 또는  ‘자기’와 같은 존재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한 생을 살다가 죽는 ‘나’는 인정한다. 단지 이와 같은 존재를 영원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말하는 ‘나’란 비실체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임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가짜 나’(假我)라고 부른다. 이 ‘가짜 나’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1)  명색(名色, naama-ruupa) : 마음과 육체, 정신과 물질. 원래 고(古)우파니샤드에서는 현상
     세계의 명칭과 형태를 의미했으며, 불교에서도 가장 오래된 시구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후에는 명은 개인 존재의 정신적인 면, 색은 물질적인 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오온 전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씀.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는 4항으로 식(識)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또 육처(六處)를 조건짓는다.
2) 오온(五蘊, pa~nca-khandha) : 존재[有]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의 집합. 또는 집착 대상의
    다섯 범주. ①물질 또는 신체의 요소[色蘊], ②느낌의 요소[受蘊], ③지각의 요소[想蘊],
    ④의지의 요소[行蘊], ⑤의식의 요소[識蘊]. 아라한의 경우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므로 그냥 오온이라 부르고 아직 집착이 남아있는 범부와
    사향(四向),  삼과(三果)의 경우는 오취온(五取蘊, pa~ncaa-upaadaana- kkhanda)이라 구분해
    부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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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의 존재론적 입장
우리가 있다'는 인식하는 모든것은 '十八界(십팔계)'를 인연으로 해서 '觸(촉)'에서 발생한 의식이다. 럼 우리에게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물질과 정신으로 나눌수 있다.
 
1,물질이란 책상, 나무, 돌, 우리 몸등등 이런걸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색(色)이라고 한다.
2,느끼는 정신, 즉 괴로움, 즐거움,아름다움,추함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느끼는 존재를 감정이라 하고 오온의 受(수)라 한다.
3,다음은 생각하는 정신이다. 이것저것비교하고 논리적사유, 추리 이렇게 생각하는 존재를 이성이라 하며 오온의 想(상)에 해당한다.
4,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정신이 있다. 산에 가고 싶다. 부자가 되고싶다. 이것을 의지라고도 하고 오온의 行(행)이라 한다.
5,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정신이 있다. 이것은 꽃이다. 이것은 책상이다. 이것을 의식이라하고 오온의 識(식)에 해당한다.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물질, 감정, 이성, 의지, 의식 다섯가지 이다.따라서 이 세상에는 물질적 존재와 정신적 존재가 있다고 할수 있다. 이 다섯까지 존재에 대하여 우리는 물질은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요소로 생각하고 감성,이성,의지,의식은 우리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작용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물질적 존재와 정신적 존재가 있다고 할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 다섯가지를 오온이라 부른다..불교에서 이렇게 이 세상의 모든것은 오온으로 되어 있다고 하므로 불교는 다섯가지 요소설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요소설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불교의 묘미이며 진리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오온을 외도들이 (우리라고 할수도 있겠죠) 생각하는 사대(四大)로 생각하는 사대가 아니다. 세존은 오온이 우리 외부에 실재하고 있는 5가지 요소가 아니라 좀 어렵게 불교용어로 말하자면 18계에서 연기한 觸(촉) 을 통해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했다. 무척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더 어려운것은 우리 마음에서 연기 한것이라고 말하신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온이 연기 하는데 바탕이 되는 것이 '十二處(십이처)'와 '觸入處(촉입처)' 이다.
 
불교의 존재론은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가 '마음' 에서 연기 한것이라고 이야기 하므로 연기설이라 할수 있고 '마음' 은 실체가 아니라 삶, 즉 업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므로 업설이라고 할수 있다.
 
정리해보면, 오온은 色(물질),受(감정),想(이성),行(의지),識(의식),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가 마음에서 연기 하였다고 말한다. 근본 실체를 전제하고 존재를 설명하는 유물론이나 유심론과는 많이 다르다.

오온의 근원
十二入處(십이입처)를 인연으로 六識(육식)이 발생하면 우리의 마음은 十八界(십팔계)의 상태가 된다.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한다는 것은 십이입처의 의식상태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연이란 행위, 즉 업을 의미한다. 우리가 인연을 짓는다는 것은 업을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는 것도 업이고, 듣는 것도 업이고, 생각하는 것도 업이다.

그러므로 ‘眼(안)과 色(색)을 인연으로 眼識(안식)이 생긴다’는 것을 볼 때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육식이 생긴다는 것은 인지 활동을 통해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발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생기면 이 분별심에 의해 주관계, 대상계, 의식계가 분별되며, 이렇게 분별되어 있는 의식상태가 십팔계이다.
 
십이입처에서 육식이 발생하여 십팔계가 성립하는 것은 慾貪(욕탐)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무지개를 보았다고 하자. 그 사람은 무지개를 분별하여 인식하는 위식이 자신의 십팔계 안에
없기 때문에 무지개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무지개가 구름처럼 별 색깔이 없어서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라면 보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보았다고 하더라도 좀 이상하게 생긴 구름이 있다고 느끼고 말 것이다.
 
그러나 관심이 있으면 보는 자기 자신(주관)과 보이는 무지개(대상)가 의식 속에 뚜렷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주관, 대상, 의식이 함께 나타날 때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관심이나 욕구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은 먹을 것을 보고,
옷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옷을 보듯이 우리의 인식의 바탕에는 욕탐이 있다. 십이입처와 십팔계 등은 관심, 즉 욕탐이 있어야 나타난다. 십이입처와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식, 촉, 수를 모두 慾法(욕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욕탐이 있을 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주관(자아)과 대상(세계)이 개별적으로 실재한다는 어리석은 무명에서 사물을 보고 욕탐을 추구하는
삶을 살 때 십이입처가 연기한다. 욕탐을 가지고 사물을 봄으로써 십이입처가 나타나고,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보이는 것은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난다. 만약 이 분별하는 의식이 이미 십팔계 안에 있다면 그 식이 나타나서  ‘무지개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즉 촉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개를 분별하는 식이 없을 때에는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이 새롭게 형성된다. 무지개를 분별하는 의식이 없으면 우리는 무지개를 보면서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은 모르는 것은 무지개가 이니라  무지개의 이름이다. 여러 가지 색이 층을 이루고서 커다란 반원으로  하늘 높이 걸려 있는 무지개의 모습은 눈을 통해 알고 있다. 단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은 무지개의 여러 가지 색은 알아 볼 것이다. 무지개의 여러 가지 색은 알아 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은 그 사람의 안식계 속에는 여러 가지 색을 분별할 수 있는 안식은 있지만, 의식계 속에 무지개라는 이름의 사물을 분별 할 수 있는 의식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지개를 분별하지 못하다가 누군가가 그 이름을 알려주거나 스스로 이름을 붙이면, 이때 비로소 무지개를 분별하여 알아 볼 수 있는 의식이 생겨서 의식계 속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십팔계는 보고, 듣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 즉 업에 의해 형성되어 같은 종류끼리 계역을 형성하고 있는 의식의 집단이다. 이 십팔계는 구체적인 인연이 주어지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씩은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셋이 모여서 나타난다. 보이는 것이 없으면 보는 놈이 나타나지 않고, 보는 놈이 없으면  보이는 것이 나타나지 않으며,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이 없으면 보이는 것을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이 나타나는 계기는 행위, 즉 업이다.
 
어떤 욕탐을 가지고 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보는 나(주관), 보이는 사물(대상), 이것을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나 함께 화합한다. 이것이 촉이다. 우리가 ‘있다, 즉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촉을 인연으로 해서, 즉 업에 의해 형성된 ‘십팔계’가 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면 책을 놓고 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상을 보면 상은 책을 놓고 보기에 좋은 것으로 보이고, 이때 책상을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나서 ‘여기에 책상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욕구가 다르면 다른 인식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음식을 놓고 먹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보면 동일한 상이 밥상으로 인식되고, 불을 피우려는 의도로 보면 그 상은 땔감이 되는 것이다.
 
촉은 이렇게 모든 존재가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의식상태이다. 십팔계라는 의식세계 속에 있는 의식내용을 ‘존재’, 즉 ‘있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 촉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촉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오온으로 분류하므로 촉은 오온의 근원이 된다.
 
오온의 발생과 성립
촉은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촉을 통해서 있다고 느끼는 것은 십팔계에 있는 것들이다.
십팔계에는 십이입처와 육식이 있다. 십팔계라는 계의 속에 나누어져 있는 이들은 우리의 인식행위를 통해 화합하게 된다. 이것을 촉이라고 한다. 촉을 통해 비로소 우리의 마음 속에 같은 종류끼리모여 있는 십이입처와 육식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책상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책을 놓고 보기에 적합한 모양의 사물을 보면 십이입처의 內入處(내입처)와 外入處(외입처)가 六識(육식)의 책상을 분별하는 의식과 화합함으로써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먼저 눈으로 색깔과 모양을 보면 책상의 모습이 있다고 느껴진다. 손으로 만져보면 책상의 강도와 매끄러운 종도가 있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책상의 모습과 감촉 등을 종합하여 마음으로 판단해
보면 책상이 있다고 느껴진다. 이렇게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져보아서 우리에게 있다고 느껴지는 것을 우리는 물질이라고 한다.

물질은 이렇게 우리에게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맛이 나고, 만져지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은 촉을 통해서 있다고 느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물질이 인식되면 물질을 인식하는 것도 있다고 느낀다. 책상만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책상을 보고 만지는 의식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는 의식은 눈을 통해 보고, 듣는 의식은 귀를 통해 듣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주체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 識(식)이다. 그리고 눈, 귀, 코 등은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눈, 코, 귀, 혀, 몸을 우리의 육체라 생각하고 있고, 우리의 육체는 물질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은 십이입처 가운데 意(의)와 法(법)을 제외한 眼, 耳, 鼻, 舌, 身과 색, 성, 향, 미, 촉, 열 가지가 촉을 통해서 ‘존재’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촉을 통해서 존재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 물질과 의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십팔계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물질과 의식 이외에도 감정, 이성, 의지가 있다. 우리가 십팔계에 없는 감정, 이성, 의지 같은 것을 존재한다고 느끼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촉을 통해서 새로운 의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질과 의식은 촉을 통해서 십팔계라고 하는 의식 내부에 있는 것들이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들인데, 이렇게 물질과 의식이 존재하는 것으로 느껴지면 이 느낌을 통해서, 즉 촉을 인연으로 해서 새로운 의식들이 나타난다. 우리가 감정, 이성, 의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受(수), 想(상), 思(사)라고 부른다. 경에서는 ‘촉에서 수상사가 생긴다’고 하고 있다.

수상사란 오온의 수, 상, 행에 해당한다. 촉을 통해서 십팔계 속에 있던 십이입처와 육식은 오온의 색과 식이되고, 촉을 통해서 새롭게 생긴  수, 상, 사는 오온의 수, 상, 행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촉을 통해서 오온이 발생한다. 그러나 촉을 통해서 발생한 ‘있다는 느낌들’이 곧 오온은 아니다.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촉을 통해서 발생한 것은 오온의 질료가 되는 것들이다. 오온은 이들 의식이 발생하여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오온의 성립과정은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촉에서 수 상 사가
생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아름답게 피어 있는 장미를 본다고 하자. 아름다운 장미를 보면 즐거움을 느낀다. 이렇게 ‘무엇이 아름답다’ 또는 ‘무엇이 보기 싫다’고 느끼는 것을 受(수)라고 한다. 이러한 수는 觸(촉)에서 생긴 것이다. 만약 장미가 있다는 느낌이 없으면 그 장미가 아름답다는 느낌이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장미를 보고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이 장미는 보통 장미보다 ‘더 붉고, 더 크다’라고도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다른 것과 비교하고 사유하는 것을 想(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想(상)도 장미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긴 거이다.

따라서 상도 촉에서 생긴 것이다. 한편 장미를 보고 이것을 꺾어 꽃병에 꽃아놓고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이렇게 어떤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思(사)라고 한다. 따라서 사도 촉에서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어떤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사라고 한다. 따라서 사도 촉에서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수, 상, 사, 즉 우리의 감정, 이성, 의지는 촉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느낌과 생각과 의지를 일으키는 정신적 실체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아름다움과 더러움 그리고 고통과 기쁨을 느끼는 감정이 본래부터 있다가 즐거운 것을 보면 즐겁게 느끼고 괴로운 것을 보면 괴롭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가 부를 때 먹으면 괴롭다. 만약 고락을 느끼는 감정이 존재하고 있다면  맛있는 것은 언제 먹어도 즐거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배고플 때는 맛없는 것을 먹어도 즐겁고, 배부를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괴롭다는 것은 감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감정은 촉에서 생기는 것이지 본래부터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도 마찬가지다. 10평의 작은 집에서 살 때는 20평의 집만 보아도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30평의 집에 살다가 20평의 집을 보게 되면 작다고 생각한다. 의지도 마찬가지다. 어제는 하고 싶던 일이 오늘은 하기가 싫고, 어제는 하기 싫은 일이 오늘은 하고 싶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고 싶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촉에서 생긴 것을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인간은 육체와 감정과,
이성과 의지와 의식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지고 인간이라고 부르고, 그 사람은 몸이 어떻고, 감정이 어떻고, 이성이나, 의지나 의식이 어떻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이러이러한 몸과 감정과 이성과 의지와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내가 나의 눈으로 보니 어떤 것이 있다. 내가 나의 감정으로 느껴보니 그것을 즐겁다.
내가 나의 이성으로 생각해 보니 그것을 옳다는 등의 주장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아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촉에서 생긴 오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오온은 촉에서 생겨 무상하게 生滅(생멸)하는 허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온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오온을 ‘나’라고 하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다는 허망한 생각에 빠져 있다. ‘나는 지금까지 몇 년을 살았다.’라고 주장하지만 오온 가운데 그 동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연 따라서 촉에서 생겼다가 간 곳이 없이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 오온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무상한 것을 ‘나’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생각 속에서 온갖 괴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세존은 “잡아함 9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색은 무상하다.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을 주는 것은 ‘나’가 아니다.
‘나’가 아닌 것은 ‘나의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진실된 바른 관찰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도 무상하다.

또 “잡아함 1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마땅히 색을 무상하다고 관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사람이 바르게 관찰한 것이다.
바르게 관찰한 사람은 색을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려는 욕탐이 없어진다.
그것을 즐기려는 욕탐이 없어진 사람을 마음이
해탈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도 무상하다.

우리가 ‘나와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오온은 이렇게 촉에서 생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다. 따라서 촉을 없애고 오온을 없애야 해탈이 있고, 열반의 성취가 있다. 그리고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촉이 어떻게 생기고, 촉에서 어떤 것이 생기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세존이 촉을 멸하고 오온을 멸하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잡아함 41경”에서는 오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떤 것이 色(색)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존재하는 모든 색은 일체와 사대와 사대를 취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을 색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색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색의 집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색에 대하여 희탐과 갈애가 있으면 이것을 색의 集(집)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색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

----중략----
어떤 것이 受(수)를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六受身(육수신)을 말한다.
眼觸(안촉)에서 생긴 수, 이비설신의 촉에서 생긴 수,
이것을 수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수를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수의 집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촉의 집이 수의 集(집)이다.
이와 같이 수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
----중략----

어떤 것이 想(상)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六想身(육상신)을 말한다.
안촉에서 생긴 상, 이비설신의촉에서 생긴 상,
이것을 상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상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상의 집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촉의 집이 상의 집이다. 이와 같이 상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
----중략----

어떤 것이 行(행)을 여실 하게 아는 것인가? 六思身(육사신)을 말한다.
안촉에서 생긴 思(사), 이비설신의촉에서 생긴 사,
이것을 행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행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행의 집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촉의 집이 행의 집이다. 이와 같이 행의 集(집)을 여실하게 안다.
----중략----

어떤 것이 識(식)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六識身(육식신)을 말한다.
眼識身(안식신), 이비설신의식신, 이것을 識身(식신)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식신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식의 집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명색의 집을 말한다.
이것을 식집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식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

이 경에서 오온의 색은 사대와 사대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오온의 색이
지수화풍 사대라는 요소와 그 요소가 모여서 이루어진 물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살펴 본 “중아함 상적유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불교에서 보는 사대는 물질을 이루는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지각을 통해 단단하다고 느껴지고, 촉촉하다고 느껴지고, 따뜻하다고 느껴지고,
움직인다고 느껴진 것, 즉 四界(사계)이다.

따라서 오온의 색이 사대와 사대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은, 우리가 물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각을 통해 느껴진 느낌과 그런 느낌들을 취한 것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중생들은 이런 의미에서 색, 즉 물질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물질적 실체들의 집합체로 알고 있는 색은 우리의 지각을 취하여 존재로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색을 사실 그대로(여실하게) 아는 것이 된다는 것이 이 경의 의미이다. 색이 사대라는 실체의 집합이 아니라 지각을 통해 느껴진 느낌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색의 집이 색에 대한 희탐과 갈애라는 설명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집은 ‘samudaya'의 한역이다.

’samudaya'는 ‘함께’를 의미하는 ‘sam'과 ’증가, 생기, 수집‘을 의미하는 ’udaya'의 합성어로서 ‘함께 모여 나타남’의 의미이다. 이것은 ‘集起(집기)’로 한역 되기도 하며, 사성제의 집성제는  ‘samudaya'를 의미한다.
 
우리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 집기한 것이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즉 생도 지각된 내용이 함께 모여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지각된
내용은 왜 함께 모여, 즉 집기하여 색이 되는가? 세존은 지각된 것에 대하여 그것을 갈망하고 기쁨을 느끼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내용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지각하는 자신도 변화하고 지각되는 내용도 변화한다. 어제 본 장미와 오늘 보는 장미는 같은 장미가 아니고, 어제 장미를 본 눈과 오늘 장미를 보는 눈도 같은 눈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 본 장미를 오늘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미는 피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장미를 보는 나의 눈도 변화하고 있지만, 어제 장미를 볼 때 생긴 지각 내용과 오늘 생긴 지각 내용이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동일한 장미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그 장미를 보는 눈도 동일한 눈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장미가 시들어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우리는 장미가 사라졌다고 말하고, 눈이 장미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면 눈이 나빠졌다고 말한다. 이렇게 시간적인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장미와 눈이라는 물질은 욕구나 갈애를 통해 어제의 지각과 오늘의 지각이 함께 모여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受(수), 즉 우리가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마음은 觸(촉)에서 발생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촉, 즉 사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반복되어 함께 모여 나타나면, 그 느낌도 함께 모여 마치 감정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성이나 의지도 마찬가지다. 識(식)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발생하고 있는 분별하는 마음이다.
 
사물의 인식은 이름과 형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의식 속에 책상이라는 이름과 책상의 형태가 있을 때 그 형태와 같은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책상이라고 인식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식은 明色(명색)이 함께 모여 나타난 현상이다.

集(집)은 이렇게 중생들이 존재로 생각하는 오온의 원인이다. 사성제에서 五取蘊(오취온)이 괴로움이고, 오취온의 원인이 집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으며, 집은 욕탐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서 욕탐을 멸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오온의 성립 
우리가 중생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단식(段食), 촉식(觸食), 의사식(意思食), 식식(識食) 이라는 네 가지 자양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자양분을 탐내어 좋아하면 識(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가고, 이렇게 식이 커갈 때 명색이 나타나며, 명색이 나타날 때, 행이 자라나고, 행이 자라날 때 미래의 자아가 자라나서 미래의 자아가 다시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망상이 계속된다는 것이 위에서 살펴본 “잡아함374경”의 내용이다.
 
네 가지 자양분을 탐내어 좋아하면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간다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識(식)은 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의식인데 이것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즉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허망한 의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식이 우리의 몸 속에 변함 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머물고 있는 것은 세존은 식이 머물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 식은 머물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생기는 식은 삶을 통해 성장한다. 어릴 때는 좁은 세계를 인식하지만 어른이 되면 폭넓은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은 식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을 통해 의식세계가 성장하는 것을 세존이 식이 커간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세계는 왜 성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삶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인식을 함으로써
삶을 통해 형성된 의식이 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각활동을 하면서, 지각되는 것을 밖에 존재하는 대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그 대상에 대하여 의도를 가지고, 인식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일회적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된다. 날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몸과 감정과 이성과 의지와 의식으로 이루어진 나라고 하는 존재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각하고, 외부에 존재하는 즐겁거나 괴로운 대상을 감정으로 느끼고, 길거나 짧은 대상을 이성으로 판단하고, 좋거나 나쁜 일을 의지로 선택하면서, 외부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아나 외부의 존재는 촉을 통해 느끼고 있는 허망한 느낌이다. 이렇게 허망한 것을 참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중생들의 식이다. 따라서 중생들의 식은 지각활동을 하면서, 촉을 통해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존재에 대하여 고락을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함으로써 성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우리의 지각활동이나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일은 우리에게 그것에 대한 욕구가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욕구가 다르면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것도 달라진다. 그래서 세존은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하여 좋아하고 탐내면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간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식이 자라날 때 명색이 나타난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명색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이름과 형태이다. 따라서 식이 자랄 때 명색이 나타난다는 것은 새로운 식이 형성될 때 새로운 이름과 형태의 사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식을 자라나게 하는 네 가지 자양분이 식의 성장과 함께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로 인식하는 모든 사물은 이렇게 식의 성장을 통해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예를 들어 무지개를 처음 보았을 때는 무지개를 처음 보았을 때는 무지개를 분별하는 식이 없지만 누군가가 그것의 이름이 무지개라는 것을 알려주면 무지개를 분별하여 인식하는 의식이 새롭게 생긴다. 즉 식이 자라난다. 이렇게 식이 자라나면 여러 가지 색이 층을 이루어 반원의 형태로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을 무지개라고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존재는 명색이다.

명색이 우리가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오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오온이기 때문이다. 식이 자라남으로써 명색이 나타난다는 것을 명색은 식을 인연으로 한다고 경에서는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오온의 수, 상, 행, 식이 명이고, 육계의 지수화풍
사대와 사대로 만들어진 것이 색이라는 것이다.
 
식의 성장을 통해 네 가지 자양분이 오온이라는  존재로 인식되며, 이것이 명색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식이 머물면서 자라날 때 명색이 나타난다는 말은 식이 머물면서 자라나기 때문에 중생들이 이름과 형태로 된 허망한 존재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아나 세계의 존재와 같은 존재의 세계를 허구적으로 만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식이라는 사실이다. 즉 오온은 식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이다. 촉을 통해 ‘있다’고
느껴질 뿐 아직 구체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 육계와 수, 상, 사는 식을 통해 이름과 형태를 지닌 구체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즉 식이 네 가지 자양분에 의해 성장하면서 이들을 질료로 이름과 형태를 지닌 인식의 대상으로 만들어 인식하는 것이다. 오온은 이렇게 식에 의해 실재하는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자아’와 ‘세계의 존재’이다. 식은 촉을 통해 형성된 의식을 존재는 대상으로 인식하면서 인식하는 자신까지 대상화한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식이 대상을 인식하고 나서 대상을 인식하는 식 자신을 대사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을 다른 무엇보다 더 확실한 존재로 생각한다. 만약 ‘인식하는 존재인 의식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나서 의심하고 있는 정신은 사유하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데카르트가 그 예이다.

식이 자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대상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식의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인식하는 의식은 생길 수가 없다. 식이 존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이 인식하는 대상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식이 다른 것을 인식함으로써 그  대상을 인식하는 자신을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 오온의 식온이다. 따라서 오온이 성립한 순서로 본다면 식은 맨 마지막이 된다.
오온의 순서는 이렇게 오온이 성립하는 순서로 되어 있다

오온의 순서
오온의 순서는 오온이 성립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왜 오온의 순서에 색이 맨 앞에 위치하고,
다음으로 수, 상, 행이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을 관찰해 보면 우리는 복,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면서 색깔과 모습, 소리, 향기, 맛, 촉감을 지각한다.
 
이러한 지각이 생기면 우리는 보는 것은 나의 눈이고,  보이는 것은 외부의 색이며, 듣는 것은 나의 귀이고, 들리는 것은 외부의 소리이며, 만지는 것은 나의 몸이고, 만져지는 것은 외부의 사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눈, 귀, 코 , 혀, 몸으로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나의 마음이고, 이 마음으로 인식되는 것은 외부의 사물, 즉 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은 눈, 귀, 코, 혀 몸은 물질로 된 나이고,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은 물질로 된 외부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십이입처 가운데 안, 이, 비, 설, 신은 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로 인식되고, 색 성 향 미 촉은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이루고 있는 물질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몸을 이루는 물질과 외부의 사물을 이루고 있는  물질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오온의 색이다. 이와 같이 식에 의해 맨 처음 존재로 인식된 것은 색이므로 색이 오온의 순서에서 맨 앞에 자리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나의 몸이 공간 속에서 외부의 물질을 지각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이 물질에 대하여 자신의 몸에 이로운 것은 즐겁고 아름답게 느끼고, 해로운 것은 괴롭고 보기 싫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사유하고, 이것에 대하여 의도를 갖게 된다.  이것을 촉에서 수, 상, 사가 생긴다고 말한다.
 
느낌과 사유와  의도는 이렇게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느낌, 즉 촉에서 함께  생기는 것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사유와 의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유는 단순히 외부의 존재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촉에서 생긴 느낌을 포함한 사유이다. 그리고 의도도 사유한 태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과가 있다고 하자. 사과가 있다는 느낌은 觸(촉) 이다. 사과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 사과는 빛도 좋고, 크기도 좋다고 느낀다면 이것은 촉에서 受(수)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사과가 좋다고 느끼면 이 사과의 값이 다른 사과의 값t에 비해 값이 싼것인지 비싼 것이지 생각하게 된다. 즉 값과 품질을 다른 사과와 비교에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값은 다른 다른사과보다 비싸지만 품질이 좋으므로 결코 비싼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이것을 좋다는 느낌을 인연으로 해서 생긴 想(상)이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이때 想(상)은 受(수)를 인연으로 생기다고 할 수 있다.우리는 이러한 판단을 토대로  이 사과를 살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사과에 대한 의도는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意(의)도 사는 想(상)을 인연으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던 것이 존재한다고 인식되면 그 존재에 대하여 느낌이 생기고 그 느낌을 바당으로 사유하게 되고 사유를 바탕으로  의도를 갖게된다. 따라서 촉에서 수가 생기면 수를 인연으로 상이 생기고상이 생기면 상을 인연으로 思(사)가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장암경에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眼과 色을 인연으로 眼識(안식)이 생긴다. 안은 무상하고
유위이며 마음을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색과 안식도 무상하고 유위이며 마음을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이 세가지 화합이 촉이다. 촉이 생기면 느끼고 느끼면 사유하고 사유하면 의도한다...
 
이경은 촉에서 수상사가 발생하지만 오온은 서로 무관하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느낌이 생기고 그 느낌이 생기면 사유가 생기고 사유가 생기면 의도가 생긴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오온의 수 상 행은 이렇게 차례대로 발생한 수, 상, 사가 존재로 인식 된 것이다. 따라서수,상,행 으로 되어있는 오온의 순서는 촉에서 이들이 발생한 순서에 따른 것이라 할수 있다.
 
 
 
실론섬
 
쉽고도 어렵지요.. ^^ 오온을 제대로 모르면 끊임없이 생멸(태어남과 죽음)을 거듭하는 생명의 흐름의 존재인 무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밥먹고 똥누고 잠자는 내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내가 없다라니...^^ 퍼뜩 이해가 안가지요. 잘못알면 잘못 믿게 되고 잘못 설명하게 됩니다. 
 
여섯가지 인식(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육근.내입처)과 여섯가지 인식(감각)대상(색성향미촉법.육경.외입처)이 만나면(접촉하면) 여섯가지 식(識)이 생깁니다. 즉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 입니다. 즉 육근과 육경이 만나면 여섯가지 식이 생기며 이 세가지를 합쳐서 觸(촉)이라고 하고 이 촉은 당연히 受(수. 느낌)을 유발하니 그 종류는 세가지 입니다. 즉 좋거나 싫거나 나쁘거나 좋지도 않거나 입니다. 맛이 좋든가 나쁜가 밋밋하든가 .. 아니면 소리가 좋든가 싫든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든가.....
 
육식 (六識) : 감각기관인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의 기능(六處)으로 외부의 인식대상(주위의 사물)인 육경(六境)을 지각하는 식(識: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①안식(眼識)은: '무슨 색깔'이나 '어떤 형체'를 앟아보는 것. 즉 '~ 색'이다. '~ 모양·~ 형체'다 라고 알아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②이식(耳識)은: '~ 소리'다. ③비식(鼻識)은: '~ 냄새'다. ④설식(舌識)은: '~ 맛'이다. ⑤신식(身識)은: '접촉됨을' 의식함.  ⑥의식(意識)은 앞의 오식(五識)에 의해 일어나는 식(識)을 의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순서상 뒤에 있지만 시간상으로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여러가지 용어들이 등장 합니다. '십이입처(6가지의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이들 각각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라든가 십팔계 (십이처와 여섯가지 識(식)을 합친것)) 등의 용어를 잘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원래 불교에는 하근기 중생들에게는 18계를, 중근기에는 12처를, 상근기에는 오온을 설명한다고 합니다(물론 근거는 별로 없지만).
 
오늘부터라도 꽃을 보거나 맛을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생각을 하거나... 인식기관과 인식대상이 만나서 식을 만들고 이 세가지를 합쳐서 촉이라고 하고 그 촉에 의해서 세가지의 느낌(受.수) 이 있고...... 그러면 오온에 대해서 보다 명확하게 와 닿을 것 입니다. 아이고 어려워라... 저도 이해하기가 무지 무지 어렵습니다..... 그래도 머리에 와 닿을때 까지 읽고 또 읽고 여러가지 자료 찾아보고 사유하고 명상하고 ... 그러다 보면 죽을 것이고 다시 태어나 공부하고 또 붓다 법 알게 되고... 그렇게 윤회의 바퀴를 돌고 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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