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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세존의 탄생이전의 인도의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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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163회 작성일 13-11-07 12:23

본문

1. 종교의 두 가지 조류(潮流)
 

인도의 종교가 <베에다>에서부터 발전한 사실은 누구든지 다 아는 일이지만, 그 기원이 서력기원 전 1300년경에 있었던 일이고 보면 석가가 탄생한 서력기원 전 6세기경에 와서는 많은 변화 발전이 생겼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학자들은 이 인도의 종교가 다른 고대민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니미즘적(的)인 성격을 그 밑바닥에 가지고 있었다고 믿고 있다. 고대의 인도인들은 자기네들의 생활이 위협을 받거나 또는 혜택을 입을 때, 그러한 자연현상(自然現象)을 마치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신(神)으로서 존숭(尊崇)하며 또 자기들 안에도 무슨 영묘(靈妙)한 존재가 숨어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예사로 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생각하는 능력이 강한 사람들은 이 신(神)을 존숭하는 태도에서부터 더 나아가 이러한 신비로운 힘을 우주의 최고원리(最高原理)인 브라아만(梵)이라고 부르고, 또 사람들 각자 속의 영묘(靈妙)한 힘에 대해서는 이를 아트만(我 또는 實我)이라고 이름지어 이 브라만과 아트만 사이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브라만(梵)은 아트만(我)의 근거이고, 아트만(我)은 브라만(梵)의 현현(顯現)이라고 하여 범아일여(梵我一如)란 깊은 사상이 제시되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사람들의 심성(心性)과 우주의 신비(神秘)의 문을 열어 헤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도 사람들이 기꺼이 신봉하는 사상이 되었다. 인도 사람들의 전통적인 종교적 태도는 모두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실현하기 위한 수행(修行)으로 쏠렸다. 그와 같은 수행의 길은 대체로 두 가지 큰 조류(潮流)로 나타나 석가의 시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 이대조류(二大潮流)의 하나는 선정(禪定)을 닦는 길이요, 또 다른 하나는 고행(苦行)을 일삼는 길이었다. 외면적(外面的)인 것으로 산란(散亂)하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감각(感覺)의 세계에 끌려들어 좀처럼 거기서 헤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억눌러 뛰쳐나가지 못하게 하고, 조용히 자기 자신을 반성해 간다. 그리하여 자기 안에 신(神)을 보고, 신(神)에 접하는 기쁨을 느낀다. 이와 같이 하여 인도의 소위 요가(瑜伽禪定)는 시작되어 왔다. 인도의 직업적 종교가였던 브라만 승려들은 흔히 뜨거운 태양 빛을 피해 숲속에 앉아 이와 같은 禪定에 종사하기를 좋아한 사람들이다.
 

또 신(神)을 보고, 신에 접하는 또 하나 다른 길로서 고행(苦行)이 행해졌다. 원래 고행의 원어는 타파스(tapas)라고 하여 열(熱)을 의미하는 말이다. 열에 의해 물건이 생기므로 물건을 생성(生成)하는 힘을 이렇게 불렀던 것인데, 나중에 열로써 죄(罪)를 태워 없애버리는 뜻으로 쓰이어 그것이 고행의 뜻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열의 작용을 신(神)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베에다 종교의 고전 <우파니샤드>같은 데에는 나타나 있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 고행이 신을 보고 신에 접하는 해탈(解脫)을 얻는 행위라고 적혀 있다. 인도에는 이와 같은 고행주의자가 매우 많았는데, 석존시대의 소위 육사외도(六師外道)라는 이단적(異端的) 사상가들 가운데의 네 사람까지가 고행주의자였다는 것을 보면 그때 사정을 잘 알 수가 있다.
 

고행주의에 관해서 지적해 두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 첫째는 고행주의자들이 죄(罪)를 물질(物質)처럼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죄를 고행으로써 태워 없앤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와 같이 태워 없앤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물로 씻어 없애도 좋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하루에 세 번씩 거룩한 물로 목욕을 해서 죄를 씻어버린다는 의식도 행해졌다.
 

또 둘째로는 고행을 통해 육체와 싸운다는 생각이 있었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인도 사람들에게는 아니미즘적인 생각이 있었으므로 영혼과 육체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했다. 영혼은 자유로운 것, 육체는 부자유한 것, 또 영혼은 깨끗한 것, 육체는 더러운 것, 이렇게 대체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영혼을 육체에서 해방시켜야 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일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풍(氣風)이 생긴 것이다. 그런 고행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어떤 때는 개처럼, 소처럼, 또 박쥐처럼 살아가는 그런 식의 방법도 고안되었었다.
 

이리하여 흔히 선정(禪定)을 일삼는 사람들은 그 선정으로 생기는 일종의 황홀한 경지를 깨달은 천지(天地)라고 생각하게 되고, 또 고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고행으로써도 영혼의 자유는 얻어지지 않으니까 목표를 미래에 두고 그냥 부지런히 그것을 계속하던가 또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흔히 하지 못하는 일을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그것으로써 명리(名利)를 얻어 보는 등 열 길로 쏠리는 일이 많았다.
 
 
 
2.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의 내용(內容)
 

불경 중에 <범망경(梵網經)> 또는 <범망육십이견경(梵網六十二見經)>이란 책이 있다. 이것은 석가 시대의 이학이견(異學異見)을 전부 망라한 것으로 그 당시의 여러 가지 사고방식이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는 선정(善政)에서 생긴 그릇된 견해가 열 일곱 가지나 된다고 하였다. 그것을 대별(大別)하면 다음의 다섯 가지가 된다.
 

① 상견(常見)이라는 것. 즉 선정에 들어가서 지나간 전생(前生)의 일들을 생각하고 그처럼 긴 기간 살아 왔으니 '나'도 '세계'도 다 상주(常住)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
 

② 반상반무상(半常半無常)을 주장하는 것. 역시 선정 속에 과거생(過去生)을 생각하고, 천상계(天上界) 중의 대범천(大梵天), 희소천(戱笑天), 불노심천(不勞心天)은 상주(常住)하지만, 그 밑에 있는 '나'나 희소천(戱笑天)<註: 여기서 희소천(戱笑天)이라는 것은 희소(戱笑)함으로써 남녀가 서로 정(情)을 통할뿐인 천상세계란 뜻이며, 화락천(化樂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불희소천(不戱笑天)이란 그렇지도 않은 윗 세계를 말한다. 또 노심천(勞心天)이라는 것은 생각만으로 서로 정(情)을 통하는 천상계(天上界)로서, 사왕천(四王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노심천(不勞心天)이란 그렇지도 않은 더 윗 천상(天上)을 말한다.>
 

③ 무인론(無因論)이라는 것. 이것은 선정에 들어가 과거생을 회상하고 '나'도 '세계'도 다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④ 단견(斷見)이라고 불리는 것. 육신이나 마음이 다 언젠가는 없어진다는 생각인데, 그 없어지는 장소에 따라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인간이 태어나 머무는 세계를 당시의 인도 사람들은 욕계(欲界, 욕심의 세계), 색계(色界, 형태의 세계, 물질의 세계), 무색계(無色界, 의식의 세계, 정신의 세계)의 삼계(三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셋 중 어느 한 곳에서 육신과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선정(禪定)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시 무색계(無色界)를 네 단계로 구분하여 소위 '사무색처(四無色處)'니 또는 '사공처(四空處)'를 생각해내고 사람에 따라 그 중 어느 한 곳에서 육신과 마음은 단멸(斷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들이 나타났다. 그 사무색처(四無色處)를 ⑴공부변처(空無邊處), ⑵식무변처(識無邊處), ⑶무소유처(無所有處), ⑷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부른다. 요컨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⑤ 이른바 선정(禪定)의 네 가지 단계. 제일선(第一禪) 또는 초선(初禪), 제이선(第二禪), 제삼선(第三禪), 제사선(第四禪)을 각각 현생에서 얻는 열반(涅槃)의 경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석가가 처음으로 사사(師事)했던 두 스승 중 한 사람은 선정으로 무소유처(無所有處)에 태어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그보다 한 자리 위라고 볼 수 있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태어나는 것을 그 선정(禪定)의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가는 이와 같은 방법이 결코 진정한 지혜를 얻고 해탈(解脫)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바가 있다. (파알리 中니카야 26. 聖求經) 석가가 당시의 이와 같은 사상 중의 사선(四禪)이나 사무색정(四無色定)을 자기의 학설 안에 받아들여 선정(禪定)의 단계로서 합리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석가가 생각한 해탈이나 열반의 목표는 그와 같은 선정의 여러 단계에 도달해서, 거기에서 무(無)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일은 결코 아니었다. 말하자면 당시의 그릇된 사상가들은 선정을 얻는 것 자체가 열반이나 해탈이기나 한 듯, 수단을 목적으로 오인(誤認)한 느낌이 없지 않았었다.
 

선정과 고행과는 서로 뗄 수 없는 것처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당시의 인도 사람들 사이에는 농후하였다. 그러나 다만 어느 현을 더 표면적으로 내세우느냐가 달랐을 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육사외도(六師外道) 중의 네 사람까지는 스스로 고행주의를 내세운 사람들이었는데 그밖에도 다수의 고행자(苦行者)들이 2백 명씩 또는 3백 명씩 도중(徒衆)을 이끌고 도시나 촌락 주변의 숲속에서 고행을 하고 있었다.
 

막칼리고사알라(末迦利瞿舍利)라는 사람은 육사외도(六師外道) 중의 한 사람인데, 선정 상으로는 무인론(無因論)을 주장하였다. 사람의 운명은 다만 원인 없이 정해진 업(業, 과거부터 내려오는 잠재적 행동력)에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다만 그 업이 다할 때까지 고행을 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푸라아나카삽파(布蘭那迦葉)도 육사외도 중의 한 사람이며 역시 무인론(無因論)을 주장하고 있고 숙명론적(宿命論的)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무척 위험한 소리를 하고 다닌 모양으로 경전에는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악(惡)이 행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나 그 밖의 생물을 칼로 자르건, 괴롭히건, 또는 죽이건, 무엇을 하든 그것을 악(惡)이라고 할 수 없다. 땅 위에 모든 생물을 날카로운 칼로 죽여 한 고기 덩어리를 만든다 해도 악이 아니오 따라서 악보(惡報)도 없다. 간지스(恒河)강의 남안(南岸)에서 살생을 해도 죄가 아니오 또 죄보(罪報)가 없고, 그렇다고 간지스강(江)의 북안(北岸)에서 보시(布施, 喜捨의 뜻)를 하거나 제사를 해도 선(善)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또 그 보답도 없다.
 

사람의 운명이 이와 같이 결정되어 있으니, 다만 그렇게 사람을 결정짓고 있는 업(業)이 다하기를 기다려 그 동안 고행을 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파쿠다캇챠아야나(迦據陀迦?延)도 대체로 위의 두 사람과 같은 계통의 사상을 가진 육사외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도 인간의 운명이 그 구성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와 영혼에 의해서 이미 결정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지·수·화·풍의 네 가지 구성요소를 말하는 것은 벌써 <베에다>의 문헌 속에 이미 있은 사실이며, 이것이 불교 이론 안에도 도입되어 한문으로는 사대(四大)라 불리고 있다. 물론 이 사람은 사대가 불변부동(不變不動)의 것이라고 보고 있고 또 영혼이라는 것마저 물질시(物質視)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물질적 요소들에 의해서 사람의 업(業)이 결정되었다고 그는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업(業), 즉 숙명론적인 힘이 다할 때까지 고행을 하면서 산다는 주장을 내세운 것이다.
 

위의 세 사람이 대표하는 사상은 대개 같은 경향을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현존하는 자료가 부족한 까닭에 여러 가지 점에 관하여 많은 의심이 풀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경(佛經) 안에 기록되기를 그들을 사명외도(邪命外道)라 하였고, 그 뜻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서 수행(修行)하는 자'이고 보면 실제면에서도 종교적 동기가 희박했거나 왜곡(歪曲)되었던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쟈이나敎의 개조(開祖) 니간타 나타풋타란 사람도 철저한 고행주의자였는데, 그는 모든 것이 영혼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고, 영혼을 속박하고 있는 육체를 쇠약하게 하기 위해 고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3. 나(我)에 관한 사상(思想)
 

인도 사람들에게는 일찍부터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풍조(風潮)가 있었다. '움직이는 나', '형태로서의 나' 무엇이 진실한 '나'이냐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문이었다. 그리하여 '형태로서의 나'보다도 그 형태로서의 '나'를 움직이게끔 하는 '나'를 진실한 '나'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아트만(我)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말의 어원(語原)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숨쉰다'는 뜻을 가진 말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래서 호흡(呼吸)→생기(生氣)→영적인 생기(生氣), 이것이 진실한 '나'인양 생각하기에 이른 것일 것이다. 베다 시대에 이어 이와 같은 것이 사람의 심장(心臟) 안에 머물러 있어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이와 같은 것이 우주에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브라만(梵)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아트만과 브라만과의 관계를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설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석가 탄생 전 1-2세기경에 성립한 <우파니샤드>들의 중심 사상이 되어 왔다. 물론 그와 같은 사상은 체계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고 산발적으로 피력된 의견이지만, 그 사상에서는 상당히 깊은 신비주의적 사유(思惟)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아트만은 "미세(微細)한 어떤 것보다도 미세하고, 거대한 어떤 것보다도 거대한 것"이며, "청정(淸淨)하여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초월하고, 위대하여 생(生)함도 멸(滅)함도 없고, 노쇠(老衰)함이 없는 것"이며, "거기에는 일륜(日輪)도 달도 빛을 발함이 없고, 별도 반짝이지 못하며, 일체의 광명이 역시 위력을 잃고, 그만이 빛나 일체가 그로 인하여 빛을 발하며, 만물이 그로 인하여 환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일체의 업(業)을 행하고, 일체의 원(願)을 충족시키며, 일체의 향을 맡으며, 일체의 맛을 맛보고, 일체를 포용(包容)하고 적묵(寂默)하여 근심이 없는 이것이 곧 브라만이다. "나는 여기에 죽어 거기에서 사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아트만과 브라만에 관한 많은 신비적(神秘的) 설명들 중의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이와 같은 <우파니샤드>의 사상(思想)은 확실히 인간과 우주에 관한 깊은 내면적 성찰(省察)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류의 사상사상(思想史上) 위대한 공헌을 한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유(思惟)의 요점은 역시 아니미즘적인 사고방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겠으며, 아직도 많은 세밀한 이론적 보완(補完)이 기대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범망경(梵網經)>에 의하면 석가 당시에는 위에 언급한 <우파니샤드>나, 쟈이나敎 이외에도 '나'의 항구한 실재(實在)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항상 하나인 진실한 '나'(아트만)가, 육체에서 육체로 전이(轉移)하면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란 공통된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나'가 후세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데 대하여 그 경에는 서른 세 가지나 되는 설을 싣고 있을 정도다. 그것을 사후(死後)의 의식의 유무와 관련하여 대별(大別)하면, 죽은 뒤의 '나'에게 의식(意識)이 있다는 주장과 없다는 주장, 그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또 그 '나'라는 것이 형태를 가진 것이냐 아니냐, 또 끝이 있는가(有邊) 없는가(無邊), 그리고 그 '나'라는 것의 감정은 고(苦)냐 낙(樂)이냐 하는데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4. 윤회설(輪廻說)과 업설(業說)
 

앞서 말한 바 있는 영혼과 육체에 관한 인도 사람들의 생각은 윤회설(輪廻說)과 업설(業說)을 낳게 하였다. 윤회(輪廻)란 인도 말로 '삼사라'라고 하는데, 일찍이 베다 시대에는 그런 말도 없었으며, 그와 같은 뚜렷한 사상도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서기 전 8세기 내지 7세기경에 성립되는 <브라흐마나> 문헌에서부터 사후(死後)의 세계에 관한 반성이 생기면서 윤회사상도 점점 그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현세(現世)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죽은 후 천국(天國)으로 갈 수도 있고, 지옥(地獄)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사후(死後)의 세계를 '신(神)들의 길'(天道), '조상들의 길'(祖道), '제삼의 길'(第三道)의 셋으로 나누어서 말하고 그 사이를 모든 생물들이 사후에 윤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생각은 꼭 인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인도의 윤회설은 아트만설이 발달해 있었고, 또 업설(業說)이 생김으로 해서 더 복잡하고 심각한 의미를 가지게끔 되었던 것이다.
 

업(業, 카르만, Karma, Kamma)에 관한 이야기가 운위(云謂)되는 것은 우파니샤드 시대다. 어떤 사람이 야지냐발캬선인(仙人)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으면 말은 불 속으로, 숨은 바람 속으로, 눈은 해로, 생각은 달로, 귀는 방위(方位)로, 몸은 땅으로, 아트만은 공중으로, 털은 풀(草)로, 머리카락은 나무로, 피와 그 밖의 체내의 물은 물 속으로 갑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그 때에 이 선인은 "내 손을 쥐게, 이것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야기 할 수 없어. 단 둘 사이에서만 전해야 하는 것일세"라고 숲속에 들어가, 업(業)에 관한 설명을 하고 그 이론을 찬미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인즉 "실로 선(善)은 선업(善業)에 의하고, 악(惡)은 악업(惡業)에 의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브리하다라냐 우파니샤드 3·2·15)
 

육사외도(六師外道)들이 모두 다 업(業)을 말했다. 어떤 사람은 업의 속박을 심각하게 강조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의식하면서도 고의적으로 극구 업의 속박을 부정하는 어색한 태도를 나타냈다. 쟈이나敎의 니간타 나타풋타는 업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몸으로 하는 업(身業), 입으로 하는 업(口業), 뜻으로 하는 업(意業)을 구별하였는데, 이것은 석가의 가르침과 다름이 없으나,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에 비해 의업(意業)을 경시한 것은 불교와 전혀 반대의 입장이라고 하겠다.
 
 
 
5. 신(神)에 대한 신앙(信仰)
 

인도 사람들이 베다 시대부터 수많은 신들을 신봉해 온 사실은 주지(周知)의 일이다. 그러한 전통은 석가 당시에 와서 더욱 복잡화했던 것이 사실이다. 파알리어 경전에 나타난 신들의 이름은 2백을 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석가 당시의 일반 민중 사이에서 신봉되던 유신론적(有神論的) 경향의 복잡성을 알 수가 있다. 그 이름들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 중에는 신이라기보다도 괴물(怪物)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당한, 용(龍)과 같은 것이 있고, 또 <베다> 이래의 신이 있는가 하면, 새로 나타난 신도 있다. 제석천(帝釋天)이나 범천(梵天)같은 신은 브라마니즘 자체에서도 중요한 신이었는데, 제석천은 정복(征服)의 신 인드라의 이명(異名)이고, 범천은 우주의 근본원리 브라만이 신격화(神格化)된 것이다. 천(天)이라는 한자는 신을 의미하는 데바(deva)란 인도말의 한역어(漢譯語)다. 쉬바(濕婆), 비슈누(毘濕奴), 슈리이(吉祥天) 등은 후세에 가서 인도의 민중들 사이에서 매우 중요시된 신들이고, 해의 신, 달의 신이 있는가 하면, 지(地)·수(水)·화(火)·풍(風)이 신격화된 것도 있고, 또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희소천(戱笑天), 노심천(勞心天)같은 신, 그리고 사왕천(四王天), 도리천(?利天), 화락천(化樂天), 정거천(淨居天) 등의 신의 이름도 나온다.
 

그러나 서력기원전 5-6세기경에 인도 민중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신이 무엇이냐 하면 그 첫째는 범천(梵天)이라고 할 수가 있다. 범천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파니샤드> 속에서 중요시된 브라만이 신격화된 것으로 사람들로부터 최고신으로 받들게 되었는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쉬바신 및 비슈누신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삼신(三神)이 된 것이다. 인도사람들은 그 수많은 신들이 각각 자기의 세계(즉 하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었는데, 당시의 인도 민중들은 일반적으로 이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무척 갈망했던 것 같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다른 하위(下位)의 신을 신봉하는 것도 모두 이 범천(梵天)의 세계에 태어나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고 있는 곳이 많다. 이 범천의 수는 하나가 아니라 많았던 것 같다. 경전에는 마가범천, 바가범천, 사남쿠마라범천 등의 이름이 보이기도 한다.
 

범천 다음에 사람들의 신앙을 모으고 있던 것은 제석천과 그 배하(配下)의 사왕천(四王天) 증의 비사문천(毘沙門天)일 것이다. 제석천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베다>의 <인드라>인데 지금은 그 지위가 떨어져 욕계천(欲界天)의 낮은 신이 되어 있지만, 삼십삼천(三十三天) 즉 도리천(?利天, 도리한 말은 三十三이란 인도말의 첫 글자다)의 주인공으로서 그 밑의 사왕천은 수미산(須彌山)의 사변(四邊)을 지배하고 항상 돌아다니며 인간의 일상생활을 감시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제석천(帝釋天)은 당시 정의의 신으로 생각되어 민중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모양이며, 나중에 불교에서는 이 신(神)을 불법수호(佛法守護)의 신으로 믿게 되었다. 비사문천(毘沙門天)은 사왕천의 하나로 수미산의 북쪽을 지켜 그 부하로서 모든 야차(夜叉)를 이끌고 있으며, 재부(財富)의 신이라고 생각되었다. 야차는 그 지위는 낮지만, 수가 대단히 많고, 어디에든지 살고 있어 당시의 인도 민중 사이에서는 가장 인기 높은 신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도 하고 존경도하였다. 파알리어 경전에 나오는 신의 리스트 중에서 태반은 이 야차의 이름이며, 산이나 개울, 나무나 집, 성문(城門), 창고 등 어디에든지 살고 있는 것이라 했다. 어떤 야차에게는 어린애가 달려 있어 그 어린애가 울어서 곤란했다는 얘기도 있다. 야차들은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고, 성을 잘 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분노를 사지 않으려고 제물을 바치곤 하였다.
 

야차도 물론 윤회계에 있는데, 승려가 절간의 물건을 훔쳤기 때문에 죽어서 야차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기록에 보인다. 인육(人肉)을 먹는 야차도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산 사람을 갖다 바치는 일도 있었던 듯이 불경은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이 그 마을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야차와 힘 겨루기를 하여 이김으로써, 사람을 살려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신과 같은 성질을 가진 것에 '나가' 즉 용(龍)이 있고, '가루다'(伽樓陀), '간다르바'(健?婆), '군반다', '파사야차'(卑舍遮), '라크샤'(羅刹)같은 것이 있어 때때로 야차라고 불려지는 경우가 있다. 나무귀신도 일종의 야차다. 나무귀신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런 것들이 있다.
 

어떤 숲속에 나무귀신이 있었는데, 그 숲속에서 사람을 죽인 도적이 나무귀신에게 제사를 드려 제발 그 비밀을 지켜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어떤 곳에 나무귀신이 있었는데 승려가 집을 지으려고 그 나무를 자르려 했더니 나무의 귀신이 애를 데리고 나와 자기네들의 살림집이 되고 있는 그 나무를 자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으나 승려는 듣지 않고 나무를 잘라 버렸고, 잘못하여 그 야차의 아들의 가슴을 찔렀다. 나무귀신은 분개하여 그 승려를 죽이려 했으나,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부처님에게 가서 그 말을 하였더니 부처님은 다른 곳에 그들이 살만한 나무를 가리켜 주었다는 것이다.
 
 
 
6. 그 밖의 다른 속신(俗信)과 사회상(社會相)
 

불교의 문헌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민간신앙들 가운데에는 방위(方位)에 관한 것이 있었다. 화(禍)나 복(福)이 방위로부터 온다고 믿고 그 방위를 예배(禮拜)하는 습관이 있었다. <육방예경(六方禮經)>이란 불경에 의하면, 선생(先生)이라는 사람은 아침 일찍이 머리카락과 옷을 물로 적시고 집을 나가 네거리에 서서, 사방상하(四方上下)의 여섯 방향으로 예배를 했다는 것이다.
 

또 덮어놓고 동쪽을 숭배하라, 동쪽으로 돌진하라, 산이든 개울이든 계곡이든 무엇이 가로 놓여 있든 간에 동쪽으로만 가면 된다. 그러게 하고 죽으면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신앙도 있었던 모양이다.
 

모든 공덕(功德)을 물질시한 것은 <베다> 이래로 별로 다름이 없으나, 그러한 물질적인 관점에서 자기가 닦은 고행을 물질과 바꾸는 일 같은 것도 기록에 나타나 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종류의 관상(觀相), 복점(卜占), 예언(豫言)과 같은 술이 유행하고 있었고, 또 주문(呪文)을 외우고 화(禍)를 면한다거나 복(福)을 초래하는 등의 일은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설명해온 모든 사실로 미루어 우리는 인도인들이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참된 의미에서 종교적인가 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다. 참으로 진실한 종교가 지극히 요망되어 마지않은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 훨씬 타당한 말이 될 것이다.
 

그러한 환경의 인도 사회서도 극단으로 비종교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로카야타(順世外道)란 일파의 사람들은 당시의 지식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종교적인 일체의 것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유물론(唯物論)이었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수·화·풍의 사대(四大) 집적(集積)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신(神)도 아트만도 없다.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고, 원인도 없고 업(業)도 없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마음껏 쾌락을 누리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극단적 유물론자이며 쾌락론자였던 것이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나중에 불교에서도 채택한 것이지만 큰 인물의 육체적 특징을 망라한다는 소위 삼십이상(三十二相)이라는 것도 사실은 이 순세외도파(順世外道派)가 처음으로 궁리해 낸 생각이 아니었던가 하리만큼 생리학적(生理學的) 견식(見識)도 탁월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그 당시의 과학주의자(科學主義者)들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또 하나의 사회적 하층계급의 대두(擡頭)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인도에는 고래(古來)로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브라만이란 승려계급의 발호(跋扈)는 거의 전제적(專制的)인 것이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 시대부터 점차 크샤트리아라는 왕족, 무인계급(武人階級)이 세력을 얻기 시작하고, 그 중에서 탁월한 사상가들이 배출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사실은 쟈이나교(敎)의 '니간타 나타풋타'나 불교의 '고타마 붓다'도 이 크샤트리아족(族) 출신인 것이다.
 

이와 함께 제삼 계급인 '바이샤' 즉 상업이나 농사에 종사라는 평민(平民)들의 세력도 커져, 그들은 많은 재부(財富)를 축적하고 그 위의 두 계급에 맞설만한 세력으로 형성되어 갔다. 그러나 아직 제사 계급인 피정복자와 노예들의 자각이나 단결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인 자립 운동은 없었던 것 같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속신(俗信)은 적지 않게 상층계급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 같다. 앞서 말한 민간 속신이나 신관(神觀), 그리고 그 밖의 사상에도 적지 않게 이 피지배 노예계급의 습속(習俗)이 스며들어갔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풍성한 종교적 풍조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구원(救援)의 종교, 인간과 세계에 관한 진리(眞理)가 갈망되던 당시의 사회를 알게 되었다. 진리는 살아있었으나 아무도 이를 있는 그대로 밝히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고타마 싯다르타 샤캬무니 붓다의 역할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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