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도" 아니고 남의 " 탓도" 아니다 > 법어 법문

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사)대한불교원융종
불교교리 법어 법문

법어 법문

내 ""탓도" 아니고 남의 " 탓도" 아니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910회 작성일 12-08-31 06:03

본문

내 탓이오?  세상의 모든 중생은 자기 업의 주인(Kammassaka)
 
 
 
네 가지 업설
 
TV나 라디오에서 선사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현재 내가 괴로운 것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과거 전생의 지은 업장으로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때 반드시 윤회의 주체를 세운다. 업을 경험하는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몸뚱이만 바꾼다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게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다 보니 영원불멸 하는 어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실체를 자아라고 부를 수도 있고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와 다르다.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유행자]
"벗이여, 싸리뿟따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안냐띳티야경-Aññatitthiyasutta- Wandering Ascetics With Other Beliefs-이교도경, 상윳따니까야S12.3.1.3.4, 전재성님역)
 
 
 
 
사리뿟따존자와 이교도 유행자와 대화에서 먼저 유행자가 사리뿟따에게 묻는 장면이다. 업보를 믿는 자들의 네 가지 형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 남이 만든 것,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 나는 것 이렇게 네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내 탓이오!  신의 뜻대로!
 
하지만 사리뿟따존자는 이를 부정한다. 모두 아니라고 한다. 왜 그렇게 말했을 까. 이 경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업설의 신봉자는 모든 행위, 즉 업은 좋건 나쁘건 그것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현세에 영향을 끼치거나 내세에 그 영향을 끼친다고 하며 우리의 현세의 존재는 과거의 행위의 결과라고 본다.
 
여기서 소개된 네 가지 종류의 업설은 업에 관한 네 가지 명제형식, 'X Y이다. X는 -Y이다. X는 Y이고 -Y이다. X는 Y도 아니고 -Y도 아니다' 라고 하는 일반적인 무기(無記)의 논리형식에 포함되는 1) 2) 3) 4) 無因 사구분별(四句分別 catuskoti)이다.
 
1)의 입장은 자아원인설로 영원불변의 자아(atman)를 가정하고 그 전개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우빠니샤드 시대에 와서는 창조 또는 전변(轉變)의 자아론과 연결되었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이론은 여기에 기원하고 있다.
 
2)의 입장은 외부원인설로 시간, , 자성, , 운명 등의 다른 것(타자)에 의해 괴로움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3)의 입장은 내적외적인과설(內的外的因果說)에 소속되며 자이나교에서 취하는 입장으로 다양한 원인설(1 2를 포함)을 주장한다.
 
4)의 입장은 어떠한 인과론도 부정하는 철저히 유물주의적인 것이다.
 
(전재성박사, 안냐띳티야경-Aññatitthiyasutta- 이교도경, 상윳따니까야S12.3.1.3.4, 주석)
 
 
경에서 유행자가 언급한 네 가지 업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들 네 가지 업설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데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네 가지 업설
원 인
비고
  
1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
 
자아원인론
영원불변의 자아(atman)를 가정
-내 탓
-내 탓이오!
2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
외부원인론
-타자에 의해 만들어 진 것
-신의론
-자성론
-운명론
-남의 탓
-네 탓이야!
-신의 뜻대로!
 
3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
내적외적원인론
다양한 원인설
자이나교
4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
원인부정론
인과부정
유물론
 
 
 
150586375025016D08D159
 
 
 
표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보면 크게 내 탓네 탓으로 볼 수 있다.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원인이 모두 나로부터 기인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내 탓이고, 나와 무관하게 외부적인 요인으로 떠 넘기는 것이 네 탓이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 탓으로 보았을 때는 나라는 불변하는 존재를 가정하게 된다. 이를 주석에서는 아뜨만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때 아뜨만은 개별적인 자아로서 윤회의 주체를 말한다. 이렇게 윤회의 주체를 내세웠을 때 경험을 해도 내가 경험하는 것이고, 그에 대한 과보 역시 내가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무언가 잘 못 되었을 때 보통 내 탓이라고 말한다. 가톨릭에서 내 탓이오!”라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는데 이는 자아라는 주체가 있음을 상정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 고통을 겪고 있는 원인에 대하여 남의 탓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신의론(神意論)’을 들 수 있다. 지금 고통 받고 있는 것에 대하여  신이 나를 시험해 보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것에 대하여 신의 뜻이라거나 신에게 떠넘겨 버린다.
 
이외에 내외적원인을 주장하는 자이나교와 인과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유물론도 있지만 부처님은 이들 네 가지 원인을 모두 부정하였다.
 
접촉을 연유로 해서
 
그렇다면 부처님은 고통이 일어 나는 원인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부처님은 사리뿟따의 이교도 유행자의 대화를 들으시고 난 후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훌륭하다.
아난다여, 훌륭하다.
싸리뿟따가 올바로 설명한 것과 같이 설명해야 한다.
 
아난다여,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이와 같이 내가 말한 것을 설명한다면 허위로 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이 진리에 일치하는 바를 설명하는 것이며 법다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결코 비난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아난다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안냐띳티야경-Aññatitthiyasutta- Wandering Ascetics With Other Beliefs-이교도경, 상윳따니까야S12.3.1.3.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고통이 생겨 나는 원인에 대하여 접촉을 연유해서라고 표현 하였다. 고통이 일어날 만한 조건이 있어서 발생된 것으로 본다. 이를 빠알리어에서는 빠띳짜사뭅빠낭(Paiccasamuppanna)’으로 표현 하였다. 부처님은접촉(Phassa)’을 조건으로 한 것이라고  연기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고통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눈과 귀 등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형상과 소리 등 여섯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아뜨만과 창조주를 부정
 
그래서 부처님은 고통을 만들어 내는 자는 없고 단지 접촉을 조건으로 발생된다고 하였다. 이는 내 탓이 아니라는 말과 같고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또 고통은 남이 만든 것이 아니고 접촉에 기인한 것이라 하여 남의 탓이 아니라 하였다. 이는 창조주를 부정하는 것이다.
 
범부와 아라한의 차이는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감각접촉은 어떤 것일까.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에 따르면 보는 순간에 식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정신-물질(명색)과 여섯감각장소(육입)와 감각접촉()과 느낌()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번뇌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범부에게 느낌은 반드시 갈애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면 갈애는 선하거나 불선한 업을 짓도록 하는 집착()를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업으로서의 존재(업유, kamma-bhava)라 한다. 특정한 조건하에서 업으로서의 존재(업유)는 중생으로 하여금 늙음, 병듦, 죽음, 근심 등 다른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도록 하는 재생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느낌에서 시작하여 어떻게 윤회하는 고통에 이르는지 설명해 준다.
 
그런데 식의 부수물로 정신-물질(명색)과 여섯감각장소(육입)와 감각접촉()과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보이고 들리는 대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아라한도 감각접촉으로 인해 즐겁거나 괴롭거나 무덤덤한 느낌이 생겨 나는 것이다. 그분들도 육체적 고통에서 생기는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 들은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듣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괴로워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파도 아프다라고 할 뿐 아파 죽겠네!”하며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즐거운 것도 마찬가지이다. 좋으면 좋다라고 느낄 뿐 좋아 죽겠네!”하며 정신적 즐거움으로 가져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들은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 즐거움이나 행복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고 업을 짓지 않고 살기 때문에 재생과 정신-물질과 기타의 괴로움의 원인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이 보이는 대로 보는 범부와 있는 그대로 보는 아라한의 차이라 한다.
 
마두삔디까경(M18)에서
 
그런데 감각접촉에는 눈과 귀, , , 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노()도 있기 때문이다. 눈은 형상을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정신-물질(명색)과 여섯감각장소(육입)와 감각접촉()과 느낌()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는 대상이 있어야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노는 무엇을 대상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일어 날까. 이에 대하여 마두삔디까경(M18)’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정신과 사물과 정신의식이 있을 때에
접촉의 생겨남을 알 수 있습니다.
접촉의 생겨남이 있을 때에
느낌의 생겨남을 알 수 있습니다.
 
(마두삔디까경-Madhupiṇḑikasutta- 꿀과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8, 전재성님역)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남을 말하고 있다.  , 마노(정신, )와 마노의 대상()을 조건으로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정신()과 사물()과 정신의식()삼사화합을 조건으로 하여 접촉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는 마음의 접촉을 말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