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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禪宗 六大 禪師를 만나다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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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287회 작성일 14-03-11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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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 禪宗 六大 禪師를 만나다 -

   四祖寺에서 五祖寺 까진 멀지 않는데. 五祖寺 앞에는 오래된 돌다리가 놓여 있으며, 입구에는‘방하착’이란 글귀가 선명한데 이는 마음을 내려놓고 다리를 건너란 뜻이다. 숱한 이들이 이 앞에서 숱하게 들었다 놓았다한 게 또 마음 않인가 생각된다.

   5조 홍인(弘忍)대사(602~675년)에 얽힌 일화도 눈길을 끄는데, 길가던 한 스님이 마을의 아이에게 물었다.
 
   스님, ‘네 성(姓)씨가 무엇이냐?’
   아이, ‘성은 있지만, 일정치 않습니다.’
   스님, ‘무슨 성인가?’
   아이, ‘불성(佛性)입니다.’
   스님, ‘그럼 있네.’
   아이, ‘이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을 들은 道信대사가 아이의 어머니를 만나 그리고 출가시켰는데,  그 아이가 5조 弘忍대사이며, 홍인대사의 제자는 700여 명으로 그중 神秀화상이 으뜸이었는데 온갖 학문에도 능통하고 인물도 좋았다.

   어느 날 弘忍 대사는‘복도의 벽에다 게송을 써라. 그걸로 법맥을 이을 수제자를 가리겠다.’고 했는데, 神秀화상은 밤에 벽에다 게송을 썼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와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이를 들은 젊은 慧能(628~713년)이 고개를 저으며,‘좋기는 하나 깨치진 못했소.’라고 하므로, 사람들이 비웃었는데 慧能은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에 慧能은 동자를 데리고 복도로 가서 자신의 게송을 쓰게 했는데,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지금도 五祖寺의 복도에는 이 일화가 펼쳐져 있는데, 동자를 데리고 글을 쓰는 慧能과 神秀화상의 모습이 글과 그림으로 걸려 있는데, 나이로보나 인물로보나 실력으로보나 慧能은 神秀화상의 상대가 아니었으며, 게다가 慧能은 당시 스님이 아닌 스님이 되기 위한 훈련생 신분인 행자이었다.

   그러나 弘忍대사는 慧能을 택했는데, 神秀화상은 문턱까지 왔고 慧能은 이미 문턱을 넘었다는 이유였는데, 문턱을 넘고 안넘고의 차이, 먼지가 있고 없음의 차이, 그 작은 차이가 실은 하늘과 땅 차이인 까닭이다.

   6조 慧能 이후에 중국에는 숱한 선사들이 출현하는데, 達磨 때 뿌린 씨앗 한톨이 비로소 중국 대륙을 휩쓸며 禪宗의 꽃을 피우게 된다.

   그리고 더 많은 慧能선사의 흔적은 광저우(廣州)에 있는데, 慧能선사가 머물렀던 조계산의‘南華禪寺’ 사찰은 녹음에 덮여 있고, 절을 찾는 이들도 많으며, 글을 몰랐던 慧能선사의 가르침을 기록한‘육조단경(六祖壇經)'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南華禪寺에는 각별한 모습이 하나 있는데, 부처 곁의 나한상은 좌우 9명씩으로 모두 18명이 서 계시나, 남화선사에만 20명의 나한상이 서있는 것은 전에 큰불이 났을 때 六祖壇經을 구하려고 책을 안고 목숨을 버린 두스님이 있었기에 그들이 지금은 나한상으로 서있기 때문이다.

   慧能선사의 고향 신싱샨(新興縣)에  國恩寺가 있는데. 이곳은 慧能선사가 입적한 곳이기도 하며, 절입구에는‘칙사국은사(勅賜國恩寺)란 현판이 붙어 있다.

   그당시 스스로 生佛이라 칭하였던 당나라 측천무후가 내린 글씨로, 그의 국사가 신수화상이었는데 측천무후가‘국사보다 뛰어난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神秀화상은‘慧能선사’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측천무후는 세번이나 慧能선사를 불렀으나 거절당했는데, 결국‘대사가 못 오면 "가사"라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으므로, 절대 권력자였던 측천무후의 명을 거절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문턱을 넘어선 자리라 하였으니, 慧能선사의 不動心은 거기서 나왔다고 보고싶다.

 또한 慧能선사와 관련된 유명한 禪 問答은 한두 가지가 아니며,

어느 날 한법사의 강론 도중 폭풍우가 일어 깃발(번.幡)이 펄럭였는데, 
법사가 대중에게 물었다.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그러자 대중 사이에서‘바람이다’‘깃발이다’다툼이 일었고 아무도 대답을 못 했다.
   이때 행자 慧能이
 ‘바람도 깃발도 아니요,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한 여승이 慧能선사에게 묻기를,
 ‘글을 모르면서 어찌 그대가 진리를 안단 말이오?’
   慧能선사는 한 마디로
 ‘진리는 하늘의 달과같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는데 손가락을 거칠 필요는 없다.’라고 상대를 제압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禪宗의 유명한‘不立文字’이다.

   達磨부터 慧能까지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며 숱한 손가락을 만났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그 너머에 달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어디서든 주인이 되라, 그리하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젊은 구도자들에게, 禪佛敎는 더함 없는 매력과 고뇌의 덩어리이며, 때로는 오히려 묵묵부답 속에 깨달음의 단초(端初)를 숨기며, 禪宗은 達磨로부터 시작해 수.당대를 거치며 크게 융성하여 禪의 黃金時代로 불리며, 우리나라 曹溪宗의 뿌리도 中國 禪宗에 닿아 있는것이다.

   그런데 禪은 인도에서 왔고 우리 禪佛敎의 원류도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 불자는 禪은 時間과 空間을 초월함을 공부하여, 禪에 대한 가치를 깊이 이해하므로 個人生活뿐만 아니라 社會化할 수 있도록 해야 할것이다.  碧  珍.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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