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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처주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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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347회 작성일 14-02-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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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1)

  불교는 우리 각박한 세상의 선남선녀가  실천할 수 없는 아주 지고하고 숭고한 체계라서, 진정한 불제자가 되고 싶다면 절간이나 좀 한적한 곳에 은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슬픈 오해이며, 분명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데 기인한 것이다. 사람들은  소문을 듣거나 어쩌다가 읽어본  것을 가지고 그런 경솔하고 그릇된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불교라는 주제를 전반적으로 이해치 못하여서 단지 부분적이고 편향된  시각만을 제공하는 사람이 쓴 것을 읽어 본데 따른 결과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절간의 승려들만이 아니라 집에서 가족들과 생활하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거룩한 여덟 길"은 불제자가  사는 방법이며,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대다수가 승려가 되거나, 동굴이나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릴 수는 없다. 아무리 불교가 거룩하고  순수하다 하여도 요즘 세상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따를 수 없는 것이라면 인간 대중들에게 쓸모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불교의 정신을 정확히 이해한다면(문자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 일반인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따르고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회에서 단절되어 외딴 곳에서 산다면 불교를 받아들이기가 더 수월하고 편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이들은 그런 식의 은둔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을 무디고 침체하게 만들어서 정신적, 지적 생활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참된 출가란 육체적으로 속세를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처의 수제자 사리뿟따는 어떤 사람이 금욕적인 수행에 헌신하면서 숲 속에 살더라도 불순한 생각과 '더러움'이 가득할 수도 있으며, 다른 어떤 사람은 금욕적인 수행을 하지 않으면서 고을이나 도회지에 살더라도 순수하고 '더러움'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사리뿟따는 이들 둘 중에 고을이나 도회지에서 순수하게 사는 사람이  숲 속에 사는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고 더 위대하다고 말했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생활을 떠나야 한다는 상식적인 믿음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그것은 실천하지  않는 데 대해 생각없이 변명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불교 문헌에는 평범한 보통 가정생활을 하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열반을  깨달은 남녀들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한번은 "방랑수행자"  밧차곳따(우리는 이미 "나없음"의 가름에서 그를 만났었다)가 부처에게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 남녀 평신도(優婆塞와
優婆夷)가 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처는 한 둘이 아니고 일이백이나 오백도 아닌  훨씬 많은 수의 평신도들이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자기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분명히 말한다.

  어떤 이는 소음과 혼잡에서 멀리  떠나 조용한 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기분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료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을 도우며, 봉사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불교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더 칭찬할 만하고 용기 있는 일이다.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훈련을 미리 하여 충분히 성숙된 다음에는 남을 도울 양으로, 자기 마음과 성품을 향상시키려 한동안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의 경우는 유익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동료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행복과 '구원'만을 생각하며  고독하게 온 생애를 산다면 이는 분명히,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연민하며 봉사하는데 근거를 둔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물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보통 평신도로 살아가면서 불교를 따를 수 있는데 왜 부처가 설립한 "승려들의 동아리"인 승가가 있는가? 승가는 자신의 정신적, 지적 발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데 생애를 바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가족이 있는 보통 평신도가 승려같이 자기 전 생애를 남에게 봉사하는데 바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부양 의무가 있는 가족이나 다른 어떤 속세의 구속이 없는 승려는 부처가 지도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전 생애를 '많은 이의 이익을 위해, 많은 이의 행복을  위해' 바쳐야될 위치에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사원이 정신적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중심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각주1]
 
[각주1] <역주> 이  말은 승려인 지은이가 단지  의도적으로 승가를 좋게 말하려고 함이 아님을
              분명히 해 두어야 겠다. 지은이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았으며, 스리랑카를 비롯한  몇몇
              불교 국가에서는 승려가 사회봉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출가는 봉사하기 위하여'라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다시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2)

 《시갈라-경Sigala-sutta》({善生經} 長阿含16, 中阿含135)은 부처가 평신도의 삶과 가족과  사회적 관계를 얼마나 대단히  존중했는지를 보여준다.
  시갈라Sigala라는 젊은이가 선친의 유언에 복종하여, 하늘의 여섯 주요 지점에, 즉 동서남북상하에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부처는 젊은이에게 자기 가르침의 "거룩한 계율"(ariyassa vinaye;聖律)에서의 여섯 방향은 다르다고 말했다. 부처의  "거룩한 계율"에 의한 여섯  방향은 동쪽이 부모요, 남쪽이 스승이며, 서쪽이 아내와 아이들, 북쪽이 친구와 친척 그리고 이웃이며, 아래쪽이 하인과 일꾼  그리고 피고용인이고, 위쪽이 성직자이다.

  '이런 여섯 방향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부처가 말했다. 여기서 '예배'(namasseyya)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신성한 것과 명예스럽고 존경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에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위에 언급한 이 여섯의 가족과 사회집단을 신성하여, 존경하고 예배드릴 만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 부처는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해서만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의무들이 시갈라에게 해 준 설법에서 설명된다.

  첫째,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는 신성하다. '부모님은 브라흐마라 불리운다'(Brahmatimatapitaro)라고 부처는 말한다.  브라흐마(梵)란 용어는 인도사상에서 최상이며 가장 신성한 개념으로 정의되는데, 부처는 여기에 부모를 포함시켰다. 그래서 요즘도  훌륭한 불교 집안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매일 조석으로, 말 그대로 '예배'를 드린다. 자녀들은 "거룩한 계율"에 따라 부모에 대해 정해진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부모님이 늙으면 봉양해야 한다. 부모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집안의 전통을 계승하여야 한다. 부모님이 벌어놓은 재산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사지내야 한다. 반면에 부모에게는 자식들에 대해 정해진 의무가 있다. 자식들이 나쁜 길에 들지 않도록 한다. 유익하고 옳은 활동에 참가시켜야 한다. 훌륭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 좋은 집안과 혼인을 시켜야 한다. 온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물려주어야 한다.

  둘째, 스승과 제자의 관계. 제자는 마땅히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께 복종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시중을 들어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반면에 스승은 제자를  올바르게 훈련시키고 향상시켜야 한다. 제자를 잘 가르쳐야 한다. 제자를  자기 친구에게 소개시켜야 한다. 교육이 끝났을 때 생계대책이나 직업을 마련해주기에 힘써야 한다.

  셋째, 부부 관계. 부부간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이라고, 또 신성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거룩한 가정생활'(sadara-Brahmacariya)이라 부른다.

[각주2] 여기서도 '브라흐마'라는 용어의 중요성에 주목해야 한다. 이 관계에 대해 최고의  경의가
            주어지고 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며 서로에게 헌신하여야 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정해진 의무가 있다. 남편은 항상 아내를 존경하여서 결코 얕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아내를 사랑해야하고 아내에게 신의를  지켜야 한다. 아내에게 지위와 안락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옷과 보석을 선물해서 아내를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부처는
            남편이 아내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야 하는 선물 같은 것까지 잊지 않고 말했다. 이 사실은
            보통 사람의 감정을 향한 자비로운 정이 얼마나 이해심 있고 동정적이었나를 보여준다.)
            반면에 아내는 가사를 감독하고 돌보아야 한다. 손님과 방문객, 친척, 친구, 그리고 고용인
            들을 대접해야 한다.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신의를 지켜야  한다. 남편의 수입을
            보호해야 한다. 모든 활동에서 슬기롭고 생기가 있어야 한다.
 
[각주2] <역주>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梵行)는 원래 인도에서 전통적인 출가수행자의
              독신생활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렇게 부부의 삶에 대해서도 성직자와 다름없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네 번째, 친구, 친척, 이웃들 간의 관계. 서로 인심이 후해야하고 자비로워야 한다. 유쾌하고  기분 좋게 말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이의 복지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이에게 평등한 말씨를 써야 한다.〔즉, 하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간에 싸움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필요한 것에 대해서 서로 도와야 한다. 다른 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주인과 하인 간의 관계.  주인 또는 사용자에게는 하인이나 고용인에 대한 몇 가지 의무가 있다.  노동은 소질과 능력에 따라 할당되어야 한다. 충분한 임금을 주어야 한다. 의료보장이 되어야 한다. 특별 수당과 상여금을 인정하여야 한다.  한편 하인이나 고용인은 응당 근면해야되고 게을러서는 안  된다. 정직하고 유순하며 주인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일을 최대한으로 열심히 해야 한다.

  여섯째, 성직자(원문에는 사문과 바라문)와  평신도 간의 관계. 평신도는 성직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애정과 존경으로 돌보아야 한다. 성직자들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평신도에게 지식과 배워야할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리고 해악을  멀리하도록 좋은 길로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과 사회적 유대를 가지고 평신도로 사는 것이 "거룩한 계율"에 속해있음을 본다. 그리고  평신도의 삶도 부처가 구상한 불제자의 생활방식의 골격을 이루는 것을 본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빨리원전의 하나인《상윳따-니까야》에서는 신神(deva)들의 왕인 제석천帝釋天(Sakka)이 덕망 있게 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칭송할  만한 행위를 다하고 덕망이  있으며 올바른 방법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는 평신도 제자들께도 예배를 드리겠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3)

  불제자가 되려고 할 때 반드시 거쳐야 될 입문의식(또는 세례)은 없다.(그러나 승가의 일원인 비구比丘가 되려면 장구한 과정의 계율 훈련과 교육을 거쳐야 한다.) 어떤 이가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 가르침이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을 품게 되어 따르려  애쓴다면 그이는 불제자이다. 그렇지만 불교국가에 이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에 의한다면 일반적으로 "세 보물"(三寶)이라 부르는 부처와 가르침(法)과 동아리(僧)를 자기의 피난처로 삼아야  불제자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고 속가제자가 지켜야될 최소한의 윤리적 의무인 "다섯 계율"(Panca-sila;五戒)을 지킬 것을 약속한다. 다섯 계율은 ⑴생명을 파괴하지 말 것(不殺生), ⑵훔치지 말 것(不偸盜), ⑶간통을 범하지 말 것(不邪淫), ⑷거짓말을 하지 말 것(不妄語), ⑸취하는 음료를 마시지 말 것(不飮), 등인데, 옛 경전에서 주어진 문구대로 낭송한다. 불교의  종교적 절기의 법회에서 승려의 선창에 따라 이 구절들을 낭송한다.

  불제자가 거행하지 않으면 않되는  외형적인 예식이나 의식은 없다. 불교는 살아가는 방법이어서 필수적인 것은  다만 "거룩한 여덟 길"에 따르는 것뿐이다. 물론 모든 불교국가에는 종교의 절기에 소박하고 아름다운 의식이 있다. 절에는 불상과 탑(stupa)이나 부도(dagabas) 그리고 보리수를 모시는 제단이 있다. 거기에 불제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꽃을 공양하며 등불을 켜고 향을 사른다.[각주3] 이것은 유신론唯神論적 종교에서 하는 기도 행위와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길을 알려준 스승을 기념하여 경의를
표하는 방법일 따름이다. 이런 전통적 행사는 필수적이진 않지만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에게 종교적 감흥과  요구를 만족시켜주고 그 사람들이 점차 길에 들어서도록 도와주는 데에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각주3] <역주> 상좌불교 지역에서는 이러한 것만을 공양한다. 우리네 절 집안에서는 돈, 쌀, 과자,
             과일 같은 것들을 바치고 있는데, 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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