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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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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3,017회 작성일 14-01-1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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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法印) - 불교의 기치


부처님의 입장, 즉 불교가 목적으로 하는 바가형이상학적 탐구보다 현실적 고통의 해결에 있다고 한다면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법)의 성격 또한 저절로 분명해진다.불교가 가르치는 진리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 중에 3 법인 또는 4 법인이라는 것이 있다. '법인(法印)'이란 법, 즉 가르침의 표지 또는 슬로건이라는 뜻이다. 인도의 논전에서는 '법의 요약'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명제의 형태에 따라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네 개의 명제는 다음과 같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 : 제행은 무상하다)
(2) 제법무아(諸法無我 : 제법은 무아이다)
(3) 일체개고(一切皆苦 : 일체는 다 괴로움이다)
(4) 열반적정(涅槃寂靜 : 열반은 적정이다)
이러한 명제가 단순히 철학적인 판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네 개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사이에는 매우 순수하게 철학적 판단에 가까운 것에서 체험적, 주관적 판단으로 보이는 것까지 포함돼 있다. 네 개의 명제를 놓고 하나하나 검토해 보자.

(1) 제행무상 =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도 무상이 무엇인지는 안다. '세월이 무상하다'든가 '무상한 인생'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다. 이 때의 무상은 인생의 영고성쇠랄까, 이 세상 모든 현상의 필연적 변화를 나타낸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한번 발을 씻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강물도 흘러가고 나도 그만큼 변하기 때문에 설령 그 물에 다시 발을 담근다해도 그 때의 그것과는 같을 수는 없다. 이렇게 변하고 유전하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무상이 보다 실감나는 것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서다. 어제 웃으며 헤어진 친구가 오늘 부고를 보내왔다는 얘기는 흔하다. 부처님이 출가를 결심한 것도 유년시절에 있었던 어머니의 죽음이 동기 가운데 하나였다.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전설은 이런 짐작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무상이라는 것은 '과연 그렇구나'하고 실감한다 해도 실제로는 절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자신의 죽음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외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막연히 알고는 있지만 '나도 죽는다'라는 것은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인간
은 공포에 떨게 된다. 죽음은 이때 인간에게 무엇보다 큰 고통이 된다. 무상이 무상으로 인식되지 않는 곳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이점이 불교가 제행무상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인생의 진실이다.
(2) 제법무아 = 불교의 슬로건이 '무아'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무아는 인도 정통파 철학사상인 우파니샤드 이래 '아(我)'라는 윤회와 해탈의 주체적 실재(實在)를 전제로 하는 유아설(有我設)에 대한 불교의 특색이기도 하다.'아'라는 것은 원래 나 자신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존재다. 세상에서 이만큼 자명한 것도 없다. 물론 철학적으로 그 본질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시끄러운 문제가 많다. 데카르트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옛부터 서양철학에서도 중요 과제가 되어 왔다. 특히 근대유럽은 자아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새로운 인류문화를 전개시켜 왔다. 이처럼 실감에서나 철학적 사고에서나 자아의 부정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아'라는 말을 일상어로까지 채택하고 있다.
이 경우의 무아는 이를테면 '무아의 경지'라고 말할 때처럼 정신없이 어디에 열중하는 것, 또는 자기망각, 멸사봉공적(滅私奉公的) 인생태도를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적 자아확립과 거기에 근거한 인생관과는 반대의 자세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견해는 불교를 근대적 자아관에 저촉된다고 보기 쉬운 요소다.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무아를 철학적 견해가 아니고 단순한 실천적 문제로서 파악하고 있는 한에서는 어느 정도 정당한 해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보다 깊은 뜻이 있다. 불교에서 무아설의 범형(範型)이 되고 있는 것은 오온무아라는 것이다. 팔리어 율장의 한 구절은 무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 '색(色 : 형태 있는 것, 즉 육체)'은 아(我 : 자기)가 아니다. 만약 색이 자기라면 이 색이 병에 걸리는 일은 없으리라. 또 색에 대해서 '나의 색은 이러하라(이를테면 건강하여라) 그렇게 되는 일 없어라(늙지 말라, 죽지 말라)'하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색은 아가 아니기 때문에 병에 걸리고 이렇게 저렇게(자유로이) 할 수가 없다… 이 '수(受 ; 괴로움과 즐거움의 감각)'가 자기란 말인가… 이 '상
(想 ; 이미지를 생각에 떠올리는 작용, 표상화)'이 자기란 말인가… 이 '행(行 ; 의지의 작용)'이 자기란 말인가… 이 '식(識 ; 인식, 판단의 작용)'이 자기란 말인가…"


이렇게 육체와 네 가지 대표적 정신작용을 제시한 다음 그 중 어느 것도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따로 어느 곳에 있는 것도 아니므로 자기라는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 경우 '아'는 '자유로운 것' '병 따위에 걸려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는 견해가 전제되어 있다. 이 점을 취해서 한역불전은 '아(我)란 상일주재(常一主宰)의 뜻'이라고 정의하고 있다.오온외에 눈·귀·코·혀·몸·뜻의 '육입(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드는 경우도 있다. 육입이란 요컨대 자기라고 생각되는 것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요소가 실체가 아님은 물론이다. 제법무아란 이렇게 우리가 자기라고 생각하거나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는 내가 아니며 따라서 어디에도 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설득하고자 하는 내용은 같다.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집이다. 바로 바로 이런 아집에서 부처님은 여러 가지 죄악의 근원을 찾아냈다. 아집은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낳는다. 그것이 달성되지 않으면 고통을 받는다. 구부득고(求不得苦)가 그것이다. 우리는 통상 '나'란 상주영원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한다면(無). '나'라고 불변일 수는 없다. 생로병사가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자아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무아의 증거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완전히 개인의 존재를 부정하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마는 않다.'진리를 등불 삼고 자신을 등불 삼으라(法燈明 自燈明)'는 부처님의 유훈은 분명히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제행은
무상이다. 결코 태만해서는 안된다'라고도 했다. 모든 것이 무상하므로 열심히 수행해야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실천의 주체'를 전제하는 것이다.

(3) 일체개고 = 고는 감각이다. 감각으로서의 고(苦受)는 낙과 대비된다. 다시 말해 고는 낙이 있으므로 있는 것이다. 고가 없으면 낙도 없고 즐거움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그러니까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고 괴로움은 즐거움의 씨앗인 셈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삶을 모두 괴로움이라고 보기에는 저항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삶은 즐거움을 향한 진보이다. 많이는 아니라도 우리는 그것을 조금씩 성취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어째서 고인가.불교에서는 현실의 삶을 고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상이고 무아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출발점은 이 고에 있다. 고가 없다면 불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제(四諦)의 가르침은 현실을 고로 보고 그것을 벗어나게 하려는 데 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고인가. 부처님은 이 고의 원인을 찾았다. 그 구극에서 발견한 것의 하나가 '갈애'라 불리우는 욕망 또는 집착(아집)이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무명'에 이르게 된다. 무명이란 진실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즉 모든 것이 무상이고 무아라는 진실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고 그것이 고의 원인인 것이다.고는 인생에게 주어진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대로 놔두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없애야 하는 것이다. 일체개고가 앞의 두 가지 명제와 다른 점은 일체가 고이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고의 상대개념으로서의 낙이 아닌 고락을 떠난 이상으로서의 낙, 즉 열반적정이다.
(4) 열반적정 = 경전에 이런 유명한 시가 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諸行無常)
그것은 생멸법이다(是生滅法)
생멸 그것마저 다 지멸해 버리면(生滅滅已)
그것(적멸)이 바로 낙이다(寂滅爲樂)."



이 시에서 제행무상을 깨닫는다고 쓰여져 있지는 않다. 생멸의 지멸이란 문자 그대로 생멸이 없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앎으로 해서 그것을 초월할 때 거리에 모든 고가 없어진 상태 즉 열만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적정 또는 적멸이라고 부르며 이상으로서의 낙(열반락)이라고 한다. 이 열반락의 획득이 불교의 목적이다.이상의 사법인은 사제설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연기(緣起;유래)라는 것은 말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면 연기는 이러한 사법인의 명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제행과 제법의 연기


지금까지 사법인을 말하면서 주어가 되는 제법·제행 또는 일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면 '일체'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뒤에서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먼저 '행'과 '법'이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행(行)은 불교용어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 가운데 하나다. 원어로는 삼스카라라고 하는데 '함께' '완전한'등의 의미를 가진 삼스카라 이라는 접두어와 '만든다', '한다'라는 뜻은 '함께 모여서 만드는 일'이라 한다.앞서 오온을 얘기할 때도 행이라는 말이 나왔다. 거기서 행의 뜻은 의지작용으로 설명되었다. 원어는 지금의 경우와 마찬가지지만 이것은 마음이 다른 것에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 뜻에서 오온에서의 행도 일종의 형성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광범하게 말한다면 무엇을 낳게 하는 힘과 작용이며, 그러한 작용을 가진 것 즉 결과를 탄생시키는 인이라 할 수 있다.

'인(因)'을 인도 정통파의 입장에서 설명한다면 브라흐만(梵)과 같은 창조주가 된다. 그리고 이 창조주는 변하지 않고 항상 있는 상주불변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존재를 부정한다. (이런 경우 무아는 무엇이든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하는 철학적 해석을 수용한다.) 그렇다고 모든 현상이 아무런 인도 없이 성립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으로 불교는 연기(緣起 = 緣生)라는 것을 내세운다.
부처님에게 어느 이교도는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괴로움은 자재천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괴로움은 스스로 만
든 것인가. 괴로움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이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괴로움은 연생(緣生)이다."


이 겨우 괴로움을 낳게 하는 인은 연생이다. 연생이란 지금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는 '행'이며 또한 그 작용인 것이다. 12지연기를 예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12지연기의 첫머리는 '무명에 의해 행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행은 무엇인가 만드는 힘이다. 신·구·의 삼업 또는 복(福)·비복(非福)·부동(不動)의 삼행이란 것이 이것이다. 신·구·의 삼업은 업(갈망)=행=작용(만드는 힘)이다. 삼행의 경우는 복(하늘에 태어나는 것 등)으로 인도하는 작용, 비복(즉 불행 직옥 등에 떨어지는 것)을 초래하는 행위자체를 나타내는 동시에 결과를 나타내는 힘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이 즉 업이다.행에는 이같이 카르카의 뜻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그것이 무명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이고 다음의 식(識)을 낳게 하는 작용이 된다. 다시말해 만드는 작용인 원인이 되는 것은 동시에 다른것에 대해서 결과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원인만이 된다든가 결과만이 된다든가 하는 것을 인정치 않는다는 이론이다. 12지연기에서 무명은 인이 되는 것을 상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마치 절대적인 인 같지만 이것은 지(知)의 부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전환가능한 상태로써 브라흐만과 같은 절대인은 아니다. 괴로움도 또한 항상 결과로써 브라흐만과 같은 절대인은 아니다. 괴로움도 또한 항상 결과로써 논의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없애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연기의 논리는 이렇게 모두 가변한 것이다.

이렇게 인(因)은 과(果)이며 그 관계는 무한하게 계속된다. 이 경우 인은 상스카라(行)라고 불리우고 과는 똑같은 동사의 과거분사형을 따서 '상스크리타'라고 한다. 다시 예를 들면 무명과 행 사이에는 무명이 삼스카라이고 행이 상스크리타이다. 행과 식 사이에는 행이 상스크리타가 된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유위(有爲)'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한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으로 '유위법'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유위란 행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인연소생의 법, 또는 연기된 것인 것이다.이것이 제법무아라고 할 때의 제법이다. 따라서 제행 = 유위법은 일체로서 그것들은 모두 무상이며, 무아이며, 괴로움(을 가져 오는 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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