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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융인의 맥( 泉 湖 큰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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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437회 작성일 14-08-16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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泉 湖  큰 스님
 
법명 : 천 호 (泉 湖)
속명 : 현낙규
1995년 8월 15일 涅 盤
 *부산 종무원장 역임 *
 *중앙종의회 의장역임*
 
참다운 인생사를 알기 위하여 출가를 결심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몫의 슬픔과 괴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때론 우리가 감당해내기 벅찬 슬픔과 괴로움을 겪기도 한다. 그런 슬픔과 괴로움 앞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고 괴로움에 가슴아파 좌절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슬픔이란 것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에 의해 즐거움으로 바뀌어 질수 있고, 가슴에이는 괴로움속에서도 삶의 지혜와 내일의 희망을 지닐수 있다. 슬픔과 괴로움앞에서 우리는 울기도 하고 가슴 아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이웃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통해서 극복되기 마련이다. 인간사 모든 것이 원인없는 결과는 없는 것처럼 인과연기 법칙에 의하여 인간은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과정을 통해서 살아가는것이다. 인간무상의 도리를 설명한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산다고 해서 그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대동하고 있는 것이 인간적인 삶이다. 인생이란 어려움의 연속이요, 고해(苦海)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생의 삶에서 영원상(永遠相)에 도달하지 못한 중생들의 집착인것이다. 인생! 얼마나 부르기에 벅찬 말인가?
단 한 번 밖에 없는 인생, 그것도 어쩌다가 인간으로 태어나 삶을 영위하는 인생의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는 그 인생을 잘 모르고 있다. 참다운 인생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인생의 이중구조를 알아야 한다. 생과사, 나와 너, 부모와 자식, 선과 악, 미와 추 등 이것이 대립하는 현상으로 상호 연기하면서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수줍은 듯한 청초함을 간직했다 하더라도 그것도 시간이 흘러 낙엽이 질때 추하게 땅에서 뒹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생은 이중구조를 벗어나지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것을 제행무상(제행무상)이라 말하고 또는 생멸법(생멸법)이라 한다. 결코 우리가 사는 인생은 나 혼자 만이 독립하여 불변하는것이 아니라 다른것과 상관하면서 존재하고 있다.
 결국 삶이란것도 죽음이 없다면 삶이 가치가 있겟는가? 또한 추함이 없다면 어떻게 아름다움이라 할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생을 산다는 것은 상대적인 연기의 세계를모를 때 고집과 자기집착의 독선에 빠지게 되고,마침내 이것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을 고해로 만드는 것이다. 인생은 연기에 의하여 서로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즐거움 속에 괴로움이 있고 삶속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우리들의 고뇌와 허무, 실망과 좌절 등이 마음의 소산" 이라고 말하며 모든것을 "마음 먹기에달려있다"라고 설파했다. 낙엽이 떨어지는 데는 그것이 떨어져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낙엽이 떨어지는 데는 그것이 떨어져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낙엽이 되지 않으면 그 나무는 죽어야 하고 다음 해에 다시 그 생명의 모습을 간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길은 우연한 길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말씀 하셨다.
 생멸 즉 있고 사라지는 것이 오직 오직 있는 것만이 아니라 없음으로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있으므로 없게 되는 것이 연기설이며 인생의 삶의 모습이다. 괴로움이 있으면 그것이 다하고 난 후에는 즐거움이 오게 되는 것이다. 산정을 오르고 고통이 없다면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기쁨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모두가 서로 인연을 맺고 상대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다.
 서로 상부상조 하면서 공존의 터전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만약에 한손에 무거운 것을 들고 다른 손에 가벼운 것을 들었을 때 무거운 손이 가벼운 손에게 너는 필요 없으니 없어져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몸전체의 한손이 없어진다면 그 아픔은 누구의 것인가? 결국 나의 아픔이 아닌가?"
 우리 인간의 삶은 결코 단독으로 홀로 살수 없다.
모든 것이 인연을 따라 이루기 때문에 하나도 그 자체가 실체로서 고유성을 가지지못한다.
 그리고 하나가 곧 일체요, 다(多)가 하나로 되어 있음을 알때 공존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가 서로서로 돕고,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상부상조의 순리를 인식해야 한다.
손의 열 손가락이 그 모습은 어딘가 다르지만 한 손가락이 아프면 열 손가락이 모두 아픈 것이다.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이기때문에 어떤 사람의 불행이 곧 나의 불행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이미 겉의 모습만 다를 뿐 그 뿌리는 하나라는 뜻이다.
 베풀고 나누어 주는 인간지사 당연한 이치다.
서로 돕고 의지 하는 것, 피 할수 없는 숙명이며, 인간됨이 운명이다.
 천호(泉湖)스님의 출가는 '지혜의 삶과 믿음의 삶'에서 비롯됐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인생 무상(人生無常) 의 진리를 설파했듯이. 인생에서 죽고 사는 생사의 문제는 해탈하기위해 출가 한 것이다.
 스님은 1933년 1월 10일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장단리에서 현남식씨를 아버지로 전씨를 어머니로 하여 3남매 중 큰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전(전)씨는 "꿈에 하늘에서 용(용)이 어께 위로 감싸고 품안으로 들어오는 현몽을받아
아이를 잉태 했다.
임신 할때 부터신기한 조짐을 보였던 이 아이는 날 때부터 총명하여 세상에 드문 인물이 탄생 하였다고 소문이 자자 했다 .
그는 성장하면서 파 .마늘등 비린음식은 즐기지 않았으며 천성적으로 슬기롭고 마음이 자비로워 주위에서는 장차 큰 인물이 될것이라는 예견을했다 .
 
 
부처님의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인연의 법칙에 따라 생(生)하고 사멸(死滅)하는 인연취산(因緣聚散)의 법칙에 따라서 홀연히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던 것이다 아버님의 병환과 고통 앞에 인간은 영원한 삶을 고집하지만 인생이 무상이라는 피치못할 운명에 부딧쳐
허무하게 생멸하는 인간이 덧없는 고통에 잠을 설치며 고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뜬구름 만양 덧없이 살아 진다면 얼마나 인생이 허무한 존재이던가 .천호스님은 서서히 가슴 깊숙한 곳에서 자기가 살아온 삶을 정리하여 24세의 젊은 나이에 문명의 혜택을 버리고
그간 살아온 인생자체의 재구성을위해 자기 자신마저 버리고 자기와 인간관계를 맻고 있던 모든 관계를 부정하고 자신의 숙명에 순응하여 1969년 24세의 나이에 종수큰스님 에게 찿아가 수행의 길로 인생 행로를 바꾸웠다 .천호스님은 종수큰스님의 법통을 이어받고 홀로 경전을 섭렵하고 내전등 왜전에 이르기까지 경전에 깊은 뜻에 두루통달 하시였다.천호스님은 재방 큰스승들을 찿아 다니며 학문의 폭을 확대하면서 제방을 유력하면서 문하에서 선지식을 탐구하면서 본격적인 공부에 남다른 정진을 거듭했으며 종수 종정스님 에게서 법맥을 계승하였다 스님은 대구천성사로 가기 전까지 정처없는 발길로 제방을 유력하여 오르지 고행을 익히고 죽을때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바로잡아 나갈것을 서원했다 .
스님께서는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대다 불법의 오묘한 진리에 정통하여 도(도)의경지가 높아 사람들은 스님을 자비의 보살 이라고 부르고있다 또한 자신의몸 이상으로 아끼는 자비로운 보살행이 널이 알려저 스님의 주석쳐에는 소문을 듯고 찿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스님께서는 불연 이깊어 세속적 영광을 초탈하여 질리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 고난의길을 개척하여 삼고삼성(三考三省)생활 신조로 부모님 에게 끝없는 효행을실천하며 중생교화의 모범적인물로 삼매의 경지에서 고통받는 이웃에게 육바라밀을 사회속에 회향하시고 떠나셨다 천호(泉湖)큰스님은 원융인 (圓融人 )대자유인 (大自由人)으로 걸림없는
삶을 살다 가신큰스님들이 많고많지만 그가운대 1995년 대를 마음대로 활보하고 호호탕탕 걸림없는 무애행(無碍行)을 보여주신 큰스승 이시였다
 
다음회차에는 원융 문도 이신  원암당 해암 스님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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