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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교수 한국불교에 "죽비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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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1,651회 작성일 12-08-0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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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 한국불교에 '죽비'
애정어린 관심 보일 때 변해야...
(((신지홍 기자)))
 
''중생을 위해준다'는 정신이 한국불교 속에 과연 남아 있는가'
'하루 몇천배의 '체육적인 수행'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이웃을 위해 쓰는 것이 더 불교적이지 않을까'
 
귀화 러시아인으로 한국불교와 고대사에 이해가 깊은 박노자 교수(오슬로 국립대)가 21일 발간된 격월간 「참여불교」
(5-6월호)에 기고한 '하화중생(下化衆生)이 없는 한국 선(禪)'이라는 글에서 한국불교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저서와 칼럼 등을 통해 우리 사회 곳곳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들춰왔던 박 교수는
'참선이라는 '역경에 대한 인내'를 불교나 수행으로 생각하는 불교관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며 포문을 열었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스님들의 수행담을 듣고는 "'중생을 위해준다'는 정신이 한국불교 속에 과연 남아 있는가"를 고심했다는
박 교수는 "일군의 외국 스님들은 한국에서 몇년씩 공부한다 해도 사찰 근처의 결식아동이나 최빈민층,
무의탁 노인 등에 대해 말 한 마디 들어볼 일이 없다"고 꼬집었다.
 
박 교수는 그러면서 "외롭고 배고픈 사람들과 가까이 살면서 그들의 고통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 과연 불교인가"라고 되묻는다.
박 교수가 보기에 사회의 구조적 부패 등을 외면한 채 참선만을 강조하는 한국불교는
'현실도피를 방불케하는 신앙행위(미신)'일 뿐이다.
 
박 교수는 특히 한국불교가 "참선 실천만큼 계율에 대한 의지가 철저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정상적 불교의 계율관으로는 분명한 파계로밖에 안 보이는 음주와 축처에 대한 태도는
중세 가톨릭 교회를 방불케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만난 스님들은
"화두나 참구 등을 통해 신비한 깨달음이 얻어진다면 사음(邪淫)이나 음주와 같은
'작은 죄악'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고 봤다"고 지적한 박 교수는
"구족계를 받은 수도자들의 사회가 기본 오계도 지키지 않는 구성원을 쉽게 용서해주는 분위기가 존재한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많은 경우 스님과 속인들 사이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기복적 의례와 불전(佛錢)의 헌납"이라며
"특히 고차원적인 종교적 관심의 발단이 돼야 할 기복이 기복 그 자체로만 끝까지 남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지적했다.
 
그는 나아가 "스님의 이미지는 신비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도력을 통해 복을 내려주는 매개자(무당)인
일종의 '도사'에 가깝다"고 힐난했다.
 
비판 끝에 박 교수는 자신의 경우
"기도회가 잦은 인근 사찰보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역사를 가르치는 일요일의 사회봉사가 훨씬 더 즐거운
수행의 장이 됐다"며 "내가 아는 적지않은 수의 한국인 젊은 도심 불자에게도 사찰 밖의 대중적 활동은
사찰의 별천지보다 나은 수행의 장"이라고 단언했다.
 
박 교수는 한국불교의 희망을 재가불자들에게서 찾았다.
"진보적 보살과 거사들은 불교를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극복할 수 있는 대의로 인식해
승가의 구습을 탈피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학 내의 권위주의적 횡포이든, 군대의 폭력문화 가용이든, 신자유주의의 비정규직 양산이든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이면 불교적 입장으로 맞서는 데서 '구세주의적' 불교의 윤곽이 잡히지 않을까"라는 게 박 교수의 기대이다. 
http://solsam.zio.to/technote/read.cgi?board=read&y_number=38
 
 
 
박노자에게 말하노라.
세속에 뛰어들어 여러 구제사업이나 활동만이 불교라는 그대의 주장은 선만이
불교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가부좌 중독 게르름뱅이 중놈 보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진정한 불교는 붓다에 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세속에 나가 동냥하고,
돌아와 수행하고 여러 깨달음에 대한 론을 펼치고
홀로 조용한 데서 수행하고,
 
어느 날에는 세상에 내려가 온갖 대중을 만나 설법하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수행과 보살도의 실천을 어느 것 하나 치우침이 없이 행했다.
 
박노자여!
 
이 어리석은 자여.
수행도 하지 않은 사람이 세속에 내려와 보살도를 행한다며 이리 쫒아다니고 저리 쑤시고 다니는
것은 악취와 같다.
 
중생속의 스님의 얼굴은 수행으로 이미 빛나 있어야 보살도이다.
 
수행 자체가 보살도의 실천일 수도 있고
수행없는 보살도는 사회 시민운동가에 불과하지 않지 않는가?
수행하여 깨달음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중놈이 하는 사회활동은 불교를 허무는 좀벌레 보다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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