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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淨法身 비로자나불 華嚴敎의 本尊

(사)대한불교원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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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귀감 1. 淸虛堂 / 休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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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산
댓글 0건 조회 2,697회 작성일 12-10-25 17:30

본문

선가귀감은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이 지은 책이다.
선(禪)의 진수와 불교를 배우고 수행하는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고자 지은 것으로
대장경과 선사의 어록 가운데서
요긴한 것을 추려 모아 저자가 주해를 달고
간혹 송(頌)과 평(評)을 붙인 것이다.
저자 청허의 서문과 그 제자 사명대사의 발문이 있다.
초판은 1579년 원문인 한문본으로 판각되었으나
그 뒤 여러 곳에서 한문본과 언해본이 간행되었고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진 책이다.
 

1. 이끄는 글

예전에는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부처님께서 행하셨던 계행(戒行)이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배로 여기는 것은
오직 대장경의 거룩한 글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은
서로 전해가면서 외우는 것이 세속 사대부(士大夫)의 글이요,
청하여 지니는 것이 벼슬아치들의 시뿐이다.
그것을 울긋불긋한 종이에 쓰고,
고운 비단으로 꾸며서,
아무리 많아도 만족할 줄을 모르고 가장 큰 보배로만 생각하니,
아! 예와 지금의 불교 공부하는 이들의
보배 삼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이 다를까.
미흡한 산승이 옛 글에 뜻을 두어 대장경의 거룩한 글로써
보배를 삼기는 하지만 그 글이 너무 길고 많으며
대장경의 바다가 너무 넓고 아득하므로
뒷날 뜻을 같이 하는 여러 벗들이 가지를 헤쳐가면서
잎을 따는 수고로움을 면하지 못할 것 같아서,
글 가운데서 가장 요긴하고 간절한 것
수백 마디를 추려서 한 장에 쓰고 보니,
글도 간단하고 뜻도 두루 갖추어졌다고 할 만하다.
만일 이 글로써 스승을 삼아 끝까지 연구하여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된다면 마디마디에 살아 있는
석가여래(釋迦如來)께서 나타나실 것이니,
부디 부지런히 노력하라.
그리고 문자(文字)를 떠난 한 마디 활구(活句)와
상식적인 형식의 틀을 벗어난[格外] 선지(禪旨)의
기묘한 보배를 쓰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장차 특별한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2. 마음

[본문]
여기에 한 물건(마음)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름을 지어 붙일 수도 없고,
모양으로 그려 보일 수도 없다.
 
 
[주해]
한 물건[一物]이란 대체 무엇일까?
먼저 깨달은 옛 사람은 이렇게 읊었다.
"옛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부터
동그라미 일원상(一圓相)이 뚜렷이 밝았다.
석가모니께서도 몰랐는데 어찌 가섭(迦ⓣ)이 전했겠느냐."
이 한 물건(마음)은 생겨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어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육조(六祖)스님이 대중에게 물었다.
"나에게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너희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하였는데
신회(神會)선사가 곧 대답하기를
"그것은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며,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하였다.
이것이 육조스님의 서자(庶子)가 된 까닭이다.
회양(懷讓)선사가 숭산(崇山)에서 와서 인사를 드리니
육조스님이 묻기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니
회양선사는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다가 8년이 지나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일러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一物]이라고 말해도 맞지 않습니다"하였다.
이것이 육조스님의 적자(嫡子)가 된 연유이다.
 
 
[송]
삼교(三敎)의 성인(聖人)이 모두 이 말(마음)에서 나왔네.
누가 말해 볼 사람이 있는가.
잘못 말했다가는 눈썹이 빠지리라.
 

3. 본래 완전한 마음

[본문]
부처님과 조사(祖師)가 세상에 나오심은
마치 바람이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주해]
부처님은 석가 세존이고, 조사는 가섭존자이다.
이분들이 세상에 나오신 것은 대비심(大悲心)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마음[一物]을 살펴보면 사람마다 본래 마음의 성품이
저절로 원만히 이루어졌는데 어찌 다른 사람이
연지를 찍어 주고, 분을 발라 주기를 바라겠는가.
허공장경(虛空藏經)에서 "진리의 세계를 보는 데 있어서는
문자도 악마와 같은 방해물이고,
온갖 사물의 이름과 형상[名相]도 악마와 같은 방해물이고,
부처님의 말씀까지도 악마와 같은 방해물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뜻이다.
누구나 근본 마음의 바탕은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라는 처지에서 보면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도 아무 소용이 없다.
 

4. 근기에 따른 여러 가지 방편

[본문]
그러나 모든 사물과 이치[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기질이 있으므로
여러 가지 방편을 통해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
 
[주해]
법(法)이란 한 물건[一物], 즉 마음이고,
사람이란 중생을 가리킨다.
마음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여(眞如)의 마음과
인연을 따라 변화작용하는 마음, 두 가지가 있다.
사람에게는 단번에 깨치는 상근기와
오래 닦아서 깨달음을 얻은 하근기의 두 가지 기질이 있다.
그러므로 문자나 말로 가르치는 여러 가지 방편이 없을 수 없다.
 
[본문]
굳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다, 부처이다, 중생이다 했으나,
그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의 분별(分別)을 내지 마라.
모두가 그대로 옳은 것이다.
한 생각이라도 일으키면 곧 어긋난다.
 

5.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

[본문]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三處傳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주해]
세 곳이란 세존께서 다자탑(多子塔)에서 설법하실 때
앉아 계시던 자리의 절반을 나누어
가섭(迦ⓣ)에게 함께 앉아 하심이 첫째요,
세존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실 때
가섭이 마음으로 알아 차리고 미소를 지어 응답했음이 둘째요,
세존께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돌아가실 때
임종의 시기를 놓쳐서 늦게 도착한 가섭에게
관 속의 두 발을 밖으로 내어 보이심이 셋째이니,
이것이 가섭존자가 세존으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를 따로 마음으로 전해 받은 선(禪)의 등불이다.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말씀하신 것이란
45년 동안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 다섯 가지 가르침[五敎]인데,
첫째는 인천교(人天敎),
둘째는 소승교(小乘敎),
셋째는 대승교(大乘敎),
넷째는 돈교(頓敎),
다섯째는 원교(圓敎)이다.
이른바 아난다존자가 교학(敎學)의 바다를
흐르게 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선문(禪門)과 교문(敎門)의 근원은 석가 세존이시고,
선문과 교문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다존자이다.
말이 없는 무언(無言)으로써
말 없는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수행법이 선문(禪門)이고,
대장경의 말로써 말 없는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공부 방법이 교문(敎門)이다.
또한 마음으로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 선법(禪法)이요,
 말로써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 교법(敎法)이다.
진리의 법은 한 맛이나,
견해나 수행 방법을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6. 참마음을 얻으면 모든 것이 진리를 설하는 법문
 

[본문]
진리를 이름이 없으므로 말로써 설명할 수도 없고,
진리는 모양이 없으므로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무엇이라고 말해보려고 한다면 벌써
근본 마음[心王]의 바탕을 잃은 것이 된다.
본바탕 마음을 잃게 되면 부처님이 꽃을 드신 것이나,
가섭존자가 미소를 짓는 일이 모두 쓸데없는
죽은 이야깃거리가 되고 만다.
마음을 얻은 사람은 장사꾼의 잡담이라도 모두
법사(法師)가 진리를 설하는 법문과 같을 뿐 아니라,
새의 소리와 짐승의 울음까지도 진리를 설하는 법문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적(寶積)선사는 통곡하는 소리를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어 춤추고 기뻐하였으며,
보수(寶壽)선사는 거리에서 주먹질하며 싸우는 사람을 보고
본래가 천진(天眞)한 마음의 본바탕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선(禪)과 교(敎)의 깊고 옅은 세계를 밝힌 것이다.
 
[주해]
생각을 끊고 얽힌 인연을 잊었다는 말은
참 마음을 얻었다는 것을 가리킴이니,
이른바 마음을 다 닦아서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閑道人]이다.
"즐겁다.
어디에나 걸림이 없고,
본래부터 일이 없어서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고단하면 잠을 잔다.
맑은 물과 푸른 산을 마음대로 노닐 뿐만 아니라,
고기잡는 어촌과 술을 파는 주막에도
마음에 걸림없이 자유자재하다.
세월이 가나 오나 내가 알 바 아니언만,
봄이 오니 예전과 같이 풀잎이 푸르구나."
이것이 진리를 밖에서 구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서 찾으면서 한 생각이 일어날 때,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봐야 할 사람을 위한 것이다.

7. 조사의 가르침은 단번에 깨치는 법
[주해]
부처님은 영원한 스승이므로 모든 중생을 위해
자세하게 설명하여 가르치셨고,
조사(祖師)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즉시에 해탈하도록 단번에 깨치는 가르침을 위주로 하였다.
[본문]
부처님은 활[弓]처럼 말씀하셨고,
조사들은 활줄[絃]처럼 곧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이 없는 법이란
모든 사물이 실제 모습이 서로 다르지 않고
절대 평등한 한 맛[一味]에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 한 맛의 자취마저 떨쳐버려야 비로소
조사(祖師)가 내보인 참 마음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의 화두(話頭)는
용궁(龍宮)의 대장경 속에서도 없는 것이다"고 했다.
[주해]
활[弓]처럼 말씀하셨다는 말은 둥글둥글 자세히 설명해서
`굽다[曲]'는 뜻이요,
활줄[絃]처럼 말씀하셨다는 말은
직접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설명했다는 데서
`곧다[直]'는 뜻이다.
용궁의 장경이란 뜻은 용궁에 모셔 둔 대장경(大藏經)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스님께 묻기를
"달마(達摩)대사께서
서쪽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조주스님이 눈 앞에 보이는 잣나무를 가리키며
"뜰 앞의 잣나무니라"하였다.
이것이 보통 사람의 소견이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오직 마음으로만
체득(體得)될 수 있는 격의 박[格外]의 선지(禪旨)이다.

8. 경전에의 집착을 떠나서 마음을 닦으라
[본문]
그러므로 공부하는 수행자는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써 변하지 않는
성품과 인연을 따라서 작용하는 마음,
두 가지 뜻[二義]이 곧
내 마음의 본 바탕과 형상임을 알아야 한다.
단번에 깨치고[頓悟] 차츰차츰 오래 닦는[ 修]
두 가지 수행 방법이 있는데 그 앞과 뒤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교학(敎學)의 뜻을 버리고 오로지
그 마음이 뚜렷이 드러난 한 생각으로써 참선(參禪)한다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수행자가 가야 할 바른 길이다.
[주해]
높은 근기와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은 함부로 건너 뛰어서는 안된다.
교학(敎學)에는 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에 따르는 것,
단번에 깨치는 수행법[頓門]과
차츰차츰 오래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漸門]에
그 앞과 뒤가 있다는 뜻이다.
선법(禪法)이란 한 생각 가운데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體]와 환경과 인연에 따르는 마음의 작용[用]이
원래 한 마음 속에 동시에 있다.
그러므로 진리의 세계에서 볼 때는
모든 것이 차별이 없이 다 똑같고,
현상 세계에서 볼 때는 모두가 다르다.
그래서 깨달은 종사(宗師)는 진리를 설하되 말을 여의고,
바로 한 생각을 가르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교학(敎學)을 버리고 선(禪)을 택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9. 활구(活句)를 참구하라
[본문]
참선 수행자는 살아 있는 화두(話頭)인
활구(活句)를 생각하고 연구해야지
죽은 말인 사구(死句)를 참구(參究)하지 말라.
[주해]
살아 있는 활구(活句)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나 조사와 함께 스승이 될 것이고,
죽은 사구(死句)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한다면
자신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활구(活句)를 들면 저절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10. 참선하는 마음 자세
[본문]
공안(公案)을 참구할 때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이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해야 하고,
굶은 사람이 밥을 생각하듯이 하며,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듯이 하고, 어
린애가 엄마를 생각하듯이 하면
반드시 칠흑 같은 어두운 세계를 벗어나
깨달음의 관문을 꿰뚫을 때가 있을 것이다.
[주해]
조사들의 공안(公案)은 1,700가지나 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 했는데
조주(趙州)스님이
 "개에게는 부처의 성품이 없다[狗子無佛性]"고 한 것이든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 말에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栢樹子]"하고 대답한 것이라든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
동산(洞山)스님이
"삼 세 근이다[麻三斤]"라고 대답한 것이라든지,
또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묻는 질문에
운문(雲門)스님이
"마른 똥막대기니라[乾뷩궐]"하고 말한 것들이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따뜻한 기운이 항상 지속되고 있으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에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게 되고,
굶을 때에 밥을 생각하는 것과
목이 마를 때 물을 생각하는 것이나
어린애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간절한 진심(眞心)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억지로 지어서 내는 마음이 아니므로 간절한 것이다.
참선하는 데에는 이렇듯이 간절한 마음이 없이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11. 참선의 세 가지 요소
[본문]
참선할 때는 반드시 세 가지 중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첫째는 큰 신심[大信根]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 志]이요,
셋째는 큰 의심[大疑情]이다.
만약 셋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세 발 달린 솥의 다리가 부러진 것과 같아서 못쓰게 된다.
[주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하셨고,
영가(永嘉)스님은 "도를 닦는 수행자는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하셨고,
몽산(蒙山)스님은
"참선하는 사람이 화두(話頭)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하셨으며, 또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닫는다"고 하셨다.

12.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일상 생활을 하는 도중에 무슨 일을 하면서든지
오직 한 생각,
`조주스님은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고 한
화두(話頭)를 끊임없이 추구하여,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경지가 되어
이치의 길[理路]이 끊어지고,
뜻의 길[義路]이 사라져서 결국은 아무 맛도 없어지고,
마음이 답답할 때가 바로 자신의 몸과 목숨을 내던질 곳이다.
이것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수 있는 대목이다.
[주해]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개에게도 부처의 성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없다[無]"고 대답했다.
이 한 마디는 선종(禪宗)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關門)이며,
온갖 못된 생각과 지식을 꺾어없애는 연장이며,
또한 모든 부처님의 본래 모습이고,
조사들의 골수(骨髓)다.
이 관문을 뚫고 나간 후에야 부처나 조사가 될 수 있다.
먼저 깨달은 옛 사람은 이렇게 읊었다.
"조주(趙州)스님의 무서운 칼 서릿발처럼 번쩍이네.
무어라 잘못 물으면 몸뚱이를 두 토막 내리."
[본문]
화두(話頭)는 의심을 일으켜서 그 뜻을 논리적으로
알아맞히려 해서도 안되고 생각으로 헤아려서도 안된다.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더 생각할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 생각하면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마치 늙은 쥐가 물소의 길다란 뿔 속으로 들어가다가
잡히듯이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따지고 맞추어 보는 것이
그릇된 생각과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나고 죽음을 따라 굴러다니는 것이
그릇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며,
두려워서 갈팡질팡하는 것도 또한
그릇된 생각을 일으키는 식정(識情)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 병을 알지 못하고
이 속에서 빠졌다 나왔다 하고 있을 뿐이다.

13. 공부하는 방법은 중도(中道)
공부를 하는 방법은 거문고의 줄을 고르듯이 해야 한다.
거문고의 줄이 팽팽함과 느슨함이 알맞게 골라서
조율(調律)이 되어야 한다.
너무 긴장하여 애쓰면 집착(執着)하기 쉽고,
너무 느슨하여 마음을 놓아버리면
어리석은 무명(無明)에 떨어지게 된다.
정신이 또록또록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차근차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주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이 말하기를
"거문고의 줄이 알맞게 조율이 되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조급하게 서둘면 혈기를 올리게 될 것이고,
방일해서 잊어버리면 흐리멍텅 바보가 되고 만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중도(中道)에 따라 공부를 하면 오묘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14. 도가 높아질수록 마(魔)가 치성하다
[주해]
마군(魔軍)이란 나고 죽는 생사를 좋아하는 귀신의 이름이고,
8만 4천 마군이란 중생의 8만 4천의 번뇌이다.
악마란 본래 종자(種子)가 없는 것인데
수행자가 바른 생각을 잃는 데서 그 움이 트게 된다.
중생들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이 공존(共存)하나,
수행하는 도인은 그 환경에 거슬리므로 악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방해하는 마(魔)가 드세다"고 한 것이다.
어떤 스님이 선정(禪定)에 들었는데
상복을 입은 사람이 "네가 우리 어머니를 왜 죽였느냐?"고
대들어서 옥신각신 시비 끝에 도끼로 그 사람을 찍었는데
자기 다리가 찍혀서 피가 났으며,
또 어떤 스님이 선정에 들었는데
멧돼지가 쫓아와 대들기에 멧돼지 코를 붙잡고
소리를 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의 코를 붙잡고 있었다는 일화가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악마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온갖 시비와 분별에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이면 악마가 아무리 많은 재주를 부려도
마치 칼로 물을 베거나,
광명(光明)을 입으로 부는 격이 될 것이다.
옛말에 "벽이 갈라져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 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악마가 들어온다"고 했다.
[본문]
밖으로 일어나는 마음은 천마(天魔)이고,
일어나지 않는 마음은 음마(陰魔)이고,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煩惱魔)이다.
그러나 우리 불교의 바른 정법(正法)가운데에는
본래 그런 일이 없다.
[주해]
무심(無心)한 것이 불도(佛道)이고,
분별(分別)하는 것이 악마의 짓이다.
악마의 일이란 허망한 꿈 속의 일인데
더 길게 말할 것이 무엇이랴.
[본문]
마음을 밝히는 공부를 한 단계라도 이루었다면
비록 금생(今生)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죽어서 눈을 감을 때에 악업에 끌리지는 않을 것이다.
[주해]
이기적인 행위는 어리석은 무명(無明)이고,
선정(禪定)은 밝은 지혜이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서로 맞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15. 참선하는 이가 점검해야 할 16가지 도리
참선(參禪)하는 수행자는 항상 이렇게 돌이켜 보아야 한다.
네 가지 은혜[四恩]가 깊고 높은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四大]로 구성된 이 육신이
점점 썩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들이마시고 내윽는
한 번의 숨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와 같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서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았는가.
 
높고 거룩한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버린 경우가 있었는가.
공부하는 장소를 떠나지 않고
수도인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는 사람과 잡담이나 하고 지내지 않는가.
부질없이 시비(是非)를 일으키고 있지나 않은가.
화두(話頭)가 어떤 상황에서도 분명하여 어둡지나 않는가.
 
이야기할 때도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되는가.
보고듣고 알아차린 때에도 한 조각을 이루고 있는가.
제 공부를 돌아볼 때 부처와 조사를 붙잡을 만한가.
금생(今生)에 꼭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의 은혜를 이을 수 있을까.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육신으로 윤회의 고통을 벗어날 자신이 있는가.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온갖 현상이 나에게 닥쳐와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이것이 참선하는 수행인이 일상 생활 속에서
때때로 점검해야 할 도리(道理)이다.
먼저 깨달음을 얻은 옛사람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몸을 금생에 못 건지면
다시 어느 세상에 태어나 건질 것인가."
[주해]
네 가지 은혜란
부모와 나라와 스승과 시주(施主)의 은혜이고,
네 가지로 된 더러운 몸이란
아버지의 정액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 한 방울이
물[水]의 젖은 기운이요,
뼈와 살은 땅[地]의 단단한 기운이요,
정기(精氣)와 피의 한 덩어리가 썩지도 않고
녹아버리지도 않는 것은 불[火]의 더운 기운이요,
콧구멍이 먼저 뚫려 숨이 통하는 것은
바람[風]의 움직이는 기운이다.
아난다존자가 말하기를
"정욕(情欲)이 거칠고 흐려서 더럽고 비린 것이
한데 어울리어 뭉쳐진다"고 한 데서
더러운 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한 생각 할 때마다 육신이 썩어간다는 것은
세월이 잠시라도 쉬지 않아서
얼굴은 저절로 주름살이 잡히고
머리털은 어느 사이에 희어간다는 뜻이다.
옛말에 "지금은 이미 옛 모습이 아니네.
옛날이 어찌 지금과 같았겠는가"라고
한 바와 같이 과연 덧없이 무상(無常)한 이 몸이 아닌가.
세월이란 무상한 귀신은 모든 생명체를 죽이는 것으로서
즐거운 유희로 삼으므로 생각할수록 두려울 뿐이다.
내쉬는 날숨은 불의 기운을 몸 밖으로 내윽는 것이요,
들이마시는 들숨은 바람 기운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오로지 들이마시고 내윽는 숨에 달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여덟 가지 현상[八風]은
마음에 맞는 것과 마음에 거슬리는 것,
두 가지 환경이 있다.
지옥의 고통이란 인간의 60겁이 지옥의 하루가 되는데,
물이 끓고 숯불이 튀고 뾰족한 칼산에서
끌려다니는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가 마치 바다 한 가운데 떨어진
바늘을 찾기 보다도 어렵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모르는 여러 사람을 불쌍히 여겨
경계(警戒)의 말로 일깨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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